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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신이 멍하다. 밤새도록 누지앙의 거센 물소리가 잠을 뒤흔든 탓일까? 강보다 산 쪽에 붙어 있는 곳에 잠자리를 잡았는데 왜 곁에서처럼 물소리가 들린 것일까?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누지앙을 따라 형성된 마을들은 대개 산에 바짝 붙어 있다. 협곡이나 물길을 피하자면 자연히 산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묵은 숙소도 창 밖이 바로 산이다. 밤새 내 귓전을 흔든 것은 누지앙 물소리가 산의 바위와 이웃 건물들에 부딪혀 메아리로 울린 것이었다.

 

옆으로는 군부대다. 아침 운동을 하느라 구호 소리가 요란하다. 구호 소리에 물소리도 묻혀버린다.

 

푸꽁, 대나무 집에서 아침 노래가 울리는 곳

 

 

천천히 숙소 밖으로 나와 푸꽁(福貢) 산책을 나선다. 푸꽁은 작은 도시다. 도시라기보다는 그저 조금 큰 마을일 정도다. 그래도 시내에는 오토바이 택시들이 줄지어 서서 아침 손님을 기다린다. 걸어다녀도 10여 분이면 충분할 거리인데,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어디를 갈까? 이웃 마을, 혹은 도시 밖에 있는 공장에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 탈까?

 

내 생각대로 타는 사람이 별반 없다. 그저 길가에 주차해 놓고 있을 뿐이다. 하루 두어 명의 손님이나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나는 오토바이 택시를 구경한다. 아이를 안은 새댁이 그 중 한 대를 타고 사라진다. 그리곤 또 손님 하나 없는 시간이 이어진다.

 

 

푸꽁은 도시가 거의 일직선으로 형성되어 있다. 누지앙, 차마고도 상의 작은 마을이었을 푸꽁은 '행복한 까오리꽁산(高黎貢山)'이라는 뜻이다. 누지앙의 하류에서 상류인 꽁산(貢山)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까오리꽁산은 북쪽으로 청장고원에서 시작해 남쪽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히말라야 서쪽으로 뻗은 횡단산맥(橫斷山脈)에 있는 산 중의 하나다. 티베트에서 미얀마에까지 이르는 길고 큰 산이며, 가장 높은 봉우리가 5126m니 그 크기를 짐작해 볼만하다. 낮은 곳은 해발 523m로 표고차가 커서 ‘한 산에 일 년 사계절이 있고, 십리마다 다른 하늘이 보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2000년에 유네스코가 세계생물권보호구로 선정할 만큼 다양한 생물종이 분포하고 있는 산이 바로 까오리꽁산이다.

 

누지앙은 이 까오리꽁산과 비뤄쉐산(碧羅雪山) 사이 협곡을 흐르는 강이다. 대협곡 사이로 누지앙은 거센 물줄기를 뒤흔들며 흘러 미얀마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협곡 비탈, 강가에 사람들은 작은 밭을 일구고, 차마고도를 지나는 마방(馬幇)들에게 기대 오랜 삶을 견뎌온 것이다. 푸꽁 또한 그런 마을들 중의 하나였으리라. 그러나 옛 자취는 없고, 사람들은 이제 누지앙의 물소리를 일상의 자장가로 들으며 살아간다. 사라진 마방을 기다리며 사는 것일까? 그들의 삶은 오랜 기다림을 견뎌낸 것처럼 느긋하다.

 

 

건물이 늘어선 길가를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선다. 큰 건물에 부딪혀 들리던 물소리도 사라진다. 좁은 골목을 나서자 채소밭이 나온다. 작은 텃밭에는 채소들이 자라고, 밭 귀퉁이에 대나무를 엮어 만든 집이 한 채 놓여 있다. 금방 일어났는지, 아니면 아침 준비를 하는지, 집 안에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다 들린다. 밤이면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 바람이 숭숭 들 것 같은 대나무로 엮은 집에서도 푸꽁 사람들의 삶은 넉넉하고 흥겨워 보인다.

