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4·3 연구가인 이도영 박사가 발굴한 1950년 7월 자행된 대전 대학살을 미 국무장관이 나서 부인하도록 지시한 전보통신문은 한국전쟁 전후에 있었던 남한 정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미국 정부가 은폐하려 했다는 점에서 파문이 예상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미국 정부의 대전 산내학살을 은폐하려 한 것으로 보이는 자료가 확인됐다.
<오마이뉴스>는 최근 1953년 당시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유엔총회에 제출한 보고서를 확인했다. 이 보고서는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이 어떠한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애초 유엔총회에서 클라크 사령관이 연설을 하려 했던 것이나 좌절되자 같은 내용을 롯지 미 유엔대사를 통해 유엔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클라크 사령관은 보고문을 통해 공산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의 대표적 사례로 1950년 9월 20일과 9월 26일경에 있었던 대전형무소 집단학살사건을 예시했다. 그는 보고문에서 "대전에서 자행된 대량학살은 공산당 만행사에 길이 잊히지 않을 역사적 비극이었다"며 "한국 포로 등 5000명이 정치적 방편 때문에 학살됐다"고 밝혔다.
클라크 사령관은 9월 20일 1차 학살과 관련 "공산주의자들은 대전형무소 수감자들을 감방에서 끌어내 손을 등 뒤로 묶고 결박한 후 예정된 학살 장소로 수송한 후 기다란 고랑에 처넣고 사정없이 사살했다"며 "또 생존자가 있는지 조사한 후 발견되면 머리를 깨뜨렸다"고 폭로했다. 이어 "흙을 덮어 집단 매장했는데 이 흙이 조급하게 덮여져 피로 물든 자리를 즉시 판별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대전형무소 학살 예로 들며 '인민군' 관련 건만 언급 그는 9월 26일 2차 학살에 대해서는 "공산당 내무서원들이 철수 이전에 학살을 끝내기 위해 더욱 서둘렀다"며 "내무서 구내에 구덩이를 파고 살육하거나 천주교 교회 내, 우물 속으로 던져버린 시체도 부지기수"라고 강조했다.
공산주의자에 의한 대전형무소 수감자 9월 학살사건은 1950년 7월 초 남한 정부의 군경에 의해 자행된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 및 민간인 수천여 명을 집단학살한 사건에 대한 보복살인을 지칭한 것이다.
하지만 클라크 사령관은 남한 정부 및 미군의 방조 하에 이루어진 7월 대학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미국이 한국전쟁 전후 일어난 남한 정부에 의한 대규모 집단학살 사건은 물론 성격이 다른 두 개의 대전형무소 집단학살을 잘 알면서도 이를 제외시킨 것이어서 은폐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9월 20일 1차 학살이 있었다고 언급한 것은 7월 초 남한 정부에 의해 자행된 집단학살을 인민군에 의한 것으로 왜곡시키려 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한다.
1950년 당시 인민군에 의해 체포돼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생존한 이갑산씨는 증언을 통해 "(인민군에 의해) 학살이 시작된 것은 음력 8월 16일(양력 9월 27일)부터"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클라크 사령관이 밝힌 9월 20일 1차 학살은 아직까지 공식 확인된 바 없다.
군경에 의한 산내학살, 공산주의자 학살로 끼워넣기? 반면 "예정된 학살 장소에 수송한 후 기다란 고랑에서 사살…" 등은 7월 초 한국 군경에 의해 자행된 산내학살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인민군에 의해 대전형무소에서 희생된 사람의 경우 1952년까지 수습한 유해는 1557위였다. 현재까지도 당시 희생자 명부는 1500명대이다. 하지만 클라크 사령관은 당시 희생자를 5000명으로 못 박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측이 유엔총회에서 공산당주의자들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국 군경에 의해 자행된 집단학살사건까지 끼워 넣기 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갖게 한다.
대전형무소는 한국전쟁 당시 비극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좌익 정치범 및 보도연맹원 등 수천여 명이 군경에 의해 집단학살된 후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어 같은 해 9월에는 대전을 점령한 인민군이 퇴각하기에 앞서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우익 정치범 등 수천 명을 7월 집단학살에 대한 보복차원으로 집단 학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