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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악산 줄기에서 내려다 본 금산사 풍경.
모악산 줄기에서 내려다 본 금산사 풍경. ⓒ 안병기

미륵신앙의 메카 모악산 금산사

지난 8일 찾은 김제 금산사는 모악 혹은 무악이라고도 부르는 엄뫼 아래 있다. 어머니 산의 품 안에 안겨 어린아이와 같이 곤히 잠들어 있다. 그러나 이 금산사라는 어린 아이는 깊이 잠들지 못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꾸느라 잠을 뒤척이는 것이다.

일찍이 백제가 망한 뒤 오갈 데 없던 백제 유민들이 모여든 곳이며 조선 선조 때 반상을 한데 묶어 대동계를 조직하고, 군주 세습에 반대하며 현명한 자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며 난을 일으켰던 정여립의 평등사상이 싹튼 곳이 바로 이곳 모악산과 금산사이다. 또 조선말에는 강증산이 미륵신앙에 기원을 둔 증산교를 창시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산실이다. 현세는 고달프지만, 언젠가는 미륵이 내려와서 이 고통스러운 땅 위에 용화세상을 이루리라는 미륵신앙은 그 옛날, 이 땅의 민중에게 유일무이한 희망이었다.

오랜만에 금산사를 찾아간다. 금평저수지가엔 강태공들이 길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삶이 팍팍할 때는 송사리 한 마리 잡는 것도 큰 위안이 되는 법이다. 예전 전주 살 적엔 틈만 나면 이곳에 놀러 왔다. 그리고 매운탕에 막걸리를 잔을 비웠다. 그때 내게 막걸리는 일종의 미륵이었던 셈이다. 희망이 너무 멀면 환각이 역할을 자리하고 나서는 수가 있다. 막걸리 몇 잔이면 미륵이 다가오는 환각을 느꼈다.

올려다보는 모악산 줄기에 아직 녹지 않은 잔설이 하얗게 쌓였다. 그 때문인지 오늘따라 모악산이 한층 더 신령스럽게 다가온다. 매표소를 통과해서 몇 걸음 걸어가자 속칭 견훤성문이 기다리고 있다. 홍예문은 수리 중이다. 이리저리 비계를 걸쳐 놓았다.

금강문·천왕문을 거푸 지난 다음 2층 누각인 보제루 계단을 밟고 절 마당으로 올라서자, 대적광전과 방등계단, 미륵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미륵에 대한 비원을 승화시키다... 우아한 목조건물과 석조물들

 보물827호 대장전과 828호 석등.
보물827호 대장전과 828호 석등. ⓒ 안병기

백제 법왕(800년) 때 창건된 금산사는 신라 혜공왕 2년(776)에 진표율사가 중창하면서 큰 사찰로 발돋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절은 하루에 구경하기에 버거울 만큼 크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들여다봐야 할까?' 올 때마다 망설이게 된다. 보제루 왼쪽으로 돌기로 동선을 정한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범종각 옆에 있는 대장전이다.

이 건물은 원래 미륵전 뜰 가운데 세운 목조탑으로 불경을 보관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지붕 용마루 한가운데에 남아 있는 복발만이 예전 목탑의 흔적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는 불경은 보관하지 않은 채 석가모니와 그의 제자인 가섭, 아난을 모시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앉아 있는 수미단에 새겨진 꽃 등 여러 가지 장식문양이 무척 아름답다.

대장전 앞뜰에는 8각 석등 한 기가 서 있다. 꼭대기 머리장식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석등이다. 단순하지만 단정한 아름다움이 엿보이는 석등이다.

 보물 제 22호 노주석.
보물 제 22호 노주석. ⓒ 안병기
석등에서 조금 떨어진 노주석으로 다가간다. 이 노주석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유물이다.

꼭대기에는 석탑의 머리 장식이 남아 있다. 이 유물의 이름을 노주라고 부르는 건 탑 꼭대기에 있는 찰주를 노반지주라 부르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꼭대기에 얹힌 꽃봉오리 모양의 조각만 없다면 불상이 앉는 사각형의 대좌로 볼 수도 있는 형태이다. 

그러나 금산사에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노주'는 잘못된 명칭이라고 한다. 원래 이름은 '광명대'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보는 형태는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이 없어진 상태인 셈이다. 도대체 어느 말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받침돌에 새겨진 조각의 양식이나 각 부분의 수법으로 보면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게 아닌가 추정된다.

명부전, 조사전, 나한전을 둘러보고 나서 대적광전으로 향한다. 원래 금산사 대적광전은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27호로 지정되었던 건물이다. 그러나 지금 보는 건물은 그 이듬해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하는 바람에 다시 지은 것이다. 비교적 잘 '복원'한 건물이지만, 문화재의 지위는 상실하고만 비운의 건물이다.

 보물 제27호 육각다층탑.
보물 제27호 육각다층탑. ⓒ 안병기
대적광전 오른쪽 마당엔 육각다층석탑이 서 있다. 금산사 소속의 봉천원에 있던 것을 현재 자리인 대적광전 앞의 왼쪽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탑이 대부분 밝은 회색의 화강암으로 만든 정사각형의 탑인데 비해 이 탑은 특이하게도 흑백의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다층석탑이다.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쓰이는 점판암을 사용하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화강암으로 보충한 것이다.