 

채소밭을 지나자 이내 강가다. 누지앙의 흙탕물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흐른다. 강 양쪽으로는 아득하게 길이 흐른다. 그 길 따라 집들이 흐르고, 사람들도 흐른다. 누지앙은 이 협곡에 사는 사람들의 일부 같다. 그래서 누지앙에서는 사람이 곧 강이다. 오랜 세월 강과 함께 살아왔을 누지앙 사람들은 흘러 어디로 가는 것일까?

 

눈 쌓인 스웨량(石月亮)에서

 

아침 식사 후 푸꽁을 떠난다. 오늘 목적지는 삥중뤄(丙中洛)다. 천리 누지앙의 상류이며, 내 여행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차는 강을 따라 난 좁은 길을 쉬지 않고 달려간다. 길을 따라 강물이 흘러 내려온다. 어쩌다 작은 마을이 나타나고, 대부분은 그냥 산과 강이다. 강 건너 아득한 바위 벼랑 위에만 집들이 액자처럼 걸려 있다.

 

왜 누지앙 사람들은 저렇게 높은 산 위에 집을 짓고 살까? 곰곰 생각해보니, 산 위일수록 햇볕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리라. 좁은 골짜기, 손바닥만한 땅에서 농사를 짓다 보니 보다 많은 일조량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점점 산 위로 삶의 터전을 옮겨간 것은 아닐까?

 

도로 위에는 흔히 개들이 있다. 어제 비지앙 마을에서도 개들이 길을 막고 있었는데, 집이 있는 길가에는 어김없이 개들이 자리 잡고 있다. 어떤 녀석은 죽어라 하고 차를 따라 달려오기도 한다. 이빨이 제법 사나운 놈도 있다. 어떤 녀석은 길 가운데 떡 버티고 앉아 있다. 치일 듯 차가 다가가도 움직이지 않는다. 차가 개를 피해 달릴 수밖에 없다. 누지앙에서는 길의 주인이 개다. 그저 물끄러미 차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개 또한 아득한 시간 속에서 흘러나온 것 같다.

 

 

한동안 달리던 차가 길가에 멎는다. 스웨량(石月亮)이다. 한 시간 반 정도 달려 마주친 스웨량은 놀라운 풍경이다. 멀리 허공중에 바위산이 치솟아 있는데, 그 중 하나의 바위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아득히 먼 거리에서 바라보아도 구멍이 커다랗게 보이니, 가까이에서는 아주 큰 바위 구멍일 것이다. 바위구멍 사이로 뒤쪽 하늘이 흐릿하게 보인다.

 

스웨량은 까오리꽁산 산맥의 중간쯤에 있는 3300m 되는 바위산이다. 동굴의 깊이가 약 100m, 폭은 40m, 높이는 60m 정도가 된다는 이 동굴은 대리석이 용식(溶蝕)되어 이루어진 천연 동굴이라고 한다. 비행기가 통과할 수 있다는 말도 전해질 정도다. 누지앙 지역의 소수 민족 중 하나인 리수족(傈憟族) 대홍수 신화에도 등장할 만큼 스웨량은 누지앙의 대표적인 자연유물이라고 한다.

 

한동안 넋을 놓고 스웨량을 바라본다. 신비하기 이를 데 없다. 카메라로 당겨 보니, 바위산에 눈이 희끗희끗하다. 전망대 옆에는 터 닦기 공사가 한창이다. 아마도 휴게소나 가게를 짓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자연이 상업이 되는 씁쓸함도 스웨량의 신비한 풍경을 지워내지는 못한다.

 

리우수오(溜索)을 타고 강을 건너다

 

 

누지앙은 비뤄쉐산과 까오리꽁산 사이를 흐르는 강이다. 양쪽 산이 깎아지른 듯 마주 서 있으니 자연 길고 긴 협곡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물살은 거세고 산은 가파르니 양쪽에 사는 사람들이 건너편으로 왕래하기 곤란한 것은 당연지사다.

