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산>에서 정조의 등극이 이미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정조의 어머니인 홍씨는 대비인가 아닌가? 정조 등극 이후의 <이산>을 감상하면서 그런 의문을 가졌을 시청자들이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 아들이 왕이 되면 그 어머니는 대비가 된다. 그러나 홍씨의 경우에는 문제가 좀 복잡하다. 법적으로는 정조의 어머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조가 이미 이산을 장남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양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홍씨는 대비가 될 수 없는 처지였다.
한편,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의 사망과 함께, 중전에서 대비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왕대비로 ‘2단계 특진’ 하는 ‘행운’을 얻었다. 남들은 한창 중전을 하고 있을 나이인 32세에 정순왕후는 이미 왕대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 즉위 직후에 조선왕실에는 공식적으로 대비가 존재하지 않았다. 정조가 즉위 후에 자신의 양부인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효장세자의 부인인 김씨를 효순왕후로 올렸기 때문에, 효순왕후 김씨가 대비가 되는 게 마땅했지만 그 역시 이미 영조 27년(1751)에 사망한 뒤였다.
그럼, 이산의 생모인 홍씨. 그의 신분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 사도세자의 폐위 때로부터 홍씨의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홍씨의 입지는 사도세자의 폐위 이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자인 남편이 폐위된 데에다가 뒤주에서 죽기까지 했으므로, 그의 지위 역시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조는 사도세자의 사망 직후에 그에게 혜빈이란 칭호를 내렸다. 그가 세손의 생모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남편의 사망 후에도 여전히 시아버지에게 극진한 그의 효심에 영조가 감동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편이 죄인으로 몰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의 신임과 세손의 존재 덕분에 왕실 내에서 지위를 유지해가던 홍씨. 아들이 보위에 오르고 난 이후 조선정부에서는 그의 신분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주의 생모이므로 대비가 되는 게 마땅하지만, 법적으로는 그렇지 않으므로 그는 대비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대비가 될 수 없다고 하여 그를 그저 세자빈 정도로만 대우할 수도 없었다. 아들이 지존인데 그 어머니를 세자빈 정도로 대우한다면 그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대비가 될 수 없는, 군주의 살아 있는 생모. 그에 대한 예우는 복잡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군주의 살아 있는 생부였던 흥선대원군을 대우하는 것만큼이나 그를 대우하는 것도 여간 까다로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난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정조 시대의 조선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대비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비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홍씨의 처우문제를 놓고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의 절충적 방안을 채택했다. 형식적 대우와 실질적 대우를 이원화하는 약간 ‘애매모호한’ 방법을 취한 것이다.
그에 대한 형식적 대우는 이랬다. 정조 즉위 이후에 조선정부에서는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높이면서 그를 왕보다 한 단계 아래로 대우하기로 했다. 남편을 왕보다 한 단계 아래에 두었으니 그 부인도 왕비보다 한 단계 아래에 두는 것이 마땅했다. 그래서 혜빈 홍씨를 혜경궁으로 높이면서 그를 왕비보다 한 단계 아래로 대우하기로 했다.
이미 남편이 죽고 아들이 군주가 된 이후이기 때문에 ‘왕비보다 한 단계 아래’라는 것은 ‘대비보다 한 단계 아래’라는 말로 변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정조 즉위 이후의 홍씨는 형식적으로는 대비보다 한 단계 아래인 사람으로 대우를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중전과 대비의 중간 정도의 대우를 받은 것이다.
중전과 대비의 중간? 중전이면 중전이고 대비이면 대비이지 그 중간이 대체 뭐냐며 의문을 품었을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관념적인 조치가 일반 백성들에게 쉽게 납득될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홍씨에 대한 실질적 대우는 위와 같은 형식적 대우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실질적 대우는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수준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순조실록>에 따르면, 정조 즉위 이후의 홍씨는 ‘장락(長樂)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장락이란 대비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한나라 고조 때에 태후(대비)가 장락궁 안에 살았기 때문에 장락이란 표현은 대비를 가리키는 표현이 되었다.
그와 같이 당시 사람들은 홍씨를 ‘장락처럼’ 대우했다. ‘대비처럼’ 모신 것이다. 그러므로 홍씨에 대한 실질적인 예우는 대비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홍씨에 대한 실질적인 호칭으로는 혜경궁 대신 자궁(慈宮)이 사용되었다. 평소에는 그냥 자궁이라고들 불렀다고 한다.
자궁이란 말 속에는 어머니(慈)란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자궁이란 표현은 실질적으로는 대비를 가리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도세자가 아직 왕으로 추존되지 않은 상태인지라 대비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자궁’이란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장락처럼’ 즉 ‘대비처럼’ 대하면서 ‘자궁’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그를 불렀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정조시대에 홍씨에 대한 예우는 형식적으로는 ‘대비와 중전의 중간’에서, 실질적으로는 대비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한 절충적 조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죽은 남편이 왕이 아닌데다가 군주의 법적 어머니도 아니었으므로 정식 대비로 대우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엄연히 지존의 생모였으므로 실질적으로는 대비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대비가 아니면서 대비인 존재였던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대비 대우’ 혹은 ‘대우 대비’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런 복잡한 문제는 훗날 고종 임금에 의해 ‘한 큐’에 해결되었다. 고종 임금이 사도세자를 장조 임금으로 추존하면서 홍씨도 헌경왕후로 추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홍씨는 그때서야 비로소 대비가 될 자격을 얻은 셈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대비가 되기에는 너무나 뒤늦은 시점이었다. 모두 다 죽은 뒤였기 때문이다.
생전의 그는 그저 ‘대비 대우’로 만족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정식 대비는 못 되었다 해도, 아들이 무사히 지존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감사하며 살 수 있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