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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짝 핀 백목련(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남간정사).
활짝 핀 백목련(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남간정사). ⓒ 안병기

일찍이 목련 속에 드리워진 슬픔의 너울을 보았노라

 

4월의 꽃 목련이 활짝 피었다. 예년보다 늦게 피었느니, 일찍 피었느니 호들갑 떨 필요는 없다. 꽃은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온도를 맞춰 피는 것이지 인간들의 달력에 맞춰 피는 건 아니다.

 

목련과 백목련은 다르다. 꽃잎만 해도 백목련은 9장이지만, 목련은 6장이다. 또 백목련은 활짝 피지 않고 반쯤만 벌어진다. 그러나 목련은 꽃이 피면 꽃잎들이 활짝 벌어져서 꽃술이 다 드러나 보일 정도다. 목련은 우리나라가 원산인데 반해 백목련은 중국이 원산이다.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흔히 목련이라고 부르는 나무는 사실은 백목련이라는 사실이다.

 

내 고향엔 목련이 없었다. 내게 목련이라는 꽃나무의 존재를 각인시켜 준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음악 시간에 배웠던 박목월 작사·김순애 곡 '4월의 노래'였다. 특히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라는 구절은 고향을 떠나와 낯선 항구에다 새로이 닻을 내려야 했던 소년의 가슴에 짙은 애상의 그늘을 드리웠다.

 

그때 나는 사춘기였다. "목련꽃 그늘아래서"가 아닌 도서관 한구석에 틀어박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다. 이루지 못할 사랑의 슬픔이 오랫동안 내 혈관에 잔류했으므로 육신이 노곤 노곤했다. 그러나 교실 창 너머로 바라본 교정의 목련은 태연하기만 했다. 굽이치는 내 감정과는 상관없이 마냥 꾸벅꾸벅 졸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난 그때 하얀 목련 속엔 곤히 잠든 슬픔의 너울이 씌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무튼, 목련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꽃이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사랑하면 자기 나름대로 이름을 지어주고 싶기도 하고 자기 앞으로 등기하고도 싶은 충동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목련엔 별칭이 많다. 옥처럼 깨끗하고 소중한 나무라고 '옥수', 옥 같은 꽃에 난초 같은 향기가 있다고 해서 '옥란', 난초 같은 나무라고 해서 '목란', 나뭇가지에 피는 연꽃이라고 '목련', 붓끝을 닮은 꽃봉오리라 해서 '목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알고 싶다, 생명의 바퀴를 굴리는 힘을

 

땅을 밟고 사는 뮤즈인 시인들 역시 즐겨 목련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이정록 시인은 목련 나무를 할아버지가 혼자 살던 낡은 기와집으로 상정한다. 그래서 "빈방잇슴/  보이라 절절 끄름// 목련나무의 빈방 안에서/ 哭(곡)소리 새나온다(시 '목련나무엔 빈방이 많다' 일부)"라고 묘사한다.

 

그런가 하면 도종환 시인은 "어린 스님 바람처럼 오시어/ 입가로만 소리 없이 몇 번 웃으시다/ 노잣돈 다 털어 손에 쥐어 주시곤/ 꽃길 걸어 돌아 가신 날/ 거리까지 내려온 산벚꽃 향기 짙어라"(시 '목련비구니' 일부). 목련꽃을 비구니에 비유해 노래한다. 그런가 하면 젊은 손택수 시인은 목련나무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풍물인 전차에 비유한다. 그가 제공하는 '목련 전차'를 타고 그의 시 속으로 들어가 보자.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창비

목련이 도착했다

한전 부산지사 전차 기지터 앞

꽃들이 조금 일찍 봄나들이를 나왔다

나도 꽃 따라 나들이나 나갈까

심하게 앓고 난 뒤의 머릿속처럼

맑게 갠 하늘 아래,

전차 구경 와서 아주 뿌리를 내렸다는

어머니 아버지도 그랬겠지

꽃양산 활짝 펴 든

며느리 따라 구경오신 할아버지도 그랬겠지

나뭇가지에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

저 햇살을 따라가면

나무 어딘가에 숨은 전동기가 보일는지 모른다

전차바퀴, 기념물 하나만 달랑 남은 전차기지터

레일은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레일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날 수 있으련지 모른다

지난밤 내려치던 천둥번개도 쩌릿쩌릿

저 코일을 따라가서 동력을 얻진 않았는지,

한 량 두 량 목련이 떠나간다

꽃들이 전차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저 꽃전차를 따라 가면, 어머니 아버지

신혼 첫밤을 보내신 동래 온천이 나온다 - 손택수 시 '목련 전차' 전문

 

1970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손택수는 경남대 국문과와 부산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등이 있다.

