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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꽃향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풀향기도 있다. 달콤하고 아쌀한 것이 꽃향기라면 풀향기는 풋풋하다. 꽃향기가 자기를 그러내도 당당할 만큼의 자신감이라면 풀향기는 별로 드러낼 것이 없어 자기를 감추는 수줍음이다.

 

밤이 지나고 꽃들이 꽃잎을 닫고 일어날 준비를 하며 꽃향기를 제 몸에 품고 있을 때, 아직도 풀잎마다 이슬이 맺혀 있을 때, 풀향기는 대지와 입맞춤하며, 흙내음 같기도 한 풀향기를 잔잔하게 내어놓는다.

 

싱그럽다. 햇볕이 한껏 무르익은 한낮이면 풀향기는 허공으로 흩어지지만, 비가 오는 날이나 햇볕이 설익은 날이면 자기들끼리 대지를 꼭 껴안고 오래 머무른다. 이런 날이면 꽃들도 풀향기를 위해 꽃을 열지 않는다. 한 번 피어나면 다시 문을 닫을 수 없는 꽃은 고개를 숙여 대지를 맴도는 풀향기에 더해져 들풀향기를 만들어간다.

 

고창 청보리 축제현장에서 청보리밭이 푸른 하늘과 맞닿아있다.
고창 청보리 축제현장에서청보리밭이 푸른 하늘과 맞닿아있다. ⓒ 김민수

 

청보리밭에 서자 누군가 부는 보리피리 소리와 풋풋한 풀향기, 보리내음이 하늘과 맞닿은 녹색바다의 끝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귓불을 애무하듯, 코끝을 스치며 지나간다.

 

지난 3일, 먼 이국땅에서 갑작스런 이별소식을 전해 온 친구가 생각났다. 함평 양지바른 선산에 그의 유골을 묻고 돌아오던 날, 피어났던 봄꽃들이 피웠던 꽃을 봄바람에 하나 둘 놓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가 싶더니만 어느새 꽃눈이 되어 내리고 있다. 오늘 이 세상과 이별하는 사람들도 저 떨어지는 꽃처럼 많을 것만 같아 마음이 저며 온다. 남아있는 꽃들은 떨어진 꽃들에게 감사해야 하듯 남아있는 사람들도 먼저 간 이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먼저 떨어진 꽃이 있어 남은 꽃이 실한 열매를 맺듯이 먼저 간 이들이 있어 남은 우리들이 삶에 대해 겸손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만 눈으로는 청보리때가 제일 예쁘단다. 그 예쁜 날 지나 누렇게 익으면 보릿고개 넘어가는 이들의 고픈 배를 맘껏 채워주고, 오랜만의 포식에 방귀를 ‘붕붕’ 뀌며 ‘누구 방귀 소리가 더 큰가?’ 실컷 웃으며, 방귀 냄새조차 음미했을 것이다.

 

풀향기 가득한 청보리밭, 그곳에서 보리피리 만들어 불며 입안 가득히 맴도는 풀향기에 취해 보리밟기하며 보릿고개 무사히 넘기길 기원하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이제 누가 청보리를 보면서 보리피리를 떠올릴까?

 

청보리밭은 녹색바다, 청한 하늘과 맞닿아 작은 바람에도 출렁거리며 몸을 비벼 풀향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 청보리#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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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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