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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 일찍 행군 출발해야 하니까 오늘은 모두 행군 떠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푹 자기 바란다."

 

훈육장교의 지시가 끝나자 동기들은 각자 행군 준비를 위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일주일동안 입을 속옷과 여벌의 군복, 양발, 모포, 세면도구, 약간의 먹을거리, 플래시 등등 행군 준비가 아닌 유격장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런데 만반의 준비? 이 정도면 된 거 아닌가? 무엇을 더 준비해야 하지?'

 

혼자서 개인군장을 다 꾸린 뒤 행군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한 나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포를 깔고 난 뒤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고 있는데 같은 침상을 쓰고 있던 동료가 양말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뭐하냐? 양말에다 뭘 그리 열심히 문질러?"

"이거? 빨래비누. 양말을 뒤집어서 이렇게 빨래비누를 문지르면 발뒷꿈치도 안까지고 발을 보호할 수 있어."

"그래? 아까 말은 들었는데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아서 안 했는데…."

"이미 유격 갔다 온 동기들이 그러는데 꽤 효과가 있다더라."

 

자존심 버리고 산 행군에 도움이 되는 물건의 정체는?

 

동료의 말을 듣고는 이내 잠자리에서 일어나 군장 속에 넣어 두었던 양말을 꺼내 빨래비누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두 켤레 정도를 문지른 후 군장에 다시 양말을 넣어두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문득 얼마 전 외박 나갔다가 사온 물건이 생각났다. 나 또한 이미 유격을 갔다 온 동료들한테 그나마 행군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특별한 방법(?)에 대해 터득한 터라 외박 나가서 자존심을 버리고 용감하게 약국을 찾아 이 물건을 구입했다.

 

관물대 깊숙이 숨겨놓았던 이 물건을 부시럭거리며 한참을 뒤적거리다 꺼내자 동료가 묻는다.

 

"뭐 보물이라도 숨겨놨냐? 뭔데 그래?"

"어? 이거? 내가 외박가서 사온 건데 행군 때 도움이 될 거야. 너두 하나 줄게."

"그러니까 뭔데?"

"어. 여자 생리대. 이걸 군장 맬 때 어깨에 넣고 짊어지면 한결 아프지 않데."

"그래? 난 생각도 못했는데. 어쨌든 고맙다."

 

이제 생리대까지 군장 안에 챙겨 넣었으니 행군 떠날 만반의 준비를 마친 것이다. 어쨌든 다음날 행군할 생각을 하니 앞이 까마득했지만 그래도 다른 동료들이 준비 안 한 물건(?)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대한민국에서 유격훈련으로 유명한 '화산 유격장'을 향해 출발!

 

다음날 아침, 밤새 빨래비누로 문질러 둔 양말을 신고 전투복 상의 안에는 몰래 생리대를 뽕처럼 넣은 뒤 군장을 메고는 사열대로 향했다. 생리대를 넣어서 인지 몰라도 전에 군장을 멨을 때보다 한결 가볍고 편하게 느껴졌다. 어느덧 사열대에 동료들이 모두 집합했고 훈육대장이 힘을 주는 훈시를 한다.

 

"매우 힘든 일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소대원을 이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정이다. 훈육대장은 여러분들을 믿는다. 한 사람의 낙오 없이 모두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드디어 유격장을 향해 출발! 우리가 유격훈련을 받을 장소는 유격훈련장으로는 대한민국에서 힘들기로 소문난 '화산유격장'이었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여러 마을을 지나고 몇 개의 산을 넘어야 한다. 더군다나 그냥 걸어서 가기도 힘든 행군코스를, 중간중간 화생방 상황을 조성 그 상황을 긴급히 벗어나기 위해 군장을 멘 채 신속히 뛰어가야만 했다. 그로 인해 행군은 그 어떤 훈련보다도 죽을 맛이었다.

 

출발한 지 4시간여가 흘렀다. 그동안 20여km를 걸어왔다. 시계는 어느덧 낮 1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힘들게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는데,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저 앞 개울가에서 중식을 먹고 간다. 각자 자리를 잡고 식사와 휴식을 취하기 바란다."

 

아무리 힘들어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가보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한계상황에 다다를 때쯤 찾아온 달콤한 휴식은 그동안 쌓였던 피로를 한순간에 사라지게 해주었다. 약 한시간여의 달콤한 휴식시간 동안 동료들은 식사는 물론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철모에 물을 가득 담아 머리에 뿌리고 손수건을 적셔 땀을 닦았다.

 

달콤한 휴식을 마치고 다시 유격장을 향해 출발. 몇 개의 산을 넘었는지도 기억 안 날 만큼 또 많은 거리를 행군해 마침내 유격장이 있는 '화산' 입구에 도착했다.

 

"다 왔나? 입구가 보이는데?"

"아냐. 유격받고 온 동기들의 말이 맞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행군이 될 걸? 올라도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던데."

 

동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인솔을 하던 훈육장교가 한 마디 던진다.

 

"자, 지금부터는 아주 힘든 행군이 될 테니까 여기서 잠깐 쉬었다간다. 여기에서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30분에 한번씩 쉬어간다. 그리고 올라가는 동안 화생방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때는 신속히 그곳을 이탈해야 한다."

 

동기의 말은 사실이었다. 오르고 또 오르고, 또 오르고…. 왜 끝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다리는 점점 풀려갔다. 정신력도 거의 바닥난 것 같았다. 거의 제자리 걸음으로 걷고 있자 뒤에 있던 동료가 내 군장을 밀어주며 힘을 북돋아 준다.

 

"너두 힘들 텐데 그만해. 내 힘으로 어떻게든 가볼게."

"지난번에 너두 나 도와줬잖아. 난 괜찮으니까 조금만 힘내자."

 

뜨거운 전우애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서로 의지(?)하며 힘들게 한걸음씩 내딛고 있는데 저멀리 언덕너머로 마침내 유격장 간판이 보였다. 그 간판 아래에는 빨간 레인저 모자를 쓴 유격조교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우리를 맞이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다

 

"유격장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런데 악마의 얼굴처럼 보이는 조교들의 이 환영의 말이 마치 "죽음의 유격장에서 살아나가길 바란다"는 말로 들렸다. 유격장 연병장에 도착한 우리 훈육대는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조교들이 나누어 준 유격복을 집어 들고 내무반을 향해 달려 들어가 군복을 벗고 유격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사관후보생이 아닌 ○○번 올빼미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모두 행군하느라 수고했습니다. 이제부터 각자 관물대 정리하고 씻을 사람은 샤워실 가서 씻기 바란다."

 

유격복을 갈아입고 이제 막 신생 올빼미로 태어난 우리 120여명의 훈육대원들은 앞으로 펼쳐질 5일간의 힘든 유격 여정에 두려워하며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었다. 한계를 극복하고 도착한 '화산유격장'에서의 5일간의 일정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다음 편에는 ‘화산유격장’에서 펼쳐지는 유격훈련에서 단 한명의 낙오자 없이 훈육대로 복귀하기까지의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입니다.


#유격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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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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