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황범식(61)의 이름 세 글자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매니저, 소속사도 없다. 하지만 황범식은 30여년 넘게 안방극장을 조용히 지켜온 배우로, 우리는 그의 연기를 기억하고 있다. 단지 인기와 스타라는 명칭에서 조금 먼 것뿐이다. 그는 크든 작든 배역에 상관없이 열심히 30년 넘게 연기해왔다. 그래서 조·단역 배우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닐지 모르지만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다. 연기자로 살아가는 그 자체가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70년 KBS 9기 공채 탤런트로 백윤식, 장항선과 동기인 배우 황범식씨는 요즘 상종가를 치고 있는 KBS 대하드라마 <대왕세종>에서 태종의 내시 노희봉으로 살고 있다. 까다롭고 불같은 성미를 가진 태종을 평생 보필한 인물을 연기해 안방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태종 최측근 내시인 만큼 촬영 시 태종과 동선을 같이 한다. 추운 야외 촬영장의 칼바람을 맞으며 고생하는 것도 일쑤. 하지만 고생에 비해 대사는 적다. 23회분 촬영에서도 그는 대사 한마디 없었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는다. <산넘어 남촌에는> 이장역,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 일품 “연기라는 것이 욕심낸다고 해서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나한테 맞는 배역을 늘 기다리고 있다. 좋은 배역이 오기를 30여년 넘게 기다려왔다. 그 설렘 자체가 인생이 됐다. <세종대왕>에서도 5월 초 노희봉이 죽는다. 욕심 같아선 사극 막 내릴 때까지 같이 했으면 한다. 하지만 연기는 욕심이 아니다.” 그는 또 매주 수요일 저녁 KBS1 전원드라마 <산 넘어 남촌에는>에서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동네 이장 봉춘봉 역을 맡아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실제 고향이 강원도 정선인 그가 충청도 사투리를 문제없이 소화해 내는 것을 보면 신기할 정도다. 최근에는 연극 <러브>에도 더블 캐스팅돼 중년연기자로서 농익은 연기를 선사하고 있다. 국민드라마 MBC <주몽>에서도 부여 금와왕 신하역을 맡아 최선을 다했다. 주연은 아니지만 30여년의 연기연륜이 빚어내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KBS1 <황금사과>에서 보여준 그의 중풍 노인 연기는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렇게 배우 황범식은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아는 배우다. 어려움을 견디며 묵묵히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온 그는 자신의 삶은 비록 무명일지라도 자신이 맡은 배역만큼은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정성과 열정을 쏟아왔다. 길고 힘든 배우 생활에서 그를 신명나게 한 건 다름 아닌 아들과 딸. 카메라 앵글을 벗어나면 그도 자식 걱정에 애가 타는 평범한 대한민국 아버지로 돌아간다. 현재 아들, 딸 모두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있어 그의 일상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지금도 자식과 멋진 배역을 기다리고 있다. “기회가 되면 강원도 사투리로 연기 인생의 승부를 걸고 싶다. 사투리 연기만큼은 자신 있다. 그리고 시트콤에도 도전해 감초연기를 해보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원하는 배역을 맡는 건 아니다. 배우도 운이 따라야 한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배역에 상관없이 연기하다 보면 황범식 인생에도 쨍하고 해뜰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기다림 자체가 희망 아닌가.” 그도 사람인지라 왜 뜨고 싶은 욕심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는 기다릴 줄 아는 행복한 느림보다. 가슴에 희망을 품고 살기에 그의 연기는 감칠맛 나고 풍성하다. 그리고 누룽지처럼 구수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20년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에 살고 있는 그는 시간 날 때 마다 종종 올림픽공원 산책에 나선다고 한다. 혹시 배우 황범식을 만나게 되면 “요즘 드라마 잘 보고 있습니다”고 환하게 인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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