 

그는 민중적 삶과 정서를 기꺼이 그의 시의 소재로 삼는다. 민중적이란 말을 그의 마음 속에 파괴되지 않는 채 남아 있는 고향에 대한 '원형의 기억'이라고 바꿔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므로 그가 펼쳐 보이는 세계는 당연히 낡은 것이다. 그 오래된 낡음을 활력에 넘치는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것은 그가 구사하는 시어의 몫이다. 시' 목련 전차'는 그가 낸 두 번째 시집인 <목련 전차>에 실려 있는 시다.

 

시의 무대는 한전 부산지사가 있는 전차 기지터 앞이다. 그곳에서 그는 목련을 바라보며 회상한다. 자신의 가족이 겪은 유목사(流牧史)를. 그의 부모는 어느 봄날, 전라도에서 부산으로 "전차 구경 와서 아주 뿌리를 내"려버렸다.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그가 왜 부산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는지 그의 성장의 비밀이 살짝 드러난다. 그러나 그를 유목민으로 만들었던 전차는 이젠 다니지 않고 전차 바퀴 하나만 기념물로 남겨 두었을 뿐이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그의 부모들의 여행 목적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들은 부산으로 신혼 여행을 와서 전차가 다니는 것을 구경하고 동래온천에서 첫날밤을 보낸 것이다. 시인은 목련을 전차 바퀴에 비유한다. 그리고 목련 꽃잎이 지는 모양을 가리켜 차량을 세는 단위인 "한 량 두 량 목련이 떠나간다"라고 묘사한다.

 

시인은 목련꽃을 바라보면서 상상한다. 나무 어딘가에 전동기가 숨겨져 있을는지 모른다고.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레일을 따라" 가면 혹시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날 수 있으을련지 모른다"라고 기대해 마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목련꽃을 아시는지  

 

지금까지 목련나무를 기와집·비구니·전차에 비유하는 시를 골고루 맛보았다. 목련을 소재로 쓴 시를 들먹이면서 복효근의 시를 빼놓을 수 없다.  전북 남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도 목련을 예찬하는 대열에 흔쾌히 동참한다.

 

196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복효근 시인은 1991년 <시와시학>에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꽃 브라자> 등이 있다. '목련꽃 브라자'는 그가 내놓은 다섯 번째 시집인 <목련꽃 브라자>(2005년)에 실려 있는 시다.

 

목련꽃 목련꽃

예쁘단대도

시방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만할까

고 가시내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빨랫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내 다 알지

목련꽃 두 송이처럼이나

눈부신

하냥 눈부신

저...... - 복효근 시 '목련꽃 브라자' 전문  

 

짧지만, 아주 함축성 있는 시다. 이제 막 활짝 피어나기 시작하는 딸 아이의 수줍음과 그 딸에 대한 사랑이 하나로 절묘하게 결합한 시는 아름답기 그지 없다. 이 완성도 높은 시에 뭔가 설명을 덧붙인다는 건 사족에 지나지 않을 터.

 

복효근 시인은 이렇게 일상적 사물에 빗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길 즐긴다. 삶이 내포한 거짓과 위선의 꼬투리를 끄집어 내 비판한다.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가 전혀 날카롭게 들리지 않는 것은 부드럽고 친화력있는 어법 탓이 아닐까 싶다. 그의 목소리에는 늘 그렇게 사랑이 담겨 있다.

 

4월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속엔 벌써 4월이 들어앉아 화사한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제 더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일도 없고 목련꽃 긴 사연의 편지를 쓰는 일도 없다.

 

사춘기 시절엔 곧잘 감정이 꽃 피었다가 지곤 했지만, 이젠 쉽사리 감정이 꽃 피지 않는다.

무기력·무중력·시시껄렁함으로 가득찬 삶 속엔 통증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수 많은 날들을 그것들과 건들거리며, 노닥거리며, 속닥거리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나도 손택수 시인처럼 언제 시간을 내서 생명의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나러 목련 나무 안으로 이어진 생명의 레일을 따라 어디론가 한없이 가고 싶다. 생명의 바퀴를 굴리는 힘이 가진 비밀을 캐묻고 싶다.


#목련 #전차 #브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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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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