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표지사진 라이베리아 소년병의 모습이 담긴 <집으로 가는 길> 표지
▲ 표지사진 라이베리아 소년병의 모습이 담긴 <집으로 가는 길> 표지
ⓒ 북스코프

관련사진보기

전쟁은 참혹하다. 전쟁이 참혹한 이유는 인간이 도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이란 직업을 가진 사람이 제일 먼저 도구가 된다.

그리고 적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또는 전시 물자, 노동력 조달을 이유로 민간인이 차츰 도구화되기 시작한다. 전쟁의 광기가 몰아치면 피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간인은 잔인한 학살과 학대의 대상이 된다.

강력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전쟁 상황에서 약자는 처절한 희생자의 역을 말없이 맡아야 한다. 그 중에 연약하지만 비교적 쓸모 있는 노동력의 소유자인 소년, 소녀들은 정부군에게든 반군에게든 군침 도는 먹잇감이 된다.

내전은 종결되었지만, 아직도 끝날 줄 모르는 시에라리온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수도 프리타운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에 사는 열두 살짜리 소년 이스마엘에게도 그 비극은 비켜가지 않았다.

이 책 <집으로 가는 길>은 소년병이었던 이스마엘 베아가 내전 상황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소년병이 되어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유니세프의 도움으로 정신치료를 받으며 재활하는 과정과, 다시 터진 전쟁을 피해 고국을 탈출하는 실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장기자랑 대회에 가려고 떠난 집

1993년 열두 살 소년 이스마엘은 이웃 마을 마투루종에서 열리는 장기자랑 대회에 나가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집을 나선다. 노래가사가 적힌 공책을 배낭에 넣고 춤추기에 적당한 헐렁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나서는 그 길이 고향을 보는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열심히 랩을 연습하며 걷는다.

그러나 장기자랑 대회가 열리기도 전에 이스마엘은 광산지역인 고향 마을이 반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반군의 학살과 약탈로 고향은 온통 아비규환이라는 소식이었다.

이스마엘 일행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반군이 급속하게 세력을 넓혀오는 탓에 가야 할 곳도 몰랐다. 이때부터 이스마엘은 안전지대를 찾아 헤매는 괴로운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반군을 피해 달아나면서 반군이 훑고 지나간 마을의 학살현장을 목도하기도 하고, 죽음의 위기를 겪기도 한다. 어디를 가나 즐비한 시체와 피비린내 나는 전투와 팔다리를 함부로 잘린 사람들의 울부짖음은 이스마엘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와 전쟁의 광기는 어린 소년의 정신을 공황상태에 빠트린다.

죽을힘을 다해 전투지역을 빠져나와도 이 어린 소년들이 머물만한 안전지대는 없었다. 이 소년무리가 먼발치에서 보이기라도 하면 그 마을사람들은 몽땅 짐을 싸서 피신을 하거나 다짜고짜 매타작을 놓는 일이 다반사였다. 당시 소년병들이 저지르는 잔인무도한 행각은 온 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리하여 이스마엘 일행처럼 전쟁고아나 다름없는 떠돌이 아이들도 소년병으로 오인하여 극도로 두려워하고 경계했던 것이다.

‘이맘’(마을의 연장자, 지도자)을 중심으로 농사를 지으며 순박하게 살아온 시에라리온의 시골마을들은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도 소박하게 유지되었던 마을공동체는 마약에 취한 병사들이 잔인하게 휘두르는 총칼에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사람들은 점차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스마엘은 배고픔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두통에 시달리게 된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시체들과 강물이 되어 흐르는 선혈과, 목을 조여 오는 죽음의 공포로 어린 소년의 영혼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래퍼를 꿈꾸던 소년, 총을 든 병사가 되다

전쟁의 광기 속에서도 이스마엘에겐 놓을 수 없는 한 가지 희망이 있었다. 그것은 가족을 만나는 것. 부모님과 형, 동생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이스마엘은 혼자서 정글을 헤매고, 배고픔을 참아내고, 반군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쳐왔다.

어느 날 이스마엘은 숲을 헤매다 기적적으로 고향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에게서 부모님과 형제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가족들은 바로 근처 마을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스마엘은 기쁨과 흥분으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안고 가족이 있는 마을로 내달린다. 마을로 이어지는 언덕을 내려오는데 난데없는 총소리가 들린다. 반군의 포격으로 마을은 불바다가 된다. 이스마엘은 바로 눈앞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만다.

