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는 794년 간무왕의 헤이안 천도(수도를 나라에서 교토로 옮김) 이후 1868년 도쿄천도까지 약 천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곳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관광도시이다. 중국의 장안을 모델로 만들었기 때문에 거리는 바둑판처럼 잘 정돈되어 있고 수많은 사찰과 유적을 볼 수 있다.
교토는 헤이안 천도 이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수세기에 걸친 역사 속에서 전통 산업과 예술 건축물 등에 힘을 쏟아 번영해왔다. 일본 문화재의 20% 이상이 교토 지방에 집중되어 있어 모든 일본 사람들 마음의 고향으로 여긴다.
교토를 개인적으로 여행하려는 사람에게 꼭 권장하고픈 일이 있다. JR교토역 2층에 가면 여행자 안내소에서 한국말을 능숙하게 잘하는 아주머니가 소상하게 가르쳐준다. 한국말로 써진 여행안내서도 받을 수 있고 계획을 철저히 세우지 않은 여행자는 구간별로 체크해 주면서 안내해 준다.
시영버스 한 번 이용하는데 220엔이다. 볼 게 너무 많은 교토에서 만약 하루에 시영버스를 3번 이상 이용할 계획이라면 1일 승차권(500엔)을 사면 경제적이며 하루 종일 몇 번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 이밖에도 시영버스, 지하철, 교토버스를 몇 번이라도 이용할 수 있는 편리한 1일 승차권도 있다. 이 승차권을 사면 몇몇 사찰에서는 할인도 받을 수 있다.
교토는 크게 라쿠토(洛東), 라쿠사이(洛西), 라쿠난(洛南), 라쿠호쿠(洛北), 라쿠주(洛中)로 지역을 나눈다. 라쿠(洛)라는 것은 옛날 수도인 교토를 의미하는 말이다. 라쿠추란 명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시를 개조할 때, 성곽주변에 흙담을 축조하여 그 내부를 라쿠추(洛中), 바깥쪽을 라쿠가이(洛外)라고 부른 것에 유래한다.
교토 시내에 흩어져 있는 많은 사찰과 신사를 다 둘러볼 시간과 필요가 있을까? 사실 입장료가 500엔 정도하니 굉장히 비싸다. 꼭 필요한 유적과 지역만 둘러보고 도시가 주는 느낌과 역사를 보면 된다.
안내서를 보니 도지는 JR교토역에서 도보로 13분이란다. 하지만 지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쉽지 않다. 특히 일본말을 몰라 영어로만 물을 때는 더더욱 어려움을 느끼는 곳이 일본이다. 교통경찰이나 순경에게 물어보면 그래도 훨씬 나은 편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도지(東寺)는 헤이안천도 전후에 성의 동쪽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약사여래를 본존으로 모시고 있으며 높이 57m의 오중탑은 현존하는 일본의 오중탑 중에서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며 교토를 상징한다.
도지를 나와 라쿠토행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해도 차가 오지 않는다. 지나가는 아주머니나 고등학생도 말이 통하지 않아 도지파출소에 들어가 라쿠토지역으로 가는 차편을 묻는데 순경 하나가 들고 있는 한글 안내서를 보고 한국말로 친절하게 안내해 주고 틀린 방향으로 가는 걸 보고 따라와서 길 건너 편 버스정류장까지 알려준다.
한국 친구한테 한국말 배운 지 3년쯤 됐다는 히라너고우조 순경의 도움을 받으며 생각해 본다. 한국도 관광객이 많은 지역파출소에 기본적인 영어 일어 중국어 정도를 할 수 있는 경찰을 배치하면 한국에 대한 인상이 훨씬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토국립박물관 건너편에는 산주산겐도가 있다.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라는 이름은 건물 기둥이 33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33이라는 숫자는 관음보살의 자비가 33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해서 유래한다. 아홉 개의 얼굴과 천개의 손을 가진 천수관음좌상을 중심으로, 천수관음 입상 1001체가 안치되어 있으며 양쪽 끝에는 호법신, 풍신, 뇌신상이 위치한다.
일본인들이 한국 한국관광객들을 위해 제작한 한글 안내서에도 나오지 않는 조그만 요겐인이라는 절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가미가 아버지를 공양하기 위해 창건한 사원이다.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가문이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변모하면서 역대 장군들의 위패를 모셨다.