낙수면에서 아주 느린 경사를 보이다 각 귀퉁이에서 우아하게 들린 지붕돌이 매우 우아하다.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 조각이 아름다운 탑이다.

육각다층탑 옆에는 커다란 석련대가 놓여 있다. 석련대란 석조연화대좌의 준말로 불상을 올려놓는 돌로 만든 받침대이다. 형태가 희귀하고 크기도 매우 거대하다.

 보물 제23호 석련대. 원래 미륵전내 미륵장륙상대좌로 추측하고 있다.
보물 제23호 석련대. 원래 미륵전내 미륵장륙상대좌로 추측하고 있다. ⓒ 안병기

석련대 상대는 윗면이 평평하다. 중앙에는 불상의 양발을 세워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난 구멍이 두 개 있다. 상대 아래엔 윗면을 떠받치는 연꽃이 에워싸고 있는데 꽃잎 사이에도 작은 잎들이 틈틈이 새겨져 있는 등 화려하기 짝이 없다.

하대 전면에는 엎어놓은 연꽃 모양이 출렁이는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석련대 위에 앉아 계시던 부처님은 얼마나 장엄한 크기일까.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금산사의 상징적 건물 미륵전

 국보 제6호 미륵전과 방등계단(좌측).
국보 제6호 미륵전과 방등계단(좌측). ⓒ 안병기

금산사의 상징적 건물이랄 수 있는 미륵전으로 간다.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미륵전 외벽에 그려진 보살상과 비천상.
미륵전 외벽에 그려진 보살상과 비천상. ⓒ 안병기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산호전·장륙전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3층 목조 건물이다.

1층에는 '대자보전', 2층에는 '용화지회', 3층에는 '미륵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밖에서 바라보면 3층 건물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라는 걸 알게 된다.

제일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규모가 웅대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미륵전에는 많은 벽화가 있다. 외벽에는 범·제석천과 천중사천왕을 비롯해 보살, 동녀, 비천상, 금강역사, 나한도 등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아름다운 벽화 아랫부분에는 관람객들의 거친 손이 할퀴고 간 무수한 생채기가 그려져 있어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미륵전 높은 언덕에 방등계단을 조성한 뜻

 송대에 우뚝선 보물 제25호 5층석탑.
송대에 우뚝선 보물 제25호 5층석탑. ⓒ 안병기

미륵전 뒤론 난 계단을 통해 송대로 올라간다. 송대에는 오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5층석탑의 형태는 매우 소박하고 단순하다. 상·하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몸돌을 올려 놓았다. 몸돌은 줄어드는 비율이 제법 부드럽고, 각 층의 몸돌에 새겨진 기둥조각이 넓은 편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머리 장식은 온전히 유지되어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적멸보궁 창으로 바라본 보물 제26호 석종형부도.
적멸보궁 창으로 바라본 보물 제26호 석종형부도. ⓒ 안병기
5층석탑 뒤에는 석종형 부도가 있는 방등계단이 자리 잡고 있다.

기단에 조각을 둔 점과 돌난간을 두르고 사천왕상을 배치한 점 등으로 미루어 불사리를 모신 사리계단으로 해석되고 있다.

적멸보궁 창을 통해 바라보는 석종형 부도의 모습은 색다른 맛이 있다. 탁 트인 공간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더 가슴에 와 앵기는 듯하다.

방등계단은 수계법회를 거행할 때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장소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방등계단을 도솔천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과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 신앙을 표현했다는 말이다.

미륵을 믿는 민중은 좌절하지 않는다

송대를 내려와 다시 금산사 너른 마당에 선다. 그 옛날 고난의 시대 민중은 왜 미륵에게 희망을 걸고 자신을 의탁했을까. 미륵이 다시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56억7천만 년이라는 까마득한 세월이다. 희망이 가까이 있으면 좌절하기 쉽다. 멀리 있는 희망은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좌절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미륵을 신앙하는 민중은 쉽사리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민중은 더 이상 미륵을 신앙하지 않는다. 쉽고 가까이 있는 것을 추구하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멀고 쾌락은 가깝기 때문이다. 날이 저문다. 이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다. 

歷史가 책을 뒤척이는
靜(정)과 적용의 터
木佛 높이만큼 願숲도 恨도 슬렸거라.
풍경도 유난히 떨리는 밤
귀신도 사람도 같이 산다.

山이 큰가 바위가 큰가 물었더니라
山도 바위도 말고 마음이 커야느니라
법어(法語)도 禪問(선문)의 그윽함도 軟茶(연다)빛 저녁에 숨는가

- 유강희 시 '금산사' 전문

아쉽게도 "법어도 선문의 그윽함도 연다빛 저녁에 숨는" 그런 저녁을 보지 못한 채 떠난다. 그렇지만 오늘 하루는 이곳 금산사 도솔천에서 조금이나마 세속의 먼지를 털고 가니, 그 얼마나 발걸음이 가벼운가.


#김제 #모악산 #금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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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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