그 후 이스마엘은 정부군의 소년병이 되어 총을 들고 전쟁터를 전전한다. 그는 넘치도록 보급되는 코카인을 날마다 흡입하고 전투에 나간다. 환각상태에서 나오는 용감무쌍한 행동으로 전공을 세워 ‘소년중위’로 치켜세워진다. 그리고 차츰 어린 시절의 꿈과 기억을 잊어간다. 오직 죽고 죽이는 싸움터에 영혼과 육체를 내맡긴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는 2년간 전투를 했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과는 살인이었다. 나는 누구에서도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어린 시절은 끝나버렸고, 내 심장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달이 뜨고 해가 뜨면 밤낮이 오고 가는 줄만 알지, 그날이 일요일인지 금요일인지 모르고 살았다.”

이스마엘은 유니세프의 도움으로 소년병에서 벗어나 재활의 기회를 얻는다. 죽음보다도 고통스러운 마약 금단현상을 견디며, 몇 달간 집중적인 정신치료를 받는다. 치유되기 힘든 상처였지만, 헌신적인 간호사 등의 도움으로 이스마엘은 다시 랩음악을 흥얼거리는 소년으로 돌아온다. 어렵사리 만난 삼촌의 가정에게 입양되어 평범한 소년으로 살아갈 꿈을 다시 꾸게 된다. 그러나 이스마엘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쿠테타가 반복되면서 시에라리온의 정국은 혼란으로 치닫고, 급기야 내전을 일으킨 반군이 정권을 장악하는 최악의 사태를 맞는다. 밀림의 전선에서 나온 반군과 소년병들은 수도 프리타운을 점령했고, 도시는 순식간에 아비규환 상태가 된다.

이스마엘은 이 끝나지 않은 불행 속에서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린다. 그것은 고국을 탈출하는 것. 그것만이 다시 소년병이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위험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기니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 책의 제목은 ‘집으로 가는 길’이지만, 이스마엘은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돌아갈 집도, 살아 있는 가족도 없을 뿐더러 그를 반겨줄 마을도 없었다.

다만, 잃어버린 어린 시절과 꿈을 기억해내는 것으로 마음 속의 ‘집’에 다다랐을 뿐이다. 현재 이스마엘은 미국에 살면서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에라리온의 별

이스마엘 베아 환하게 웃고 있는 이스마엘 베아
▲ 이스마엘 베아 환하게 웃고 있는 이스마엘 베아
ⓒ 북스코프

관련사진보기


현재 내전을 치르고 있는 아프리카, 아시아 분쟁지역에서 소년병 생활을 하는 아이들은 30만 명에 달한다. 어린 소년, 소녀를 전쟁에 개입시키면 어느 편이 승리하든 그 나라엔 미래가 없다. 그것이 시에라리온의 커다란 절망이기도 하다. 얼마나 깊은 후유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수십만에 달하는 소년병, 소녀병들이 치유될 수 없는 죄책감과 상처를 짊어진 채 일생을 살아가고, 그 집단적 트라우마는 다음 세대에도 어두운 그늘을 드리울 것이다.

우리나라도 3년간의 내전이 50년 넘는 긴 냉전체제를 만들었다. 11년의 내전을 겪은 시에라리온이 전쟁의 상처에서 회복되려면, 특히 소년병들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세월과 노력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시에라리온의 별. 1972년에 발견된 어른 주먹 크기만하다는 다이아몬드. 제2의 ‘시에라리온의 별’을 찾기 위해 오늘도 다이아몬드 광산은 바쁘게 돌아간다. 그러나 진짜 시에라리온의 별은 광산의 진흙창 속이 아니라, 시에라리온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속에 있는 게 아닐까?

다이아몬드 광산을 두고 벌어진 정부군과 반군간의 긴 싸움. 보석을 팔아 챙긴 막대한 돈으로 무기와 마약을 들여와 자국의 국민을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던 나라. 다이아몬드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어린 소년들에게 총질을 시켰던 탐욕스러운 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 그 소년들을 광산 노동자로 부리고 있다. 이것이 과연 시에라리온만의 문제일까. 이를 모른 체하는 외국 자본과 손가락의 호사를 꿈꾸는 세계의 다이아몬드 소비자들이 모두 한패가 되어 시에라리온의 비극을 부추기는 게 아닐까?

여러 종족이 작은 마을 단위로 모여 농사지으며 살았던 시에라리온의 전통사회는 자본의 단맛을 본 탐욕스러운 군벌들이 휘두른 폭력 앞에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리고 말았다. 식민지 독립 후 민주주의라는 낯선 정치제체를 받아들이고 운영하는데 다소 미숙할지 모른다. 그러나 뿌리 깊은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고 그 공동체의 힘으로 소년병 아이들을 받아주고 치유해준다면, 아이들 눈 속에서 시에라리온의 별은 다시 빛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집으로 가는 길> 이스마엘 베아, 2007. 북스코프



집으로 가는 길 - 개정판

이스마엘 베아 지음, 송은주 옮김, 북스코프(아카넷)(2014)


태그:#집으로 가는 길, #소년병, #이스마엘 베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