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서히 땅 속으로 가라 앉고 있는 살점과 뼈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냄새는 목구멍까지 스며 들어와 그 후 며칠 동안이나 그 냄새를 느껴야 했다. 커다란 죽음의 구덩이를 따라 창백한 손, 발, 무릎, 팔꿈치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 총알에 맞아 깨진 머리들이 땅 위로 삐죽이 드러나 있었다…."
소설속의 한 대목이 아니다. 1950년, 군경에 의해 대전 산내 학살이 끝난 직후 현장을 방문한 당시 외신기자가 전하는 목격담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이다. 광기만이 가득했을 대전 땅, 하얗게 질렸을 골령골 계곡과 그 하늘이 소름 끼치게 다가온다.
이같은 증언은 당시 총살집행 책임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한 변홍명씨의 증언에서도 나온 바 있다.
"...주위는 온통 피 반, 흙 반이었습니다. 아무리 흙을 덮어도 발이 툭툭 불거져 나와요. 그 위에 자꾸 흙을 덮었습니다."(증언으로 재현한 대전 골령골 학살 사건, 월간 말 2000년 2월호)
앨런 위닝턴 기자(영국 일간신문 <데일러 워커>)의 증언은 계속된다.
"인근 지역 농부들이 강제로 끌려와 구덩이를 팠는데 그들로부터 나는 진실을 알 수 있었다"
"6개의 구덩이는 모두 6피트(2m)의 깊이다. 세로는 6피트(2m)에서 12피트(4m)에 이르렀다. 구덩이의 길이는 가장 긴 것이 200야드(200m)였고 두 개가 100야드(약 100m), 가장 짧은 것이 30야드(약 30m)였다"
100m-200m의 끝도 잘 보이지 않게 늘어진 깊게 파여진 죽음의 구덩이.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처진다.
하지만 이같은 증언은 당시 현장학살 책임자중 한 사람이었던 변홍명씨의 증언(92년 2월 월간 '말')과도 일치한다. 그나마 위닝턴 기자가 목격했던 곳은 지금의 1.2학살지에 관한 증언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위닝턴 기자는 1.2학살지로부터 500여m 떨어진 계곡에 위치한 3학살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증언은 이어진다.
"7월 4일, 5일, 6일 형무소와 대전 부근의 집합소에 모여 있던 정치범들이 트럭에 실려 이 계곡으로 끌려왔다. 그들은 밧줄에 묶인 채 두들겨 맞아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트럭에는 사람들이 정어리처럼 위로 빼곡이 쌓여 있었다"
정어리처럼 얹어진 사람들. 92년 변홍명씨는 "굴비..." 또는 "배추포기처럼 포개 실려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위닝턴 기자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그렇게 한 트럭씩 계곡으로 끌려와 총에 맞아 구덩이로 떨어졌다. 그러면 인부(농부)들이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위닝턴 기자의 다음 기록은 특별히 새겨들을 만하다.
"그리고 10일 동안 다른 지역의 정치범들이 비어 있는 감옥으로 집중적으로 옮겨 왔고 인부들은 또 땅을 파러 갔다"
대전형무소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정치범들이 대전형무소로 끌려들어 왔다는 얘기다. 이같은 증언은 "50년 7월 초 청주교도소 수감자들이 밧줄에 묶여 수백명이 대전으로 끌려 걸어가는 장면을 똑똑히 봤다"는 당시 목격자의 증언(오마이뉴스 2000.5.27)과도 일치한다.
도대체 어느 형무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몇 명이나 이곳으로 끌려와 묻혀 있는 것일까?
이어지는 위닝턴 기자가 전하는 상황은 너무도 비관적이다.
"대전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수많은 '정치범들'이 그 근처에서 학살당했다는 얘기를 계속 들었다. 어떤 이는 3천명, 어떤 이는 4천 명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사실은 소문보다 더욱 나빴다…. 길 옆에는 7천여명이 넘는 남녀 시체가 얇은 흙으로 대충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바람과는 달리 학살자 수가 7천여명까지 늘어나 버렸단 말인가. 위닝턴 기자의 구체적인 기록은 다시 한번 전율하게 한다.
"7월 16일 인민군이 미군의 금강전선을 돌파하자 7월 17일 새벽, 남아 있는 정치범들에 대한 학살이 (또 다시) 시작됐다. 이날 무수한 여자들을 포함해 적어도 각각 100명씩 37대 트럭분, 3700여명이 죽었다."
