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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갇혀있는가
▲ 동물원 누가갇혀있는가
ⓒ 이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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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만의 외출

지난 일요일, 서울대공원에 갔다. 근 10년 만에 가보는 서울대공원. 태어나서 실제 코끼리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산청출신의 친구와 동물원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왔던 동생이 나와 동행해주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들을 따라 동물원을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당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동물원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마치 어린아이 마냥 조금씩 흥분하고 있었다. 미디어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사자며, 호랑이, 코끼리 등을 오랜만에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지 않는가.

그것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졸라 동물원에 가고 싶어 했던 나의 모습이었으며, 지하철에서 내려 동물원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많은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동물원. 아마도 바로 이것이 사회에서 통속적으로 통하는 동물원이 갖는 존재의 이유일 것이다.

한껏 부푼 기대로 시작한 동물원 한바퀴. 그러나 동심의 동물원과 30대의 동물원은 판이하게 달랐다. 마냥 신기한 동물들이 살고 있는 동심들의 동물원과 달리, 서른을 넘긴 이들에게 그곳은 조용한 산책이 가능한 공간이었으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올만한 나들이 공간 등으로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어린 눈으로 마냥 신기하기만 했던 동물들은 이제 대개 아프고 신경질적으로 보였으며, 오히려 나의 시선은 그 동물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에게로 갔다. 동물원은 동물들을 구경하는 곳이라기보다, 그 갇힌 동물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욕망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근대의 동물원


30대에게 동물원은 동물원 그 이상의 장소이다.
▲ 한가로운 동물원 거닐기 30대에게 동물원은 동물원 그 이상의 장소이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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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이 생긴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기원전 이집트 시대에도 왕이 다른 지역의 동물들을 가둬놓고 구경했다고 하니 신기한 동물들을 보고 싶어 했던 인간들의 욕구는 오랜 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기능상 근대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동물원 역시 근대를 기점으로 그 성격을 달리한다. 다른 지역의 동물들을 옮겨다 놓아 신기한 구경꺼리를 만든다는 취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지만, 근대 이후 그곳은 단순히 동물이 전시된 공간을 뛰어넘어 근대 이성의 힘을 증명해주는 공간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근대 동물원의 등장은 도시라는 공간의 탄생과 관계가 깊다. 근대화는 도시화를 수반했고, 사람들은 그 도시 속에서 몇몇 애완동물들을 제외하고는 동물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격리를 의미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장치를 마련하는데 동물원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동물원은 시선을 탐구할 수 있는 공간이다.
▲ 시선 동물원은 시선을 탐구할 수 있는 공간이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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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동물원은 단순히 동물을 모아 놓은 곳이 아니다. 그곳은 자연과 인공이 만나는 지점인 동시에 인간이 동물을 포함한 자연을 제어할 수 있음을 선언하는 곳이다. 우리는 동물원에서 자연의 일부인 동물을 보지만, 실상 우리가 보는 것은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동물들을 한 군데로 모을 수 있다는 인간 이성에 대한 끊임없는 확신이며, 자연과의 격리를 그냥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타 지역 동물의 포획 후 전시. 결국 이는 근대 박물관의 시초였던 제국주의적 감성과 맞닿아 있다. 식민지의 문화재를 약탈해 전시한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식민지의 동물들을 포획하여 본국에 전시함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으며, 그 동물들을 대상화함으로써 동물과 다른 인간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동물원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근대의 중요한 기제인 것이다.

서울대공원의 동물들

동물원에서 처음 맞닥뜨린 동물들은 기린, 영양, 타조, 코뿔소, 코끼리, 사자 등 아프리카 출신의 동물들이었다. ‘동물의 왕국’에서나 볼 수 있는 녀석들.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 없는 동물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 동물원이라고 할 때, 아프리카 동물만큼 그 정의에 충실한 동물들이 없기에 동물원 측은 그것들을 동물원 전면에 배치해 놓았을 것이다.

주체 측의 기대대로 사람들은 아프리카 동물의 우리 앞에서 기린의 우아한 걸음걸이, 코끼리의 경쾌한 코놀림, 사자의 근엄한 위용 등에 넋을 놓고 있었고, 그 모두가 실제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기적에 마냥 신기해하고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 동물들은 그들이 상상해왔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까?

뜨겁고 광활한 아프리카 초원에서 활보하는 대신 추운 한반도 한 구석에 갇혀 사육사가 주는 먹이에 길들여지고 있는 동물들. 피로 전해져 내려오는 야성을 점차 잃어버린 채 좁은 공간에서 하루를 영위하고 있는 그것들을 보고 있다니 착잡했다.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둑고양이만큼의 야성도 가질 수 없는 야생 동물들의 입장이라니.

옛말에 동물을 두고 불쌍해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동물이 아니라 나이를 먹어가며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나에 대한 값싼 동정심인지도 모른다.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를 추구하는 날것이 부족한 사회. 하나같이 재테크에 올인하고 ‘부자 되세요’가 인사가 되며, 아파트 평수와 차 배기량의 크기가 그 사람의 인덕이 되는 이 사회는 현재 야성을 길들이는 동물원의 우리와 다름 아니다. 

