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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식 희생자 박남석씨의 유족 박원규씨(70세)의 뒷모습
▲ 추모의식 희생자 박남석씨의 유족 박원규씨(70세)의 뒷모습
ⓒ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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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뿔난 바다> 표지
 <뿔난 바다>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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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끼시마호 폭침 사건'을 알게 된 것은 <돌아오지 않는 영웅들>이라는 영화를 통해서였다. 이는 해방 직후 귀국선에 올랐던 수많은 강제징용 한국인들이 출항하자마자 의문의 해양침몰사고를 당해 적게는 5000명에서 많게는 7000명이 숨졌던 사건이다.

영화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계획적인 조선인 학살사건이라는 혐의를 추적한다. 심증도 가고 증언도 있었지만, 반쪽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은 수십년 동안 사건의 희생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이중의 비극인 셈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뿔난 바다>에서 다시 듣는 것은 견디기 힘든 비애다. 1942년 2월, 일본 최대의 해저탄광인 조세이(長生) 탄광이 무너지면서 183명의 광부가 희생되었는데 그 중 조선인이 135명이나 되었다.

우끼시마호 폭침 사건과 비슷한 점은 조세이 탄광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행사마저 뒤늦게, 그것도 민간인들에 의해 열렸다는 것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초침소리

그렇다. <뿔난 바다>는 바로 이 조세이 탄광 이야기다. 그러나 이 책은 65년 전의 역사를 단순히 복원해내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 이 자리에 효과적으로 끌어내 살펴보려고 시도한다. 생존자의 증언이 있고 그들과 같이 사고 현장을 찾아가는 과정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새겨내는지 섬세하게 기록한다. 대를 이어 다음 세대들 속에 역사가 되살아나게 하는 책이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탄광 측에 물으니까 갱도의 버팀목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물이 순식간에 갱도 전체를 채웠다고 합니다. 갱도는 어른의 허리 높이 정도 밖에 안 되었고 몹시 좁았을 뿐 아니라 늘 물이 새어 들어왔지요. …갱도 입구를 틀어막아 버렸기 때문에 갱 안에서 작업을 하던 조선인들은 한 명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지요. - '김경봉 할아버지의 증언' (책 26쪽)

저자인 박예분은 조세이 탄광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소개하는 것으로 첫 장을 연다. 식민치하에서 징용에 끌려갔던 노무자들이 가혹한 노동과 사회적·민족적 핍박에 시달렸을 거라고 짐작은 하지만 이어지는 설도술 할아버지와 백운형 할아버지의 진술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을 정도다. 시시각각 죽음으로 향해 가는 시계 초침소리가 들리는 증언들이다.

"…갱도 안에는 새어 나오는 물이 고인 물웅덩이가 있었는데… 그날따라 물웅덩이를 향해 물이 세차게 흘러들고 있었지요. 그래서 모두들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여 여차하면 탈출하려고 전화통 옆에 붙어 있었습니다. 갱내에 물이 자꾸 차 들어갈 무렵 일본인들은 위험하다고 작업에 들어가지 않았지요. 조선인들은 우리 맘대로 못 했기 때문에 '들어가라'하면 들어가야 했지요." - '백운형 할아버지의 증언' (책 61쪽)

이렇게 해서, 해저탄광이 있던 니시키와 바다는 뿔이 났다. 아직껏 뿔이 난 채 입을 닫고 있다. 해저 10㎞가 넘는 이 탄광에서 탄을 캐던 광부들의 숨구멍이었던 배기구가 여전히 바다 가운데 뿔처럼 솟아있다. 공식적인 추모비 하나 없고 일본은 물론 한국도 바다 밑에 깔린 유해를 수습할 기색도 없이 65년이 흘렀다. 바다가 뿔이 날 수밖에.

뿔처럼 솟아있는 해저 탄광의 배기구 일본 정부에서 보기 싫다고 없애려 했지만 1991년 처음으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세이 탄광 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 저지했다고 한다.
▲ 뿔처럼 솟아있는 해저 탄광의 배기구 일본 정부에서 보기 싫다고 없애려 했지만 1991년 처음으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세이 탄광 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 저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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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년생이 세운 추모비

"조세이 탄광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전주 북일초등학교 3학년 백광일군이 세운 추모비다. 예수가 천국이 아니라 평화가 천국이라고 써 넣었고, 불신이 지옥이 아니라 전쟁이야말로 지옥이라고 써 넣었다.

어른들을 진정 부끄럽게 하는 것은 역사의 온전한 복원이 어린 학생들에 의해 완성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일이다.

신일중학교 3학년 이루강군과 온고을중학교 2학년 박성훈군은 조세이 탄광 참살을 가지고 함부로 민족의 울분을 들먹이지 않는다. 놀랄만한 사유력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어두웠던 역사를 보며 나는 현재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사람이 기피하는 삼디(3D) 업종에서 일을 하며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따뜻한 눈빛과 마음으로 그들을 감싸 안아야 한다." - 이루강 (책 110쪽)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에 피해를 입힌 일이 있다. 그것은 베트남 전쟁 때 우리나라가 미국을 도와 베트남을 공격한 일이다. 그래서 베트남은 굶주림과 경제적 추위에 떨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피해 보상을 원하는 만큼 베트남인들도 우리나라와 미국에게 피해보상을 바라고 있다." - 박성훈 (책 120쪽)

대한민국의 외국인노동자는?... 어른보다 낫네

 백광일 학생이 세운 추모비
 백광일 학생이 세운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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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난 바다>는 생존자의 증언과 작가 박예분의 답사, 그리고 역사를 바라보는 어린 학생들의 시선을 하나의 일관된 시각으로 모아놓아 역사를 입체적으로 재해석하게 해 준다.

전체 분량의 1/3을 차지하는 학생 마흔명의 글에 담긴 느낌과 주장을 읽노라면 저자가 상당히 진지한 수업을 진행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과거의 진실을 캐내는 데에서 한 발 나아가 오늘을 사는 미래 세대의 가슴을 통과하면서 과거가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라 하겠다. 중요한 대목마다 그려진 삽화들은 때로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당시를 증언해 주었다.

다만, 일본 현지의 지도가 책에 실리거나 작가의 현장 답사가 일지식으로 쓰였다면 독자들의 이해를 훨씬 도왔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덧붙이는 글 | <뿔난 바다 - 감추어진 역사의 진실을 찾아 떠나는 아동청소년 역사 논픽션> 박예분 지음 / 정하영 그림 / 청개구리 출판 / 2008년 2월 3일 출간 / 값 1만원

이기사는 필자의 개인 누리집인 www.nongju.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뿔난 바다

박예분 지음, 정하영 그림, 청개구리(2008)


#뿔난 바다#청개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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