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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소고개서 바라본 답십리동.
 촬영소고개서 바라본 답십리동.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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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에 파병되기 전이었다. 소위 '답십리' 시절이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답십리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고개 너머에 영화 촬영소가 생기고, 중앙시장이 들어서면서 버스도 몇 군데가 연장해 들어와 교통이 훨씬 좋아지고, 국민학교 뒤에 있는 경미극장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청량리에 성바오로병원이 들어서고, 오스카극장과 시대극장이 서고 굴다리도 확장되어 답십리도 제법 살기 좋은 고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인현은 학교 생활 칠팔 년만에 조그마한 집을 마련했다. 9평 짜리 국민주택이 주로 되어 있는 답십리의 작은 언덕에 있는 방 3개의 주택이었다. 멀리 한양대학이 보이고, 옆으로 장안평야가 훤하게 터 있으며, 은행주택이 앞 언덕에 들어서 제법 마을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모래성의 열쇠> 구인환. 2000.4.1.

답십리동은 서울시 동대문구에 속한 동네다. 1동부터 5동까지 모두 다섯 개 동이다. 조선 초기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려고 이 곳을 밟았다 해서 답심리(踏尋里)라고 불리다가, 동대문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왕십리를 본 따 답십리가 됐다고 한다.

답십리5동은 답십리동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았다고 해서 '원마을', 답십리1동은 원마을에서 산을 넘어 다녔다고 해서 '너머마을'이라고 불렸다. 답십리 3동은 '간데메'라고 불렸다. 답십리 1·3·5동은 지금 답십리뉴타운으로 지정돼 있다.

시인 민영은 '답십리'라는 시를 지어 이 동네를 노래했다.

"땅거미 지면 거나해서 돌아온다 / 양 어깨 축 늘어진 빨래가 되어 / 새벽에 지고 나선 청석(靑石)의 소금 짐은 발끝에 채이는 돌멩이만도 못하구나 / 촬영소 고개 너머 십리(十里)의 불빛 / 중랑천 둑방에는 낄룩새 운다"

동네 식당 앞이 '만남의 광장'... 동네 어르신들 윷놀이 즐겨

답십리 고미술상가
 답십리 고미술상가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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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물거리에 있는 어느 가게 간판.
 황물거리에 있는 어느 가게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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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상가 앞 돌상.
 고미술상가 앞 돌상.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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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십리역에서 2번 출구 쪽으로 나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고미술상가다.

1986년 청계천 일대 가게들과 아현동, 반도 조선 아케이드 골동품 가게들이 모이면서 거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2동(85점포), 5동(25점), 6동(24점) 등 129개 가게로 이뤄져 있다.

고미술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장안평 고미술품상가가 나온다. 답십리 고미술상가와 장안평 고미술품상가를 잇는 길을 '고미술품 거리'라 부른다.

고미술상가 앞엔 각종 석물들이 지나는 이들을 맞이한다. 부처님상과 석등이 많다. 절구통·두꺼비상·돌하루방·돌장승에 악기 연주하는 여인상도 보인다. 왕릉을 지키는 신하상·장군상 등 다양하다.

고미술상가 뒤쪽 길이 '황물거리'다. 철물점 200여곳이 모여 있는 서울 최대 철물점 거리다. 답십리5동은 답십리역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황물거리를 따라 동쪽에서 서쪽까지 걷다 답십리5동 끝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애교 만점 간판이 보인다. 보일러 총판점인데 갖가지 색깔 매직펜으로 쓴 나무광고판을 내걸었다. 주차장 앞 '주차금지'를 강조한 글도 애교스럽다. 오전 6시 문을 연다고 설명을 하고, 혀를 날름 내미는 그림까지 그렸다. 몰래 주차장 앞에 차를 대려다가도 이 그림을 보면 '픽' 하고 웃을 것만 같다.

식당 앞 '만남의 광장'에서 윷놀이에 푹 빠져 있는 어르신들.
 식당 앞 '만남의 광장'에서 윷놀이에 푹 빠져 있는 어르신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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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십리5동 서쪽은 답십리3동, 북쪽은 답십리1동이다. 답십리1동 방향을 따라서 북쪽으로 걷다 보면 답십리5동 사무소가 나온다. 답십리5동 사무소 옆에 조그만 식당이 하나 있다. 동네 사람들은 그 곳을 '만남의 광장'이라 불렀다.