즉 7월 초순경 대규모 학살에 이어 7월 17일 산내 골령골 대학살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새삼스러운 증언은 아니다. 이미 변홍명씨 등에 의해 학살이 7월 중순께까지 이어졌다는 여러 증언들이 나왔었다. 하지만 7월 초순에 이어 7월 17일경 4천명에 육박하는 2차 학살이 벌어졌다는 증언은 새롭고 충격적이다.
한 장소에서 보름도 안되는 기간 동안 7천여명의 학살…. 그러고서도 학살극을 벌였던 사람들은 모르는 척 방치하고 이념의 색깔을 입히다 보면 세월에 묻혀 없었던 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그래서 처참한 시신에 덮을 흙마저 아껴 세상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고자 했던 것일까.
위닝턴 기자는 당시 아무렇게나 묻혀 있던 시쳇더미를 본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예전에 벨젠(Belsen)이나 부쉔발트(Buchenbald)의 나치 살인수용소에 관한 글을 읽으며 그곳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본적이 있다. 그때의 내 상상이 어처구니 없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위닝턴 기자는 이같은 살인극이 "미군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단언했다. 위닝턴 기자는 이어 "미군 장교들이 한국군 장교들과 매일 지프차를 타고 와서 학살을 감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기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땅에 버려진 빈 담배 갑들과 놓여 있는 수천 개의 탄약통들은 모두 미제였다. 나는 한 웅큼의 M-1과 카빈 탄약통을 주웠는데 지금도 가지고 있다."
1950년 대전 골령골 학살 현장에서 나뒹구는 시체더미와 미국산 빈 담배갑을 보며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고 외친 위닝턴 기자.
그후 반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당시 학살현장에서 쓰레기처럼 나뒹구는 유골더미를 접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말할 수 있는가? 골령골에서 본 우리 시대의 진실을.
골령골 수천여명의 원혼들만이 쪼개진 육신의 흔적을 드러내 보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 | | "3천 원혼 달래 왔는데 7천명이라니.." | | | 세 번째 위령제(오는 8일) 준비하는 산내 유가족들 | | | |
| | | ▲ 위닝턴 기자가 함께 기고한 50년 당시 산내 학살 직후 현장사진 | | 7백여명(당시 대전형무소 경비대원), 다시 1천8백여명(미국립문서보관소 기록), 또 다시 최소 3천여명(시민진상규명회 자체조사 결과), 이번엔 7천여명(영국 앨런 원닝턴 기자 증언록과 당시 북한 종군신문 보도)...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사건에 대한 추정 희생자 수가 최근 3년간 변해온 이력이다. 처음 7백여명에서 시작된 희생자 수가 3년 사이에 10배인 7천여명으로 늘어난 것.
희생자 수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학살이 자행된 기간도 처음 2-3일에서 10일, 다시 최소 15일 이상으로 늘어났다.
안타깝게도 이중 7천여명이 학살(학살 기간 최소 15일 이상) 됐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과 신빙성이 크다는 점이다.
때문에 또 다시 기일을 맞은 산내 유가족들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대전 산내 유가족모임의 송영길 대표는 오는 8일 열릴 '산내 위령제,(3회)를 준비하며 몇 번씩 "작년까지만 해도 3천 원혼을 달래 왔는데 7천명이라니...이 작은 골짜기 전체가 죽음의 구덩이 였다는 것 아니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유가족들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은 위닝턴 기자가 찍은 흙 위로 '툭툭' 불거져 나와 있는 희생자들의 처참한 시체 사진이다. 학살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행해 졌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데다 땅위로 '툭툭' 유골이 불거져 나오는 지금이 상황을 보는 듯하기 때문이다.
유가족 중 한 사람인 성보경 씨는 "흙 위로 시체가 불거져 나오는 50년 학살 당시 상황과 도처에 유골이 쓰레기 처럼 널려 있는 지금과 무엇이 다르냐"며 "가슴이 쓰리다 못해 아리다"고 말했다.
골령골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을 벌이고 있는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관계자는 "사건이 공론화 된지 3년동안 추정 피학살자 수가 7천명으로 늘어난 반면 사건을 대하는 정부태도는 그대로"라고 말했다.
실제 지난 해 말 학살 현장 한 가운데에서 버젓이 건축공사가 진행돼 적잖은 유골이 훼손됐고 골짜기 이곳저곳에선 여전히 유골이 나뒹굴고 있다.
유가족들은 국회에 상정돼 있는 전쟁전후 희생된 사람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통합특별법안에 위안을 삼으며 위령제를 준비하고 있다.
<제 3회 산내 희생자 위령제 7월 8일 오전 10시, 골령골 현장/문의 042-253-8176>
/ 심규상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