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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2006년 방송에서 나를 취재했다. 당시의 방송 모습.
방송.2006년 방송에서 나를 취재했다. 당시의 방송 모습. ⓒ 강기희

가방을 잃어버렸습니다. 10년 정도 함께 다녔습니다. 세월이 깊었던 탓인가요. 천으로 만들어진 가방은 낡을 대로 낡아 버렸지요. 어깨에 감기던 끈은 곧 끊어질 듯하여 얼마 전엔 바늘로 꿰매기까지 했습니다. 세월을 견디지 못한 귀퉁이는 헤어져 내용물이 보일 정도였습니다. 

 

10년 세월을 함께한 낡은 가방을 잃어버렸다

 

사람으로 치면 팔순은 된 가방입니다. 가방만큼 내 삶을 잘 아는 물건도 없습니다. 긴 세월을 함께한 가방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것이 제법 됩니다. 신분증이 든 지갑을 다섯 번 정도 잃었고, 선글라스는 세 번 잃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물건을 잃어버릴 때마다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와 인연이 없어서일까요. 

 

나는 그 가방을 메고 서울도 가고 남해의 금산도 올랐고, 대추리도 가고, 썩은 물 흘려보내는 도암댐에도 가고, 부산도 가고, 보성도 가고, 거창도 가고, 곡성도 가고, 지리산도 가고, 고창도 가고, 설악산도 가고, 춘천도 갔으며, 북쪽 땅인 금강산까지 갔습니다.

 

지난 10년 세월 안 다닌 곳이 없는 가방입니다. 가방은 나와 함께 동해 끝인 독도에도 갔으며, 대한민국의 최남단인 마라도의 알싸한 공기를 맛보기도 했고, 백령도에서 인당수를 바라보며 심청의 전설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가방은 주인 잘 만나 맛난 음식점에도 가고 멋진 풍경도 보았습니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도 다 지켜본 가방입니다. 주인이 세상을 향해 분노할 때 함께 분노했던 가방입니다. 어쩌다 노숙을 할 때면 베개 역할을 하기도 했던 가방입니다. 그런 가방을 잃어버렸습니다.

 

가방엔 사용한 지 6년된 디지털카메라 하나와 취재수첩, 그동안 만났던 인연들의 연락처가 적힌 수첩, 술 취한 얼굴을 가려주는 선글라스, 휴대폰배터리, 볼펜, 7년 된 가죽장갑, 현금 1만원 정도가 들어 있었습니다. 늘 가방 안에 있던 것들입니다. 소중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시도 아닌 시골에서 가방을 잃어버린 것은 의외입니다. 지금까지 가방을 잃어버린 적이 없어 더욱 난감하고 당황스럽습니다. 팔 한쪽이 달아난 기분입니다. 아니 가슴 한 곳이 도려진 느낌입니다.

 

지난주 토요일(17일)부터 GTB 강원민방에서 나를 취재했습니다. 강원민방과의 인연은 두 번째입니다. 2006년엔 장편소설 <개 같은 인생들>을 출간했을 때 정선까지 왔었고, 이번엔 <사람사는 세상>이란 휴먼 다큐 프로그램에서 취재를 왔습니다.

 

전혀 휴먼스럽지 않은 사람을 취재한다고 연락이 왔을 때 많이 망설였습니다. 지난해 가을에도 그런 전화를 받았는데, 그땐 정중하게 거부했었거든요. 그 이유라는 것이 취재 기간이 길다는 거였습니다.

 

두어 시간 정도면 그나마 이해를 할까 싶었지만, 며칠 동안 괴롭히겠다는 말에 기겁을 했던 겁니다. 물론 이번에도 2박3일이나 취재를 했습니다. 아니 취재 당했습니다. 방송 카메라는 그 기간 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다녔습니다.  

 

인터뷰. 펴낸 소설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인터뷰.펴낸 소설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강기희

 

지난 일요일(17일)엔 방송팀과 정선의 단임골로 취재를 갔습니다. 귀순용사인 리영광씨 부부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방송은 나를 취재하고 나는 리영광씨 부부를 취재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취재가 끝난 다음 날엔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리는 것까지 촬영해야 하는데 그만 밤 시간 가방을 잃어버린 겁니다. 

 

가방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어제 오후에 알았습니다. 늘 가까이에 있으니 집 어디엔가 있으라 생각했었지만 가방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작성하다 방송 피디와 나는 '가방?'하며 눈을 번득였지요. 전날 밤 촬영을 했던 집에 전화하니 가방이 없다고 합니다. 택시 기사에게 물어도 가방은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물론 집에도 없습니다.

 

가방 때문에 촬영 펑크날 뻔했다

 

순간 방송 피디와 나는 난감하다 못해 기가 막혔습니다. 취재한 모습을 꺼내 기사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카메라가 사라진 것입니다. 방송 피디와 골을 싸매고 생각해도 가방이 사라질 이유가 없지만, 가방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럴 수가요. 하늘로 솟지 않고, 땅으로 꺼지지 않았다면 어디엔가 있어야 할 가방입니다.

 

가방과 인연이 다 된 모양입니다. 주인이 모질어 스스로 떠난 건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듭니다. 주인과 함께 했던 시간을 잊고자 돌아오지 않나 봅니다. 오늘 하루를 멍한 상태로 보냈습니다. 소중했던 것과의 이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입니다.

 

가방에게 글이라도 가르쳐 줄 걸 그랬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말이라도 가르쳐서 집을 찾아오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가방에게 무거운 일만 시켰지 글도, 말도 함께 나누지 않았습니다. 이런 주인을 10년간 함께 했으니 야속하다 하겠지요. 그래서 돌아오지 않나 봅니다.

 

가방아, 미안하다

 

어쩌면 술 정신으로 비틀거리는 주인과는 살 수 없다면 떠난 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방을 잃어버리는 날도 술을 마셨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가방을 잃어버릴 일은 아니었습니다. 술집이 아닌 가정집에서 술을 마셨고, 영업용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것밖에 없었으니까요.

 

이 사실을 안 사람들 모두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 가방이 사라질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틀이 지났지만 가방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스스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가방에겐 이 순간이 고난의 시간입니다. 쓰레기처럼 어느 장소에 버려져서는 추위에 떨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불태워져서 재만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몸서리가 쳐집니다.

 

오늘 밤이 지나도 가방이 돌아오지 않으면 가방과의 이별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주인의 허술함이 긴 이별을 만들었습니다. 소중한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주인의 잘못입니다. 가방과 쌓아왔던 정을 떼기가 참으로 힘들지만 이젠 가방을 보내야 할 듯싶습니다.

 

10년 세월을 함께 한 가방아, 미안하다. 지난 세월 너와 함께 했던 시절을 우리의 역사로 남겨두마. 

 

방송중. 방송에 나온 제 모습입니다. 이때만 해도 봐줄만 했습니다.
방송중.방송에 나온 제 모습입니다. 이때만 해도 봐줄만 했습니다. ⓒ 강기희

#가방#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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