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다된 시간인데 제주시청 인근에 있는 모 음식점에서 세 '비바리'(젊은 여인을 칭하는 제주방언)가 귀가를 미룬 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이가 서로 달라 보이는데, 오가는 말이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는 듯 했다.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되었는지 물었더니 일주일 정도 알고 지낸 사이도 있었고, 초면인 사이도 있었다.
시간을 잊은 채 세 여성은 대화를 이어가고세 여성은 다음(DAUM)카페 '이명박탄핵투쟁연대' 소속 회원들이다. 24일(토) 저녁에 제주시청 어울림마당에서 열렸던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후 2차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술기운이 어느 정도 돌았는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대화 내용은 시종일관 현 정부의 그릇된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다만 일상 집회나 모임에서 들리던 내용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여성이나 주부의 입장에서 바라본 문제점들이 화제의 주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자리에 끼었을 때 강은실(ID 이제한판, 30세)씨가 반갑게 맞았다. 강씨는 '남북공동선언제주실천연대' 소속 시민운동가다. 강씨는 이명박탄핵투쟁연대 회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시민운동 차원이 아니라 개인 자격이라고 했다.
"시민운동을 포함하는 진보진영은 스스로 무기력증을 보여줬습니다. 이명박탄핵카페가 생기고, 여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올 때까지 그들은 무었을 했습니까? 지금도 제주도내에서 70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광우병쇠고기대책위를 구성했다고 하는데, 실제 하는 일이 거의 없잖아요. 진정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야 합니다."
"시민운동가, 진보진영, 언론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할 때"그럼에도 강씨가 시민운동에서 얻은 노하우는 탄핵카페 회원들이 촛불문화제를 준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산이다. 문화제 일정을 언론기관에 보도자료로 브리핑하는 일이나 문화제에 함께할 공연단체를 섭외하는 일이 실무경험이 전무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언론도 문제가 많아요. 지금까지 총 네 차례의 촛불문화제가 열렸는데, 비가 내린 오늘 행사를 제외하고는 횟수가 거듭 할수록 시민참여가 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언론들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관심을 줄이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냄비근성'을 비판하던 언론이 실제로는 냄비근성을 조장한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강씨가 이명박 정부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복지예산을 감축한 것이 큰 문제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이 위협을 당할 겁니다. 이대로 가면 이명박 정부는 국민들의 광범위한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우병 쇠고기는 현 정부의 실정 중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촛불문화제는 저항의 완결판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합니다.""주부가 무서워서 애를 낳지 못하는 사회"내가 강씨와 인터뷰하는 동안 홍지혜(미슈타르, 31세)씨는 옆에서 여전히 토론에 집중하고 있었다. 홍씨는 결혼 2년차 주부이며 학원에서 중학생들에게 사회 과목을 가르치는 강사다. 홍씨의 남편도 학원강사인데, 아직 자녀는 낳지 않았다.
"저는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었어요. 2004년 탄핵정국 때도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촛불문화제에 참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당시와 다른 심정입니다. 결혼해서 양가 집안에서 애를 낳으라고 압박을 가해와도 대책이 없어서 애를 낳을 수가 없어요."
홍씨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 중 '의료보험민영화와 당연지정제 폐지'를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돈이 없으면 민영보험에 가입할 수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결국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해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물음에 답할 때 정부의 정책을 열거하는 수준을 보면 "그간 정치에 무관심했었다"는 말이 무색하게 들렸다.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강사라서 그런 것일까?
"이명박탄핵연대 카페에 가입한 후 한 달 간 저도 모르게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여자가 한 달 만에 당당한 시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정부의 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촛불집회에 참여하기를 망설이는 주부들에게 함께 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주부들이 나서야 우리 가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자리에 참석한 세 여성 중 막내인 부성희(ID I love me, 28세)씨는 대학에서 조교로 일하고 있으며 아직 미혼이다.
"국가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보호해야"지난 대선 정국 당시 공약을 발표할 때 나라 말아먹을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거에서 당선된 후 인수위시절 보여준 이명박 당선자와 인수위원들의 행보를 보면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했다.
"인수위 시절 발표한 정책을 보면 서민들을 배려하는 내용이 단 한 가지도 없었습니다. 영어몰입교육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결국 영어 과외열풍을 일으켜 경제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을 교육에서 탈락시키겠다는 의도로 밖에 볼 수가 없었어요.당선이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장애인 무상교육예산을 삭감하겠다는 겁니다. 장애아 교육 문제는 비단 장애아 개인의 불편 문제가 아니라 그 가정의 빈곤의 문제와 겹쳐져서 나타납니다. 부모 중 장애아를 뒷바라지하는 사람은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없잖아요. 결국 그 가정의 빈곤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국가는 이런 국민을 보호해야하는데, 그들에게서 지푸라기 같은 희망마저도 뺏어가려 하잖아요."소위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며 취업에 목숨을 걸고 있다는 20대 젊은이들을 향해서도 부씨의 시각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언론은 지금 20대들이 취업난을 겪고 있기 때문에 사회 참여를 유보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촛불문화제를 진행하는 같은 시간에 이 일대 시청 골목 술집에는 학생들이 넘쳐납니다. 취업난을 겪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만 젊은 지성인으로서 최소한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후배 중고생들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죠."
"자유로운 소통, 모임이 행복하게 만들어"취재를 진행하다보니 새벽이 되었는데도 이들의 대화는 끝날 줄을 몰랐다. 이렇게 모여 있으니 뭐가 좋은지 물었다.
"집에서나 직장에서 내 생각을 얘기해도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이 모임에서는 직접 만나든지 온라인 게시판을 이용한다든지 해서 내 생각을 말하면 다 관심을 갖고 들어주는 거예요. 저는 온라인카페에 가입한 적은 있어도 카페를 통해 오프에서 모임을 가져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모임에 함께 참여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홍지혜씨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꼭 전하고 싶은 얘기를 구호로 담았다며 건배를 제안했다.
"MB야!! 애 좀 낳자!!" 홍씨의 외침을 나머지 회원들이 따라하면서 자리를 정리했다. 새벽 3시가 가까운 시간이다.
붙이는 말'이명박탄핵투쟁연대'에서 5월 24일(토) 오후 4시에 제주시 관덕정에서 열기로했던 집회는 비로 인해 무산되었다. 대신 저녁 7시 30분부터 예정되었던 촛불문화제는 예정대로 강행했다. 비가 오면 천막을 치고서라도 문화제를 열려고 했는데, 다행히 저녁이 되자 비는 멎었다.노는 토요일인데다 비까지 내려서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시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략 인원을 세보니 평상시의 절반 정도다. 그래도 행사를 위해 율동과 노래 등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