갇힌 공간에서는 무언가 한가지를 꼭 붙들고 있어야 한다.
▲ 편집증 갇힌 공간에서는 무언가 한가지를 꼭 붙들고 있어야 한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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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와 식탐의 만남
▲ 절박함 유희와 식탐의 만남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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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동물 우리를 벗어나 많은 이들이 모여 있던 곳은 유인원과 원숭이 우리였다. 인간과 비슷하게 생겨 약간의 지능을 갖고 자신들의 의사표현을 더 강하게 하는 녀석들. 사람들은 그것들이 인간을 닮아서 더 좋아하는 듯 했지만, 나의 시선은 오히려 더 싸늘했다. 단순히 생김새만 닮은 것이 아니라면 녀석들도 분명 갇혀서 길들여져야 하는 일상이 괴로울 터, 그들이 보이는 신경질적이고 편집증적인 증상은 결국 인간 욕망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유인원과 원숭이들을 보고 있자니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풍미했다는 인종전시가 떠올랐다. 현재 우리는 인간을 매우 합리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만, 단지 말이 통하지 않고 생활습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인종을 우리 안에 가둔 것이 지금으로부터 겨우 100년 전의 일이다. 비록 지금은 인권을 이야기하고 다양성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국한된 일일뿐, 인간의 합리성은 ‘우리’라는 편견에 근거한 것이다.

사람들은 원숭이에게 주지 말라는 음식물을 주고 있었고 원숭이는 아주 간절하게 팔을 뻗어 그 먹이를 취하고자 했다.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과 식탐을 부리는 원숭이의 모습이었지만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우리의 철창이 그 장면을 슬프게 만들었다. 철장을 붙잡고 있는 원숭이들의 손을 보고 있자니 마냥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고독한 고릴라
▲ 자유 고독한 고릴라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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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몸짓 하나, 손짓 하나에 반응을 보이는 원숭이들과 달리 오랑우탄이나 고릴라는 바깥 세계에 대해 무관심해 보였다. 오히려 이와 같은 상황을 조소하듯 그것들은 묵묵히 자신만의 공간을 지켰으며 슬픈 눈을 들어 바깥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역시 자유일까. 모든 생명체들의 생존 조건은 자유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그들을 통해 나의 욕망이 투영 되었으리라.

원숭이, 유인원 관을 나와 파충류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으로 갔다. 그곳 역시 예전처럼 많은 이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왜 사람들은 무섭고 끔찍하다면서 계속 뱀 등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혹자들의 말처럼 뱀이 상징하는 성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은 무엇보다 통제된 공포의 매력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비명을 지르면서도 굳이 심야 공포영화를 고집하듯이 통제된 공포는 사람들에게 자극적이고 위험한 만큼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통제된 공포의 매력
▲ 통제된 공포 통제된 공포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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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파충류관을 나오자 슬슬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고 조금씩 지루한 데다 시간에 쫓기기까지 했다. 결국 언제나 그랬듯이 서울대공원의 동물들을 모두 본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 되었고,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보느냐. 우리는 궁리 끝에 동물원 끝자락의 사슴류와 물소류, 그리고 남아메리카 동물을 포기했다.

돌이켜 보건대 서울대공원에 오면 언제나 남아메리카 동물들은 후일만을 기약했을 뿐 제대로 구경한 적이 없다. 물론 그곳이 동물원 끝에 자리하여 보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보다는 궁극적으로 남미에서 생존하고 있는 생명체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동물원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남미관을 동물원의 가장 구석에 배치하였는지도 모른다. 결국 현실세계의 권력관계가 동물원의 배치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배고파도 풀을 뜯지 않는 호랑이
▲ 호랑이의 위용 배고파도 풀을 뜯지 않는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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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발걸음으로 마주친 동물은 아프리카를 제외한 지역의 맹수들이었다. 두 다리를 벌리고 퍼질러 앉아 사람들이 던지는 먹이를 받아먹는 미련 곰탱이들과 배고파도 풀은 절대 뜯지 않겠다는 듯이 꼿꼿이 앉아 그 위용을 자랑하는 호랑이, 예리하고 매서운 눈매를 간직한 채 야성을 잃지 않겠다는 듯이 서성대는 늑대와 이리 등. 역시나 사람들에게는 초식동물 보다는 육식동물이 인기인 듯 그곳 맹수 우리는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조류들을 모아놓은 공간이었다. 그곳은 여러 종류의 새들을 한꺼번에 풀어 놓은 촘촘한 그물로 만들어진 커다란 새장이었다. 아마도 대상이 날짐승이라 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날 수 있지만 허락된 공간만 움직일 수 있는 제한된 자유.

그들의 동거
▲ 공작과 닭 그들의 동거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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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관에는 공작과 닭, 오리들이 함께 거닐고 있었다. 그 우아하기로 유명한 백공작이 흔히 볼 수 있는 닭들과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이란. 그러나 그들의 동거에 어색해 하는 존재는 정작 새들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공작과 닭에 관한 편견을 가지고 자기들 멋대로 그것들의 삶을 구획하는 사람들. 조류관을 나서니 홀로 철창 속에 갇힌 독수리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서울대공원을 나서는데 그 늦은 시각에 일군의 무리들이 우리 쪽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조용해진 동물원과 달리, 서울랜드가 휘황찬란하게 번쩍거리며 사람들을 홀리고 있었다. 묘한 대조였다. 유희를 위한 공원의 두 방향으로의 진화.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휘황찬란하게 사람들을 홀리는 그곳
▲ 서울랜드 휘황찬란하게 사람들을 홀리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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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서울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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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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