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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례문 화재 이후,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과연 그 열기만큼 우리는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하는 걱정도 든다.
숭례문 화재 이후,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과연 그 열기만큼 우리는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하는 걱정도 든다. ⓒ 곽진성

숭례문 화재 이후,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여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가히 신드롬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우리 문화재에 대해 보도가 중요한 뉴스로 나가고, 또 사람들 사이에서는 문화재 이야기가 화제거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이런 관심들은 덧없이 반갑지만 문득 걱정이 든다. 지금의 그 뜨거운 열기만큼 우리는 우리 문화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라는 걱정 말이다.

하지만 그 물음 앞에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해 나 자신부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사실 난 숭례문 화재가 일어나기 전까지, 국보2호, 보물 1호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역사에 관심 많다고 공공연히 떠든 내가 정작 국보 2호, 3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문화재에 무지한 사람이 비단 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한 번은 문화재에 관심 많은 꽤 똑똑한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야, 너 혹시 국보 2호가 뭔지 알아?"
"아니 몰라,"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친구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모른다고 해 나를 적잖이 놀래켰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말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국보2호, 보물1호 같은 우리 문화재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른다고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닌것 같았다. 그런 무지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서일까? 내 마음 속에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미안함이 자리잡았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결심을 했다. 인터넷으로 국보 2호의 위치를 확인하고 한 번 시간을 내 직접 찾아가 보기로 말이다.

'국보 2호를 한 번 검색해 볼까?'라고 생각하고, 인터넷으로 국보2호의 이름과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국보2호를 찾자, 꽤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디 깊숙한 산골이나, 아니면 어느 절터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 국보 2호가 서울 도심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서울 근교에 있는 국보 2호라니,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바로 서울로 출발했다. 국보 2호를 찾아 갑작스런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국보 2호를 찾아 떠난 여행

밸런타인 데이였던 지난 14일 이른 아침, 내 발걸음은 종각역 근처에 있는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겨울날씨는 무척이나 쌀쌀했다. 또 거리는 밸런타인 데이라는 특별한 날의 기운이 물씬 풍겨났지만 개의치않고 발걸음을 총총 옮겼다. 도착한 곳은 서울 도심에 위치한 탑골공원이었다. 탑골공원은 3·1운동의 발상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국보 2호인 원각사지십층석탑, 탑골공원에서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보 2호인 원각사지십층석탑, 탑골공원에서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곽진성

그런데 혹자는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국보2호를 찾아간다면서 왜 3·1운동 발상지로 알려진 탑골공원에 갔냐고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너무도 당연한 이유가 있다. 바로 탑골공원 안에 국보 2호가 있기 때문이다.

탑골 공원안에 있는 국보 2호의 이름은 바로 원각사지십층석탑이다. 1467년(세조13년)에 만들어진 5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현장에 도착해서 보니 층층이 아름다운 조각으로 이루어진 십층 석탑은 장엄한 모습으로 공원에 우뚝 서 있었다.

하지만 원각사지십층석탑의 주위에는 시선을 방해하는 유리막이 쳐져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석탑을 보기 흉하게 만들었다. 궁금했다. 왜 국보 2호는 유리막 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을까?

 국보2호 원각사지십층석탑 안내 표지판, 국보 1호 숭례문 화재와 비극이 부디 국보 2호에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국보2호 원각사지십층석탑 안내 표지판, 국보 1호 숭례문 화재와 비극이 부디 국보 2호에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 곽진성


이유를 알아보니 원각사지십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기에 산성비나, 새똥 등에 의해 부식될 우려가 있다고 한다. 그런 우려 때문에 유리막이 쳐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런 보호조치가 차라리 잘 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국보 1호 숭례문처럼 갑작스런 방화에 의해 손실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었다.

다행히 느릿느릿, 그리고 느긋하게 원각사지십층석탑 주변을 돌며 감상을 하니 그 씁쓸한 마음이 조금은 풀린 것 같다. 아름다운 예술작품 앞에서는 우울했던 사람의 기분이 괜히 좋아지는 모양이다.

원각사지십층석탑에 새겨진 아름다운 표현 장식에 마음이 가볍게 들뜬다. 눈앞의 장식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롭기만 하다. 어떻게 저 단단한 돌에 부드럽게 조각을 할 수 있는지 감탄사가 절로 난다. 대리석에 새긴 예술 '혼'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전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성종 2년(1471년)에 건립된 보물 3호 대원각사비
조선 성종 2년(1471년)에 건립된 보물 3호 대원각사비 ⓒ 곽진성

비단 원각사지십층석탑 뿐만이 아니었다. 조선 성종 2년(1471년)에 건립된 보물 3호 대원각사비 역시 보는 이를 가슴 뭉클하게 한다.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머금고 탑골공원 한쪽에 우뚝 서 있는 그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위풍당당해 보인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비 맨 아래쪽 거북이 조각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이채롭다. 비에 적혀있는 글 또한 흥미로웠다 이 대원각사비 비의 이름은 당대의 유명한 명신 강희맹이 짓고, 또 비문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명신들이 적어냈다고 한다. 비석에 생명을 불어넣은 글씨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다.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이 조선 목조 예술의 최고봉이었다면 국보 2호인 원각사지십층석탑과 보물 3호인 대원각사비는 돌로 만든 예술 중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조선의 예술은 이렇게 돌로 빚은 예술과 나무로 빚은 예술로 이루어졌던 모양이다.

 보물 3호, 대원각사비 아래를 떠받친 거북이 조각,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었다.
보물 3호, 대원각사비 아래를 떠받친 거북이 조각,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었다. ⓒ 곽진성

문득 옛날 이야기가 하나 떠오른다. 철없던 어린 시절, 난 우리문화재를 조금 부끄러웠던 했던 적이 있다. 서양에는 온갖 휘황찬란한 유적, 조각상이 있는데 그에 비해 우리 문화재는 괜히 투박해보이고 볼품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지인인 한 교수님이 뼈 깊은 말씀을 전해주셨다. 그 이후로 나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자부심을 갖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교수님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어떻게 보면 우리 문화유산이 작고 보잘 것 없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 문화유산이 예술을 만들 수 없는 투박한 환경에서 빚어낸 것임을 안다면 그 시선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수없이 침략에 시달리고, 마땅한 예술 재료를 구하기 힘든 척박한 땅에서… 그럼에도 그 딱딱한 돌에 혼을 새기고, 나무에 예술을 새긴 조상들의 문화유산은 그 자체만으로 소중한 것이니까요." 

국보 2호 원각사지십층석탑과 보물 3호 대원각사비를 둘러보며 그 교수님의 말이 떠오른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어쩌면 교수님이 전해주신 말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 척박한 땅에서, 수많은 침략에 시달리면서도, 돌에 아로새긴 예술 '혼'. 분명 그것은 그 자체로  다른 예술품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국보 2호를 보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우리 문화유산을 소홀히 다뤘다는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덜어졌다. 대신 미안함이 덜어진 자리에는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과 감동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원각사지십층석탑#대원각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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