답십리동을 찾은 날, 동네 어르신 몇 분이 식당 앞 만남의 광장에서 윷놀이를 하고 있었다. 술값 내기 윷놀이였다. 분위기는 흥겨웠다. 윷놀이터 옆엔 지글지글 국이 끓고, 소주병이 곱게 놓여 있었다.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도 윷놀이장에 끼이고, 지나가다 재미를 느낀 사람도 끼어들었다. 하다가 지친 이들은 가게 안으로 들어와 막걸리를 시켰다. 몇 시간 동안 윷놀이를 즐긴 이들은 어느새 친한 척을 하며 통성명을 한다.

"나이가 어찌 됩니까? 아이구 형님이네요."
"나이가 어찌 된다구요? 그럼 친구 하입시다."

근처 구멍가게 근처에선 아이들이 조그만 오락기 앞에서 게임에 푹 빠져있다. 그 좁은 자리에 세 명이나 앉았다. 의자가 기울어져 불편할 텐데도 아무 불평 없이 오락을 즐기는 모습이 재미있다. 또 다른 문구점 앞에선 두 아이가 오락을 즐기고, 한 사람이 열심히 구경한다. 때론 하는 것보다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는 법이다.

97세 시어머니 모시고 사는 할머니, 재개발되면 동네 떠나야

여기서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니 대로가 나왔다. 서쪽은 청량리, 동쪽은 '촬영소고개'다. 저 멀리 보이는 고개가 시원하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지만, 답십리 배봉산엔 촬영소가 있었다. 1964년 작품인 <빨간 마후라> 촬영지가 바로 여기였다.

혼자서 물끄러미 촬영소고개를 보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진다. 바로 옆 평상에 할머니 한 분이 손자뻘 되는 아이와 함께 놀고 계셨다. 할머니는 "70대"라고 밝히셨다. 곧 할머니의 잔잔한 삶이 펼쳐졌다.

할머니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3년 뒤면 100세. 동대문구 답십리동에 오기 전까진 서대문구 홍제동에 살았다. 내가 사는 곳이 '홍제동'이라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하신다. 할아버지는 61세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홀로 된 세월이 짧지 않다.

할머니는 "곧 사라질 동네인데, 뭐할라고 사진 찍나"라고 물으신다. "그래서 찍는다"고 말했더니 웃는듯 마는 듯한 모양이다. 할머니는 동네 할머니들 대부분이 의정부로 이사를 갔다고 하신다. 자신도 재개발되면 동네를 떠나야 할 거라고 중얼거린다. 보상을 받아도 어차피 아파트를 얻을 순 없지 않느냐면서.

아기와 할머니.
 아기와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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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앓다가 얼마 전 고개 밑으로 몸을 던진 할머니, 임대아파트를 준다면서 할머니들에게 사기 치는 사람들 이야기가 바람결에 흘러나온다. 이따금 아기가 아랫길 난간에 매달려 할머니 말을 멈추게 만든다. 할머니 손자냐고 물었더니, "시동생의 손자"라고 말씀하신다.

할머니 이야기를 듣다 보니 40분이 훌쩍 지나갔다.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하신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아야 할 분이 오히려 '고맙다'고 하신다. 2005년 동대문구 인구는 38만6280명. 그 중 65세 이상 인구는 3만2189명으로 전체의 8.33%다. 2007년 7월 1일 기준 서울시 총인구는 1036만명이며, 65세 이상 인구는 8.1%다.

동네를 빠져나오다 보니 길 입구에 '답십리 친목회' 간판이 걸려 있다.

35년간 복덕방 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유일한 친구

복덕방 할아버지
 복덕방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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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덕방과 이발소.
 복덕방과 이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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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십리5동에서 답십리1동으로 넘어갔다. 뉴타운으로 지정돼 사라질 동네라 생각하니 마음이 급하다. 이곳저곳 거닐다 사진을 찍는 정래와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귀퉁이를 차지한 조그만 공간에 삐뚤삐뚤 정성스레 이어붙인 간판은 흑백사진이 아니면 좀체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시계추를 거꾸로 돌린 듯한 부동산 가게 모습에 반해 사진을 찍으니 머리가 허연 어르신이 말문을 연다. 올해 나이 87세. 부동산 가게 주인인 강백임씨다. 잠시 뒤 할머니가 나오신다. 이 곳에서 부동산을 한 지 35년째. 동네 역사를 훤히 꿰고 계신다.

