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설입니다. 아침 일찍 목욕탕 다녀오셨나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온탕에 물이 1/3, 사람이 1/3, 둥둥 떠다니는 때가 1/3 아니었나요? 저도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비집고 탕 안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한참을 불리고 나왔는데, 탕에서 나오니 앉아서 때를 밀 자리가 없더군요.
 
제가 자취하는 동네의 목욕탕은 설날 아침까지도 영업을 했습니다. 목욕탕 사장님은 평소보다 설에 장사가 워낙 잘돼서 고향에 내려갈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저도 설 전날 아침에 목욕을 마치고 그날 오후부터 저녁8시까지, 그리고  설날 4시부터 아침10시까지 이 곳에서 '알바'를 하기로 했습니다. 
 
구식 목욕탕을 보니 예전 생각이 나서 '설날에 이 목욕탕을 한번 관찰하고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려볼까?'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오른 것이지요.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목욕탕 취재가 끝나고 바로 내려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개조한 재래식 목욕탕 보고 어린 시절 떠올라
 
이 목욕탕은 문을 연 지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굴뚝 보이시지요? 요즘은 찜질방이 워낙 많아서 이런 구식 목욕탕을 찾기가 힘듭니다. 이곳도 그나마 5년 전쯤에 내부를 현대식으로 개조했다고 합니다. 개조를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오른쪽 위 사진은 온탕과 열탕의 모습입니다. 찬물과 더운물이 각각 나오는 두 수도꼭지로 물의 온도를 조절하지요. 이곳에서 더운 물이 자욱한 수증기를 내뿜으며 '콸콸'하고 쏟아지면, 아이들은 데일까봐 무서워 탕안에 들어갈 수조차 없습니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사진은 탕이 아니라, 바가지로 퍼서 몸에 끼얹으라고 물을 받아놓는 곳입니다. 예전에는 목욕탕에서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찜질방이나 사우나에 가도 이런 곳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땐 온탕이 너무 뜨겁게 느껴져서 그나마 덜 뜨거운 이곳에 들어가 몸을 불리며 동생과 놀곤 했습니다. 그래서 "물 더럽힌다"고 어른들께 자주 혼나기도 했지요.
 
저희 아버지는 우리 형제 둘을 데리고 '장미 목욕탕'이라는 동네 목욕탕으로 가곤 했습니다. 2시간 동안 때수건으로 저희를 깨끗이 밀어주시고는 녹초가 되어서 목욕탕을 나서셨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는 새빨개진 제 얼굴을 가리키며 "애들 얼굴 다  벗겨놨다"며 아버지를 심하게 탓하기도 하셨지요.
 
가족들이 모두 동네 목욕탕으로 나설 때는 부모님이 저희 형제를 하나씩 맡아서 여탕과 남탕에 데리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집에 보일러가 없어 연탄불로 물을 데웠기 때문에 가족 모두가 집에서 목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지요. 그래서 설 전날은 온 가족이  목욕탕으로 출동하곤 했습니다.
 
"아빠, 나 저거 사줘"
 
제가 텔레비전을 보며 수건을 정리하고 있는데 한 꼬마가 탕에서 나와 쪼르르 달려오더니 음료수가 있는 냉장고 안을 들여다 봅니다. 그러고는 다시 탕 안으로 들어가더니 자기 아빠를 끌고 나옵니다.
 
"아빠, 나 저거 사줘."
 
아이는 '헬로000'라는 음료수를 집어 들고 마시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바나나맛 우유나 00우유 같은 것들이 냉장고에 있었는데 이제는 홍삼, 칡, 비타민, 커피, 이온음료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핫바 있어요?" 아이가 옆에 앉아 있던 이발사 최성호(67)씨에게 묻습니다.
 
"핫바? 그게 뭐니?"
"핫바요. 핫바."
"핫바? 음료순가? 그런 음료는 없는데…."
 
아이가 답답해 합니다. 핫바가 없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고는 "딴데는 다 있는데…"라며 돌아갑니다. 아이 아버지는 "이 앞 편의점에서 사먹자"고 아이를 달랩니다.
 

잠시 후에 또 다른 아이가 탕에서 나옵니다. 아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어이쿠' 깜짝 놀랐습니다.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습니다. 이 아이는 자랑스럽게 남자 탈의실 안을 활보하더니 역시 냉장고 앞에 섰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유리(5)였습니다. 유리는 아빠 손을 꼭 붙들고는 말도 못 꺼내고 손으로 복숭아맛 주스를 가리킵니다. 그러고는 빨간 빨대를 물고 또 다시 남자 탈의실 안을 돌아다닙니다. 
 
유리 아빠가 유리에게 신발을 신겨주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아이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아빠 머리를 붙잡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꽈당'하고 엉덩방아를 쪘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울지않고 연신 저를 보며 히죽거립니다. 예쁜 분홍색 신발을 신고 나서 아이는 아버지 손을 꼭 붙잡고 남탕 문을 나섰습니다.  
 
설, 동네 목욕탕 들른 많은 가족들
 
많은 가족들이 목욕탕에 들렀습니다. 3대가 온 가족도 있고, 형제끼리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조카를 데리고 와서 등을 밀어주는 가족도 있었습니다. 서로의 묵은 때를 씻겨주며 새해를 준비하는 모습은 참으로 따뜻했습니다.
 
저도 설 전날 아침 일찍, 동생과 함께 목욕탕을 찾았습니다. 지난 설에 목욕탕에 한 번 온 일이 있으니깐 이번에 목욕탕에서 1년 동안의 묵은 때를 벗겼네요. 서로 서로 등을 밀어주며 "좀 씻고 다니라"는 핀잔을 주고 받았지만 '설을 핑계삼아 동생과 목욕하러 온 것이 너무나 잘한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대학에 들어온 뒤로 목욕탕에는 자주 가지도 않거니와  2시간 동안 동생과 살을 맞대며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 눈을 마주친 적도 최근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쁜 생활속에서 형제, 혹은 아버지의 몸을 만지고 대화를 하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이 아닌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이번 설을 맞이해서 묵은 때도 벗기고, 가족간 사랑도 확인해 보셨나요?
 
아쉬우시다면 설날 연휴가 다 지나가기 전에 동네 목욕탕 한 번 들르시는 게 어떨까요? 요즘 동네 목욕탕, 손님 없고 연료비 많이 나와 힘들기는 하지만, 설날 연휴는 언제나 문을 연다고 합니다. 이 날이 목욕업계에서는 소위 '대박 날'이거든요.  

덧붙이는 글 | 이재덕 기자는 <오마이뉴스> 7기 대학생 인턴기자 입니다


#설#대중목욕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