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당황하게 만든 아이 엄마 요즘도 사우나에 가면 이곳저곳에 고개를 돌려 아이를 찾는 습관이 있다. 달포 전쯤이다. 목욕탕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남탕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내가 남탕 쪽으로 가자 한쪽 옆으로 비켜섰다. ‘남탕에서 나오는 사람을 기다리겠지’ 라고 생각하고 남탕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데 그 아주머니는 손잡고 있던 아이를 내 뒤에 바짝 붙여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이 아저씨가 하시는 대로 따라 해’라고 아이에게 말하고는 여탕 쪽으로 가버렸다. 차라리 ‘이 녀석 좀 챙겨 주세요’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테데 말이다. 조금은 황당했지만 그 아이에게 신발장에 신발을 넣게 하고 옷장도 낮은 쪽 문을 열어주었다. 함께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그 아이는 내 늦둥이(?) 또는 조카쯤으로 생각했을 게다. 거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욕실에 들어가서는 이 녀석이 달라졌다. 탕에 들어가자고 해도 싫다, 씻으러 가자고 해도 묵묵부답, 잔뜩 경계심만 갖고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정하다시피 해 비누 묻힌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었지만 더 이상은 할 수 없었다. 나는 약속 때문에 오래 탕에 머무를 수 없어 아이를 다른 아이들이 놀고 있는 온탕에 데려다 주었다. “아저씨는 먼저 갈 테니 조금 있다 나와”라고 하자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제대로 씻어 주지 못하고 그 아이를 놔두고 나오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아이에게서 아버지 없이 컸던 어렸을 적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더 그랬다. 아빠 있는 친구들이 가장 부러울 때는… 겨울 이맘때쯤 내가 초등학생 때와 중학생일 때다. ‘아빠가 계시면 좋겠다. 우리 아빠는 내게 더 잘 해주실 텐데’라고 생각하며 부러운 것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는 아빠가 방패연을 잘 만들어 준 아랫집 친구였다. 그 친구는 하얀 문종이로 만든 연에 예쁘게 수술을 단 방패연을 마을에서 가장 높이 멀리 날리는 친구였다. 친구 아버지는 친구에게 매년 연을 만들어 주었고 바람이 없는 날은 연을 잡고 있다가 친구가 달리면 연을 위로 밀어 올려주는 자상한 아빠였다. 나는 문종이와 시누대를 구하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시누대를 여러 개 얇게 잘라서 만드는 방패연은 만들 수 없었다. 나는 시누대 대신 대나무를 얇게 잘라 신문으로 일명 홍어연을 만들어 날렸다. 그래서 항상 그 친구가 부러웠다. 한번은 친구 아빠가 방패연을 두개 만들어 하나를 내게 주셨다. 아마도 지금까지 받은 선물 가운데 제일 좋았고 신났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때 처음으로 나일론실을 어머니가 오일장에서 사오셨다. 타래로 된 실에 양손을 넣어 벌리면 어머니는 얼레 대신 대나무통에 실을 감아 주셨다. 연을 날리고 난 뒤에는 작은 방에 보물처럼 보관했다. 세시풍속에 연은 보름이 지나면 태우거나 날려 보내야 하 데 나는 그 연을 겨울이 한참 지나서야 태웠다.
시골에서 중학교 때 광주로 전학오면서 또 다른 부러운 것이 하나 생겼다. 대중목욕탕에서 아들 등을 밀어주는 아빠였다. 시골에서 목욕탕은 부엌이고 욕조는 고무통(그릇)이었다. 특히 겨울이면 부엌이 추운데다 때가 쉽게 밀어지지 않아 통 속에 앉아 있어야 한다. 얼마간은 그런 대로 있을만한데 본격적으로 때를 밀려고 하면 물이 다 식어 춥기 시작한다. 몇 번을 재채기 하고 나서야 목욕이 끝난다. 그래서 자주하는 목욕은 아니지만 목욕하는 것이 무척 싫었다. 그러던 내게 광주에 이사와 처음 찾은 대중목욕탕은 신기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잠시. 내 또래에 혼자 목욕하러 온 아이는 없었다. 혼자인 나는 끙끙대며 혼자 목욕을 하곤 했다. 요즘은 아들 녀석하고 목욕탕에 가면 등 밀어주는 품앗이를 한다. 그럴 때마다 아들 녀석이 느껴보지 못한 즐거움이 내게 있다. 어렸을 때 나를 잠시 생각하게 만든 그 녀석을 목욕탕에 가 찾아보지만 그 날 이후로 보이지 않는다. 그날만 사정이 있어 혼자 왔는지 아니면 나와 같은 처지였는지 알 수 없지만 한번 만나고 싶다. 만나면 깨끗이 씻어주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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