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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매일같이 촛불문화제 현장으로 나가는 08학번 새내기들에게 민망한 말이지만 나는 한 번도 제대로 광장에 나가지 않았다. 어제(29일)도 그랬다. 늦게까지 학교에서 신문을 뒤적이다가 집에 가려고 오른 버스. 하루의 피곤함을 쪽잠으로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야구중계를 듣다가 내가 좋아하는 KIA 타이거즈가 상대팀 타자에게 만루홈런을 맞았다는 소리에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세종문화회관 앞. 기사 아저씨는 다급하게 앞선 버스 기사와 통화를 했다. 아무래도 촛불문화제의 여파인 듯하다.

 

어차피 요새 광화문이 막히는 것은 알고 있었고 직접 참가도 하지 않는 처지에 차 막힌다고 투정 부리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 같아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뭐? 차가 막혀서 돌아간다고?"

 

 

기사 아저씨의 대화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차가 정상적으로 집에 가는 것은 불가능한 듯. 그냥 차에서 내렸다. '5호선을 타고 돌아갈까?' '후배들을 찾아서 만나볼까?'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발길은 촛불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전경들이 급히 움직이는 곳을 따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서울광장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며 행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동아일보 앞에서 야유도 보내고("조중동은 찌라시, (동아일보) 불꺼라, 전깃세가 아깝다" 등) 민주노동당 단식 현장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강달프' 강기갑 의원을 만나 인사도 했다.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의원들은 인사로 답례했다.

 

걸어걸어 세종로 사거리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더 몰려온다. 하지만 이미 전경버스(속칭 기대마機隊馬, 닭장차)로 봉쇄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그 앞에 몰려 '고시철회, 협상무효' 등의 구호를 부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해서일까? 방송차량에 앉아서 집회를 진행하려고 해도 버스와 전경이 대치한 곳에서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인도에서는 사람과 전경이, 차도에서는 사람과 버스가 대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차에 각종 구호가 적힌 종이와 스티커를 붙였는데, 차에 태극기까지 매어놓은 사람도 있었다. 그 순간 쉬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차에다 래커를 뿌리나 하는 생각에 달려가보니 어떤 사람이 타이어의 바람을 빼놓은 것이었다.

 

현역이나 예비역이나 서로 처지를 이해해야지

 

 

순간 타이어에서 나오는 공기의 냄새를 맡으니 갑자기 군대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나는 강원도 전방의 모 사단에서 유조차를 몰았다. 운전병이라면 알 것이다. 타이어 교환을 위해 바람을 뺄 때 나는 그 썩은 오징어 냄새. 짓궂은 선임들은 이 냄새를 두고 외설적인 표현을 하곤 했다.

 

사람들은 몰려들어 구경하고 사진찍고 난리도 아닌데, 순간 이 버스 운전병 생각이 났다.

이거 다시 돌아가려면 골치 아프겠는걸... 버스 밑을 보니 타이어 공기 주입구의 부품들이 굴러다닌다. 이걸 가지고 다시 구멍을 막아두려다 괜한 짓 같아 뒤에서 방패를 들고 있는 전경에게 부품을 건네주었다.

 

차를 둘러보니 이미 차량은 방해물이 아니라 거대한 게시판, 혹은 낙서장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만약에 사람들이 더 흥분했다면 차를 부수거나 했겠지만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경찰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정권의 개가 아니다!"

"경찰은 이명박 경호원인가!"

"명박이 머릿속엔 공기만 들었대요"

 

사람들이 펜이나 보드마카, 동전까지 이용해서 자신의 의견을 풀어내고 있었다. 가방에 유성매직을 가지고 다니는 나도 그 대열에 동참할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비록 생활했던 장소도 다르고 안면도 없지만 항상 밤늦게까지 대형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의 비애를 공감하면서. 대신 차에다 쪽지 한 장을 남겨주었다.

 

1127호 경찰버스 운전병에게 남긴 편지 한 장

 

 

1127호 운전병에게

 

형이 차에다 낙서하려다가 '도색 새로 할' 너를 생각해서 쪽지 남긴다.

사람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마. 그래도 형이 니 친구한테 타이어 밸브코어랑 캡

챙겨줬으니 바람 다시 넣긴 쉬울거다. 수고해

 

예비역 수송중대 병장이. ㅋㅋ

 

그런데 그냥 불쌍한 마음에 남긴 쪽지 한 장이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 군대를 갔다오거나 차에 대해서 알만한 사람은 글을 보며 껄껄 웃었고 사진기를 든 사람들은 연신 셔터를 눌렀다. 나는 그 옆에서 같이 구경하는 척 사람들의 반응을 구경하는 것이 더 재밌었다. 심지어 "작가들이 이런 기쁨에 글을 쓰나?" 하는 불경한 생각까지 하면서.

 

집회 현장을 생중계하던 진중권 교수가 직접 앞에 와서 그 글을 읽어주기까지 하다니 참으로 영광이었다. 다만 "아 공기를 빼놓고 이런 글을 남겼나 보군요" 란 말은 빼고. 사람들에게 내가 바람을 뺀 것처럼 보일까봐 진 교수에게 아니라고 설명을 했더니 정정보도까지 해주었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와 집에서 자고 일어나보니 한 경제지의 인터넷 판엔 "예비역 촛불이 현역전경에게 남긴 쪽지 '눈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까지 올라왔다. 그냥 웃자고 한 일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니 기분이 좋았다.

 

즐거운 시민들과 웃기는 경찰

 

 

촛불의 광장은 말 그대로 문화의 장이었다. 비록 상황이 나빠지면서 일부에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결코 폭력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경들의 방패 앞에 나온 나이먹은 경찰 직원들과 대화를 하며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공안정부의 대응은 정말 저질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인도를 막아놓자 모여든 사람들이 무슨 근거로 인도를 막냐고 물었다. 지리한 말싸움 끝에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경찰이 한 마디를 하니 사람들이 코웃음 쳤다.

 

"다중이 모이면 집시법에 해당되기 때문에 막는 것입니다. 이게 이윱니다."

"웃기고 앉아있네. 그럼 야구장에서 야구를 봐도 집회냐?"


#촛불집회#닭장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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