40년 전 부동산 앞 길은 개천이었단다. 대략 60년대 말 70년대 초다. 어디 어디 가면 오래된 집이 있다고 방향을 알려주신다. 손가락 방향만 보곤 도무지 알 수 없다.

장사가 잘 되는지 물었다. 대뜸 "안 된다"고 하신다. 요즘은 젊은 사람들한테 가지, 나이든 사람한텐 안 온다고. 화제를 돌렸다.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동네에 또래는 없다.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서로에겐 유일한 벗이다. 손바닥 보듯이 훤한 이 동네선 부동산을 했지만, 재개발로 이사를 하면 그 땐 무엇을 할 지 모를 일이다.

할아버진 대뜸 "좋은 대통령 뽑아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내가 딱히 기여한 게 없지만, 대통령이 자신을 찍어준 분들 마음을 잘 헤아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해가 지고 저녁이 길 가운데까지 내려온 시각, 할아버지는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빼물었다. 떠나면서 인사를 드렸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이신다.

배봉산 길 다리 위에 서면 답십리 한 눈에 보여

답십리1동에서 동쪽으로 가면 답십리2동과 4동이다. 답십리 대우아파트쪽에서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고개가 '촬영소고개'다. 고개 양쪽에 야트막한 산이 솟아있는데, 배봉산이다. 고개 위엔 다리가 놓여 있는데, 전망이 좋다. 답십리와 청량리 일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정래가 "정말 전망 좋다"면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작품 하나 찍겠다면서 30분째 사진기를 붙들고 있다. 제대로 작품 하나 잡으려나.

답십리1동에서 서쪽으로 달리면 답십리3동이다. 옛 이름이 간데메였다. 그 때 이름을 고스란히 살려 동네에 간데메공원을 만들었다. 정래와 둘이서 "간데메? 왜 안 갔대? 온데메?"하면서 말장난을 했다.

1998년 7월 31일 만들었으니 올해로 10년째다. 4500여 평 정도 되는 공원 자리는 예전에 전매청 창고부지였다.

장미꽃길·연못·배드민턴장·팔각정·소나무동산은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공원 모습이다. 추운 밤인데도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니 '밥퍼'라는 글씨가 나온다. 다일공동체 최일도 목사가 노숙인들을 위해 밥을 퍼주는 곳이다. 20여년 동안 이 곳에서 밥 퍼주는 일을 해왔다. 적지 않은 세월이다. 누가 봐도 초라할 이 거리 이름은 '오병이어(五餠二魚)거리'다.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 군중을 먹이는 기적을 행했던 데서 따온 이름이다.

작품 욕심에 푹 빠진 정래군.
 작품 욕심에 푹 빠진 정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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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일공동체 최일도 목사가 노숙인들을 위해 밥을 퍼줘 유명해진 곳 '밥퍼'.
 다일공동체 최일도 목사가 노숙인들을 위해 밥을 퍼줘 유명해진 곳 '밥퍼'.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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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동안 지치지 않고 밥을 퍼준 일이야말로 기적에 가깝다. 하지만 그 기적이 얼마나 사람 마음을 움직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혹자는 '밥퍼' 공동체가 노숙인들을 끌어들여 동대문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불평한다. 내 일이 아닐 때는 마냥 아름답게 보이겠지만, 내 일 내 이웃 일이 된다면 또 다를 일이다.

'밥퍼 공동체'가 우리 동네에 있고 그로 인해 많은 수의 노숙인들이 배고픔을 달랜다면 우리 동네 민심 또한 어떻게 바뀔지 모를 일이다. 또한 노숙인들을 고깝게 보더라도 그 중에 내 부모와 형제가 있다면 또 어떨까.

내 처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은 전혀 달라진다. 답십리에서 하루 동안 만난 사람들은 나이 많고 경쟁에서 뒤처진 이들이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과 발언권이 높은 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같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답십리는 변화 중이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 이 곳에 살 사람들과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들이 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태그:#답십리동, #골목, #자전거, #미니벨로, #촬영소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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