조그맣고 평범한 생김새로 봐서는 여느 절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곳이지만 요겐인은 혈천정(血天井)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에 이은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에 도요토미가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지지자들과의 세키가하라에서 마지막 결전(1600년)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오늘의 도쿄(당시는 에도)시대가 열린다.
후시미 성은 당시 이에야스의 부하가 지키던 성이었는데, 적의 집중 공격을 받아 마침내 함락되고 만다. 그러자 성을 지키던 모든 사람들이 비분강개하여 자결하고, 유골들은 성 전체를 피로 물들였다.
훗날 그때 죽은 사람들을 공양하기 위해 사찰의 천장을 만들 때 후시미성의 잔재를 사용했고, 혈흔이 묻어 있는 천장이라는 뜻의 혈천정이라고 불렀다. 요겐인에는 사람이 쓰러진 모양대로 혈흔이 남아 있지만, 일본 참배객들이 너무나 엄숙하게 절을 하고 사진 촬영도 금하고 있어 밖의 모습만 찍었다.
오래 살고 싶으면 산넨자카에 가서 100번만 구르면 된다. 산넨자카(三年坂)는 한문을 보면 알겠지만 이곳에서 넘어지면 3년밖에 못 산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그럼 백 번만 구르면…. 산넨자카는 일본의 전통 건물 보존 지구로 좁다란 골목길에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가옥과 상점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외국 관광객과 가장 어깨를 많이 부딪치는 곳이다.
일본은 고온다습한 기후적 특성을 고려하여 여름형 주택을 기본으로 하여 짓는다. 창문을 많이 만들고 지붕을 높게 만들어 통풍성에 주안을 두는 구조이다. 또한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탓에 주택을 높게 짓지 않고, 목조건물을 많이 짓게 했다.
한국은 지자체마다 유물과 전통 풍습을 이용하여 축제를 만들고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흉물스럽다고 옛것을 없애고 개발에 주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개발인가 보존인가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지만 현대식 물질주의의 유산을 보기 위해 관광지를 찾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고전을 통해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옛 영혼과 대화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기획하는 분들은 눈여겨 볼 일이다.
794년 간무왕은 수도를 나라에서 교토로 옮기고 평화스러운 세상이 오래 계속되기를 바라며 수도의 이름을 헤이안교(平安京)라 붙였다. 1895년 헤이안 천도 1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한 헤이안진구는 메이지유신 후 쇠퇴해가는 교토의 부흥을 내걸고 세운 궁전이다.
일본은 원래 우리와 마찬가지로 농업 국가이다. 현재 일본 각지에서 열리는 축제인 마쓰리는 본래 벼농사나 지역사회의 안녕에 관련된 종교적인 것으로, 여러 신들을 모시거나 고인의 진혼, 농경의 풍작을 기원하는 성스러운 의식에서 비롯됐다.
711년에 세워진 후시미이나리타이샤는 일본 전국에 4만여 개가 있다는 오이나리상을 모시는 오이나리진자의 총본산이다. 오이나리상이란 벼농사와 음식의 신령으로 일본 전역에서 모시는 무속신이다.
오이나리진자에는 입구에 작고 많은 도리이와 오이나리상을 나타내는 여우상이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겨울인데도 오이나리상의 목에다 벼의 끝부분만 잘라서 걸어놓은 오이나리상이 있어, 공업국가 이미지의 일본과는 다른 이색적인 느낌을 줬다.
알면 알수록 우리와 같은 습속과 문화재 국보들. 한문으로 써진 지명만 보면 여기가 뭐하는 곳인가를 대강 알 수 있는 일본. 생김새만 봐서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일본. 중국과 백제를 거친 기마민족이 그들의 뿌리였다는 걸 부정하려는 모습이 안타깝다. 객관적인 눈으로 상호 이해하려는 노력은 안 될까?
메이지유신 전까지는 양국의 모습이 흡사했으리라는 아니 조선이 문화적으로는 더 나았을 걸로 추측되는데, 일본은 개국을 했고 대원군은 쇄국을 통해 우리민족을 형극의 길로 몰아넣었다. 아! 실학을 주장하고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기를 주장했던 정조와 정약용이 집권했더라면….
덧붙이는 글 | U포터와 남해안신문에도 송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