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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루체른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의 한 곳인 빙하공원. 그 내부에 암라인의 집(Amrein's House)이 있다. 딱히 역사박물관이 없는 루체른에서 그곳의 역사를 둘러볼 수 있는 역사박물관과 같은 곳이다. 나는 19~20세기에 루체른에서 삶을 살던 마리 암라인(Marie Amrein-Troller's, 1849~1931)의 삶과 그녀의 집, 그리고 루체른의 역사를 따라가 보았다.

 

 

나와 아내, 딸은 정갈하게 정돈된 나무집으로 들어섰다. 목조 가옥, 암라인의 집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스위스 각 지방의 대표적인 가옥들을 모아 놓은 전시관이었다. 집들의 구조보다도 자연에 녹아들어가는 스위스 민가의 자연스러운 색상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알프스 아래 맑은 공기를 벗하며 이런 나무집에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작은 박물관에는 긴 설명문이 없다. 한번 눈으로 보고 바로 이해가 될 수 있도록 미니어처로 만들어진 전시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는 아직 무제크 성벽이 쌓이기 전의 루체른이 조그만 마을로 전시된 미니어처가 있다. 카펠교, 호프교, 성당, 슈프로이어교로 이어진 루체른의 옛 요새는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루체른의 변해가는 모습이 미니어처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알프스의 유명 산들이 미니어처로 전시되어 있었다. 알프스 산을 미니어처로 만들기 시작한 시원이 된 미니어처부터 여러 산의 미니어처가 정교하게 제작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루체른을 엄호해 주듯이 자리를 잡은 필라투스(Pilatus)산. 한국에서 수많은 여행정보를 준비해온 필라투스 산도 박물관 내에 있었다.

 

'여행준비는 철저히 하되, 여행 중의 일정은 언제라도 상황에 맞게 바꾸는 것이 좋다'는 서양 격언에 깊게 공감하는 나는 오늘의 일정에서 준비해 온 필라투스 산을 빼고, 루체른 구시가의 이색 가게와 맛집 여행으로 일정을 바꾸었다. 물론 아내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된 일정 변경이었다. 박물관에서 맞이하는 필라투스 산을 보면서 짙은 아쉬움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알프스의 험준한 산 속에서 발견되는 바위와 광물, 보석들을 넋을 잃고 보다가 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박물관 2층에는 빙하공원을 만든 이들의 집이 보존되어 있다. 인테리어가 전공인 아내의 눈빛이 빛나는 순간이다. 특히 루체른이 자리한 스위스 중동부 가옥들의 내부가 재현되어 있는데, 옷장을 비롯한 가구들은 지금 고전 가구로 사용해도 좋을 정도로 운치가 있다. 고전 가구 중에는 4개의 기둥으로 사면을 장식한 침대와 함께 상감 세공, 모퉁이 장식으로 아름다운 요람이 방금 전에 사용한 것 같이 실감나게 전시 중이다.

 

빙하정원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모이던 회의실에는 빙하정원의 창립자인 암라인 트롤러(J.W. Amrein-Troller, 1842~1881)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회의실이지만 당시의 생활흔적들은 다양하다. 이 방에는 16세기 르네상스 양식의 서랍 달린 찬장, 르네상스 초기의 여행용 가방, 루체른의 전통적인 시대 의상이 있다.

 

집무실의 천장은 스위스의 전통적인 주제를 배경으로 마치 나무 조각품같이 맞물려 있고, 천장에는 스위스 루체른의 스쿨타이센(Schultheissen) 가문의 방패꼴 문장(紋章)이 살아 숨쉬고 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죽은 남편의 뒤를 이어 1881년부터 이 빙하공원을 관리하였던 마리 암라인의 방은 그녀의 마네킹까지 재현되어 전시 중이다. 그녀의 방에는 1820년대의 가구양식인 비더마이어(Biedermeier) 양식의 가구, 바로크 양식의 화장대와 옷장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의 취향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옛 가구로 장식된 목조가옥의 방들에서 나는 마음이 포근함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 박물관 내에서 신영이가 가장 좋아할 곳을 예상하고 있었다. 루체른에 오기 전 루체른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에서 인상적으로 본 곳인데, 암라인의 집을 나오다 보니 박물관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은 박물관의 주제와는 약간 생뚱맞은 '알함브라(Alhambra) 거울의 방'이다. 스페인 그라나다(Granada)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의 이름을 딴 이 작은 테마 방은 90개에 이르는 대형 거울과 미로를 통해 여행자들을 현혹하고 있었다.

 

 

원래 이 테마 시설은 1896년 제네바의 스위스 국립 박람회 때에 선을 보였던 것인데, 1899년에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거울의 방 입구에는 머리에 터번을 쓴 아랍인이 여행자들을 맞고 있고, 그 이후부터 여행자들은 착시의 세계로 들어선다. 알함브라 궁전의 유명한 분수대 모형도 완성된 원형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한 면만이 만들어져 있고, 동일구조가 반복되는 분수대의 나머지 부분은 거울에 비춰진 가짜 모습이다.