 

그 곤란함을 극복한 도구가 바로 리우수오다. 줄에 미끄러진다는 뜻의 리우수오는 강 양쪽으로 밧줄을 매고, 매달려 건너는 방법이다.

 

황구어첸이 얼마를 달리다 차를 멈춘다. 이곳에서 리우수오를 타보라며 씩 웃는다. 아낙네 몇이 모여 담소를 나누다 다가와 강을 가로지른 줄을 가리킨다. 자기네끼리도 차례가 있는지, 내가 타겠다고 하자 한 아주머니가 앞으로 나선다. 다른 아낙네들은 그저 웃으며 줄을 타는 곳을 가리킨다.

 

리우수오 타는 곳으로 나를 데려간 아주머니가 먼저 고리를 줄에 건다. 그리고는 나를 앞에 앉게 하고, 자신은 뒤쪽에 앉는다. 실로 꼬아 만든 소쿠리 같은 자리에 앉으니, 이제 내 생명을 지탱해 주는 것은 오직 줄에 걸린 고리뿐이다. 내려다보니 강물이 무섭게 요동치며 흐르고 있다. 이러다 저 강물에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몸서리가 쳐진다.

 

아주머니는 천천히 땅에서 발을 뗀다. 그러자 제법 빠른 속력으로 내 몸이 강을 향해 달려나간다. 아주머니가 손으로 밧줄을 잡아 속도 조절을 한다. 귓전으로 쌩쌩 바람이 스쳐 지나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모르게 고리에 연결된 끈을 힘주어 잡는다.

 

몇 번 숨을 고른 사이 어느새 내 몸은 강 건너편에 도착해 있다. 시간이 흘러가기는 한 것일까? 내 몸이 강물을 건너오기는 한 것일까? 여기 있는 내가 아직 건너편에 있는 것 같은 순간 이동의 묘미를 새삼 느낀다.

 

리우수오는 누지앙 부근에 사는 리수족이나 누족(怒族)에게는 어쩌면 축지법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건너가기 위해서는 위험한 배를 타야 하거나 혹은 몇 날 며칠을 걸어가야 했을 길을 불과 몇 초 사이에 건널 수 있는 방법이니 말이다.

 

강을 건넌 아주머니는 바위 벼랑을 잠시 올라간다. 다시 건너가는 줄은 조금 위에 매여 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건널 수밖에 없으니, 건너가는 줄은 조금 높은 곳에 매여 있는 것이다. 아주머니는 바위 벼랑에 난 풀들을 뜯어 손에 쥐고 타는 곳에 소쿠리 의자를 건다.

 

다시 몸이 강을 향해 돌진한다. 이번에는 무서움이 덜하다. 가만 보니, 아주머니는 뜯은 풀로 출발할 때의 속도를 조절한다. 풀을 쥔 손으로 줄을 잡아 마찰력을 줄이는 것이다. 다시 몸은 순식간에 거센 물줄기를 지나 강 건너편에 도착한다.

 

예전에는 대나무 뿌리나 마, 등나무 줄기 따위로 줄을 만들어 맸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쇠줄을 쓴다. 이 줄로 말도 매달아 건너고, 온갖 물건들도 운반했다고 한다.

 

운남의 남쪽 징홍(景洪)에서 푸얼차(普洱茶)를 싣고 먼 길을 떠난 마방들이 누지앙에 이르러 이 리우수오를 타고 강을 건넜다니, 얼마나 오래된 통행 방법인가? 마치 역사의 한 굽잇길을 건너본 것 같다.

 

리수족의 연인들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누지앙의 하늘 다리'

 

 

‘누지앙의 하늘 다리(怒江天橋)’라고도 부르는 리우수오에는 리수족의 연인들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강 양쪽으로 나뉘어 살던 처녀 총각은 누지앙의 거센 강물을 건널 수가 없어 애만 태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청년은 처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강가에 나와 흐르는 누지앙 물과 산과 그 위의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 커다란 무지개가 떠올랐다. 그 무지개는 강 이쪽에서 처녀가 사는 건너편 마을로 가로질러 떠 있었다. 무지개를 바라보던 청년이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저렇게 하면 되겠어.’

