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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작은 꽃 하나가 이 세상을 떠받치는 넉넉한 힘인 것을 자신들은 알고 있을까요?
▲ 개불알꽃 이렇게 작은 꽃 하나가 이 세상을 떠받치는 넉넉한 힘인 것을 자신들은 알고 있을까요?
ⓒ 장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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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학교에 오지 않은 A를 버스터미널 근처에 가서 데려왔다.
학교에 오기 싫어 서울로 가려고 했단다. A는 우리 반의 꼴찌인데, 가출 직전에 붙잡힌 셈이다. A의 친구인 B를 자동차에 태우고 계속 문자와 통화를 하게 하면서 A가 있을 장소를 확인했다.

터미널 앞 빕스 주차장에 차를 넣어놓고 B가 A를 찾으러 가는 동안, 나는 버스정류장 사람들 속에 몸을 숨긴 채 기다렸다.

한참 후 두 아이가 함께 모습을 드러내자,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울컥 눈언저리가 뜨거워졌다. 나도 모르게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A에게 다가가 꼭 껴안아주었을 뿐이다. 미안하고 겸연쩍어 하는 A의 표정을 모른 척했다. 어쩌면 A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아이를 차에 태우고 오면서 끔찍한 구설수에 시달리는 B의 이야기를 알게 됐다. 하지만 아이의 이야기를 들을 여유도 없이 오전 수업 세 시간에, 수업이 빈 시간은 A와의 상담과 학부모와 연이은 통화로 오전이 다 가버렸다.

오후에는, 구설수에 시달리는 B의 이야기를 해결해야 했다. 아침에 친구를 데려오는데 도움을 준 아이 B는 노는 축에 드는 아이였다. 그것도 제법 우두머리에 드는 아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였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에 직면해 있으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상황 판단에 들어갔다. 추적한 지 얼마 안 되어 곧 소문의 근원지를 포착할 수 있었다. 공부를 제법 하는 아이들 축에서 유포한 소문이었다. 가만 보니 노는 아이와 공부하는 아이들의 대결 양상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소문은 소문에 불과할 뿐, 사실은 없다. 여학생의 신상과 관련된 끔찍한 소문이 아닌가. 피해자가 된 B의 얼굴이 어둡고 무거웠다. 나는 B의 손을 잡았다. 힘주어 잡은 손에서 아이의 떨림이 전해져 왔다.

진원지로 지목된 C를 데려다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참만에야 C는 눈물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B에게 직접 사과를 할 수 있겠냐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B를 데려와 대면케 해주었다. 두 사람만의 시간을 위해 내가 자리를 피해 있는 동안, 다행히 서로 화해가 되었다. 두 아이의 표정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피해자인 B가 너그럽게 받아들여주는 게 고마웠다. 선생에게 야단맞는 아이들, 친구들도 얕보고 이러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뜨끔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교실 아이들의 동요를 수습하는 일이었다. 학급 아이들에게 양쪽 입장을 고려한, 그러나 단호한 차원의 지도는 필요했다. 악의적으로 유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근거 없는 사실의 유포, 사생활 침해의 해악에 대해 역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법은 역시 역지사지의 자세에 둘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들에게 자리를 피하게 한 후, 교실로 들어가 아이들에게 훈화를 마치고 나니 밤 9시였다.

퇴근하면서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주었다. 두 아이 모두 똑같이 다독여야 했다.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나이다. 이런 아이들을 수용해야 하는 것은 담임의 몫 아닌가. 사실, 자책이나 정리되지 못한 감정의 앙금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까 두렵기도 했다. 이틀만에 소문은 진압된 셈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다리가 휘청거리는 통에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문자가 왔다. B였다.

<선생님 오늘선생님덕분에큰힘을얻었어요진짜감사하구요낼부터는다시힘낼게요.^^>

즉각 답장을 보냈다.

<그래,고맙다.요녀석아~환한얼굴로내일보자다잊고편히쉬어♡♥>
<네!! 낼부터 선생님의 엔돌핀이 될게요.♥_♥>

고맙기는 짜아식, 내가 더 고맙구만.^^

*

집을 나서 촛불 집회에 나갔다. 그래도 6, 10 항쟁의 날이 아닌가. 미약한 촛불 하나 더 보태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람들 속에 촛불을 들고 끼어 앉았는데, 온몸의 힘이 다 풀려 도무지 남의 나라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요며칠 계속되는 감기 기운에 어지럼증이 더해진 탓이었다. 집회 내용이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없이 촛불만 흔들어대다가 11시경 집으로 돌아왔다.

밤 12시가 다된 시각에 문자가 세 통이나 연이어 들어왔다. 아침에 가출하려던 A가 아닌가. 요 미운 녀석!

<선생님~~♥저00에요오늘철없이굴어서속상하게해드린거죄송해요ㅜ오늘00랑둘다뒤숭숭>
<해서00가밥해줘서먹구왓어요ㅜ그리구선생님이저글쓰는거봐주신다고해서제대로주제잡>
<고글쓰려고요~~그때쓴거는너무대충써서요..내일뵈요♥죄송해요>

바로 답장을 썼다.

<그래,힘든하루였다.녀석아.편히쉬고낼보자.잘자♥>

얼마나 미운 정, 고운 정이 더 들어야 이 녀석들과 헤어지게 될까.
그나저나 이틀 뒤 모의고사, 물 건너 간 것은 아닌지...
소설 같은 하루였다. 

 *

아침 조회를 마치고 나오면서 D를 불러냈다. 지난 번 복도에서 큰소리로 나에게 대들던 놈이었다. D는 아침 자습 시간에 또 친구 거 e-북을 보고 있다가 내게 뺐겼다.

나는 D에게 e-북을 보고 있었다니 돌려줄 마음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D는 친구 거 e-북을 돌려받는 대신, 기꺼이 자신의 mp3를  내놓았다. 밝은 얼굴이었다.

뒤돌아서자 D가 나를 불렀다. 주뼛주뼛한 모습으로 한참을 망설이더니 D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아침에 걸려서 죄송해요. 친구들과 잘해보자고 약속했는데... 걸려서"
"......"
"선생님이 너무 고맙대요. 감싸줘서요..."

아이는 뒤돌아서 도망치듯 뛰어갔다.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자니 스멀스멀 웃음이 배어나왔다.
이제 나는 노는 아이들 편이 된 건가. 한 통속이란 말이지. ㅎㅎㅎ

몸이 날아갈 듯 가볍게 느껴졌다.
오늘은 날씨가 맑을까.


태그:#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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