 

신영이는 이 미로 속에서 신이 났다. 미로의 복도 속으로 들어섰다. 거울 벽에 몇 번 부딪치더니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뛰어다니며 복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반대쪽에서 오던 외국 여행자들도 키득거리며 헤매고 있다가 서로 마주보면 웃음을 나누었다. 이 미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진한 어린이들이 되어 있었다. 나는 길인 줄 알고 걷다가 거울의 벽에 부딪혔고, 통로를 찾아 헤맸다. 신영이는 다시 입구 쪽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미로의 복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신영이는 착시현상의 세계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거울의 방 외부에도 많은 실험 거울과 함께 한명이 여러 명으로 보이는 거울, 길게 보이는 거울, 작게 보이는 거울 등 몸을 우스꽝스럽게 왜곡하는 거울들이 있었다. 신영이는 거울 앞에서 장난을 치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거울의 마술을 너무 신기하게 생각한 신영이는 결국 거울의 방에 다시 들어가서, 비디오로 미로의 복도를 촬영했다.

 

햇볕이 잘 드는 테라스의 이름은 '여름 테라스'라고 했다. 신영이가 테라스 앞의 가게에서 기념품을 사고 싶어서 떠나지 않는다. 신영이는 무언가를 집어 들었고, 그것은 박물관 바로 옆 암벽에 조각된 빈사의 사자상(Lowendenkmal) 목각기념품이었다. 나는 이 작은 사자 조각상이 우리 집 거실에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박물관을 나서면서 나의 눈앞까지 다가온 사자. 숨을 헐떡이는 듯한 그 사자를 보게 되었다. 빈사의 사자상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은 바로 이 박물관의 언덕 위였다. 나는 빈사의 사자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자연 암벽을 파고 들어가 조각된 사자는 죽음의 안식처 같은 바위 속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길이가 무려 9m에 달하는 이 거대한 사자는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혁명 당시, 파리 튈르리 궁전(Palais des Tuileries)에서 루이 16세(Louis XVI)와 그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Marie-Antoinette)를 보호하려다 혁명군에게 전멸당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을 상징하고 있다. 이 사자상은 1821년 덴마크 출신의 유명한 조각가 토르발드젠(Torwaldzen)에 의해 만들어졌고, 현재는 세계적인 명품 조각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나는 나뭇가지 뒤의 굴속에서 죽어가는 엄청나게 큰 사자를 보면서, 깊은 감흥을 느끼고 있었다. 한낱 바위 덩어리를 어떻게 조각하였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이다지도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일까? 나는 이 엄청난 크기의 조각이 왜 이렇게 마음을 흔드는지 분석해보고 싶었다. 나는 사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등에 꽂힌 창은 방금 부러진 듯이 처참하게 잘려 있고, 이 창은 아마도 사자의 심장을 뚫은 것 같다. 고통스러워하는 사자의 표정은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일 것이다. 사자의 왼쪽 발은 힘없이 절벽 밖으로 늘어져 있고, 오른쪽 발의 날카롭게 드러난 발톱은 방패를 움켜쥐고 있다. 이마와 미간은 찡그리고 있고, 눈빛은 힘을 잃었으며, 입은 약간 벌린 채 헐떡거리고 있다. 사자의 슬픈 듯하면서도 고통스러움이 역력한 표정은 이러한 사자의 세심한 묘사가 합쳐져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사자의 실감난 표정에는 스위스 용병의 신화가 담겨 있다. 외국에 나가 힘든 생활을 하던 스위스 용병을 상징하기 위한 이유만으로 이렇게 사자상이 바위에 남겨진 것은 아니다. 이 사자는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 스위스 용병들의 아름다운 미덕을 간직하고 있다. 이 스위스 용병들은 목숨을 바치는 용기를 보여줬기에 찬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군도 이들에게 투항하거나 몸을 피할 것을 권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자로 상징되는 스위스 용병들은 충분히 몸을 피할 시간이 있었는데도, 자신들을 고용한 프랑스의 루이 16세를 위해 혁명군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목숨을 잃었다. 이 스위스 용병들은 목숨을 버리고 스위스 용병들의 신의를 지킨 것이다. 그들은 결국 목숨을 건 전투를 치르며 하나 둘씩 죽어갔다.

 

사자는 스위스를 상징하는 방패를 머리 앞에 두고 죽어가고 있고, 방패에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문장인 흰 백합이 조각되어 있다. 사자는 부르봉 왕가를 사수하며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역사적 사건은 스위스인들의 신뢰성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 후 스위스인들에 대한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스위스 용병들의 신뢰와 충성심은 결국 가난한 산악국가였던 스위스가 국가발전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고, 목숨을 담보로 용병을 수출했던 나라는 이제 다양한 산업이 균형 있게 발전한 선진국이 되었다.

 

 

사자의 좌절과 절망은 나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감동을 선사했다. 사자상의 전면을 지나 공원을 나오면서, 다시 한 번 사자상을 바라보았다. 푸른 연못을 사이에 두고, 암벽 속 사자는 더욱 신비하게 보이고 있었다. 루체른 구시가를 향하면서도 슬픈 사자의 표정은 내내 내 머리 속에 남았다. 나는 위대한 조각 작품 하나가 이토록 많은 역사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루체른#암라인 하우스#빈사의 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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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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