 

청년은 나무 덩굴을 엮어 긴 줄을 만들어 강 이쪽에서 저쪽으로 줄을 매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가고 싶을 때는 언제나 처녀를 만나러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리우수오는 그렇게 해서 누지앙의 곳곳에서 강을 건너는 도구로 사용되게 되었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 정선 아라리의 전설과 비슷한 이야기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릿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님 그리워 나는 못살겠네.

 

강원도 정선의 아우라지 강을 사이에 두고 처녀 총각이 서로 사랑을 했다. 어느 날 처녀와 총각은 싸릿골에 동백꽃을 따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만 밤새 비가 내려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이런 안타까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정선 아라리의 동백은 남도에 피는 동백꽃이 아니라 생강나무를 부르는 강원도 지방 이름이다. 처녀 총각이 동백꽃을 따기로 한 것은 핑계일 테고, 속내는 사랑을 속삭이기 위한 것이니, 이 노래는 사랑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정선 아라리가 강을 건널 수 없게 된 사정을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노래하고 있다면, 리우수오에 얽힌 리수족의 이야기는 사랑보다는 생활의 필요성이 강조된 설화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감정보다는 사랑으로 인해 리우수오라는 생활 도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데 이야기의 중심이 있다. 그만큼 누지앙 사람들에게 리우수오는 긴요한 도강(渡江)의 수단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강을 사이에 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누지앙 사람들의 환경이 만들어낸 설화라고 할 수 있다.

 

건너다 보면 빤히 마주보이는 강 건너편 비탈에 살면서 쉽게 갈 수 없었던 리수족 사람들의 마음이 리우수오를 보면 생생하게 되살아온다.

 

나는 한동안 리우수오 곁에서 마구 요동치며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강물 위로 문득 리우수오를 타고 허공을 가로지르는 마방들의 그림자가 스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얼마나 많은 마방들이 이 길을 건너 매리설산을 넘었을까? 바람은 덧없이 강물 위를 불어 가는데, 이제는 흔적을 찾기조차 힘든 과거의 사람들이 되어버린 차마고도 마방들의 두런거리는 소리와 워낭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삶이란 이 세상에 숨결 뿌리고 살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나는 천천히 하늘의 다리인 리우수오를 떠난다. 그러나 어디 하늘의 다리가 한두 군데이겠는가? 누지앙이 흐르는 협곡 곳곳에는 하늘다리가 놓여 있다.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 저 강물 위의 허공에 누지앙 사람들의 하늘 다리는 늘 새로 세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강을 건너 이웃 마을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눌 따스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한 말이다.

 

삶이란 이 세상에 숨결 뿌리고 살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 덧없는 것을 우리는 무엇 때문에 쫓기듯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결국은 바쁜 제 걸음에 채여 쓰러져 버리고 말 존재는 자기 자신 아닐까! 나는 허공을 긋는 금인 리우수오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다시 길을 떠난다. 강에는 커다란 바위에 푸른 소나무 한 그루가 누지앙을 바라보며 서 있다. 강상일청송(江上一靑松)이란다. 그 아름다운 경치가 쓸쓸해 보이는 것은 줄을 매고 강을 건너야 했을 누지앙 사람들의 마음이 헤아려져서다.

 

협곡 벼랑 끝에 집 한 채 지어놓고, 강 건너의 이웃집 마실 가는 것조차 목숨을 걸어야 했을 순한 사람들. 그들의 삶은 평생 바위 위에 겨우 제 뿌리 내리고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아야 했을 저 소나무 같은 것이었을까?

 

바람이 분다. 누지앙을 스치는 바람은 따사롭고, 올라갈수록 물빛은 점점 푸르러진다. 우리 생은 얼마나 더 걸어야 푸르러질 것인가! 아, 가도 가도 끝없는 누지앙 천 리여, 걸어도 걸어도 막막한 생의 덧없음이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borisogol.cafe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리우수오#누지앙#푸꽁#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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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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