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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흐드러진 감자밭과 짙푸른 숲
 꽃이 흐드러진 감자밭과 짙푸른 숲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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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부족한데 누구 아는 사람 없어요?"
"어, 바로 그 분이네, 산삼인지 더덕을 캐러 왔다던 늙수그레한 분, 그런데 그분은 등산의 달인 같았는데 웬일이지, 혹시 사고 당한 것 아녀?"

누군가 그를 기억해냈다. 버스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들이었다. 6월 17일 어느 산악회를 따라 강원도 홍천 서석에 있는 응봉산 등산을 마치고 돌아오려던 참이었다. 출발 예정 시간을 2시간이나 넘기고 있었지만 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응봉산 산행일인 17일 아침, 서울에는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아침 일기예보에는 이날부터 장마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관광버스에 오르자 예약했던 등산객 7명이 펑크를 냈다고 산악회장이 울상을 짓는다. 새벽부터 내린 비 때문이었다. 일행들도 걱정을 한다. 비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치는 날 산에 오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비 염려를 떨쳐버리려고 허풍 떨며 출발한 산행

버스가 출발할 무렵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그러나 양평을 지나 강원도 땅으로 접어들 때부터 하늘은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했다.

고추밭과 벼논, 그리고 옥수수밭과 담배밭
 고추밭과 벼논, 그리고 옥수수밭과 담배밭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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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봐, 내가 뭐랬어, 오늘은 비가 내리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당일 전국적으로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 때문에 걱정하던 일행들에게 내가 보란 듯이 큰소리를 쳤다. 서울을 출발할 때 우리들이 가는 강원도 지역에는 틀림없이 날씨가 좋을 것이라고 장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신통력이나 일기를 알아보는 다른 방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작년에도 우리들은 일기예보를 무시하고 등산을 다녔는데 거의 90% 확률로 등산에 문제가 없었다. 우리들이 도착하기 전에 비가 내린 후 그쳤거나 산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우리들을 태운 관광버스는 난생 처음 가보는 낯선 산골길을 달리고 달려 홍천군 서석면 절골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오늘 산행은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았던 오지산행입니다. 절대 대열에서 이탈하지 마십시오. 개인행동은 위험합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나눠드린 산행지도를 꼭 소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산행 리더들의 전화번호도 적혀 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거나 위험할 땐 꼭 전화하세요."

산악회장의 주의사항을 들은 후 곧 산행이 시작되었다.

산딸기는 지천 작물이 풍성한 논밭, 빈 집과 정적이 감도는 산골 풍경

그러나 산행은 골짜기 깊숙이 자리 잡은 마을길을 한참을 걸어 올라간 후에야 시작되었다. 마을입구 개울가에는 논과 밭이 이어지고 있었다. 제법 넓은 논과 밭도 있었지만 산골 특유의 다랑이 논밭이 대부분이었다.

골짜기 길을 걷다가 오디와 산딸기를 따먹는 등산객들
 골짜기 길을 걷다가 오디와 산딸기를 따먹는 등산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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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이 논 위의 빈 농가
 다랑이 논 위의 빈 농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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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과 밭은 야채와 작물들이 싱싱하게 자라는 모습이 풍요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랑이 논 위쪽의 산 밑에 있는 농가는 빈집이었다. 마을엔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고 조용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빈 집은 또 있었다. 마을길을 걸으며 바라보이는 십여 호의 농가 중에 두 집이 빈집이었다.

이 마을엔 감자밭과 담배밭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감자는 한창 꽃을 피우고 있어서 산자락 숲을 배경으로 흐드러진 하얀 감자꽃들이 장관이다. 옥수수와 고추는 아직 여린 모습이었지만 넓은 밭 가득 자란 담배 밭은 수확의 손길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우와! 이 산딸기 좀 봐, 이것 좀 따먹으면서 올라가자고."
"산딸기가 지천이구먼, 내 60평생에 이렇게 많은 산딸기는 처음 보는구먼."

마을을 거의 벗어나는 지점부터 길 좌우에 빨갛게 익은 산딸기가 지천이었다. 등산객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너도나도 길가의 산딸기를 따먹으며 천천히 산길을 걸었다.

길가엔 뽕나무들도 많았다. 그런데 때가 늦어 오디가 모두 떨어져 버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깊은 산골짜기여서인지 검게 익은 오디가 아직도 많이 열려 있었다. 당뇨 치료를 받고 있는 일행들은 산딸기보다 오디를 더 좋아한다. 오디가 당뇨병에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넝쿨식물이 칭칭 휘감아 푸른 기둥이 되어버린 전봇대
 넝쿨식물이 칭칭 휘감아 푸른 기둥이 되어버린 전봇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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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이 산은 아직도 입산금지네, 장마철에도 산불이 나는 아주 특별한 산인 모양이지, 이 지방 산림청은 여름철에 안내판 내용을 바꿔 놓는 재치도 없나봐."

앞서 걷던 등산객이 길가의 안내판을 손가락질 하며 하는 말이었다. 길가에 세워져 있는 "산불조심, 입산금지"라는 안내판은 장마가 시작된 여름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골짜기 가장 안쪽의 다랑논가에 세워져 있는 전봇대는 넝쿨식물이 빈틈없이 휘감아 버려 푸른 기둥으로 변한 모습이 이채로웠다.

산딸기와 오디를 실컷 따먹으며 골짜기 깊숙이 들어서자 등산 리더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경사가 만만치 않은 왼쪽 산자락을 오르기 시작한다. 산에는 길이 나있지 않았다. 왜 길도 없는 산을 오르느냐고 묻자 이게 바로 오지산행이란다.

오지산행이 어떤 건지도 모르고 따랐다가 혼쭐나다

그런데 길도 없는 산을 오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북하게 쌓여있는 낙엽과 낙엽 밑의 부드러운 부엽토가 발밑에서 푹푹 빠지며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자꾸 미끄러지는 발을 나무를 붙잡고 기를 쓰며 어렵사리 올라가려니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하늘엔 엷은 구름이 끼어 있었지만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습도가 높아 더욱 많은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르는 속도도 한없이 느렸다.

마을입구에서 바라본 응봉산과 골짜기 입구의 입산금지 안내판
 마을입구에서 바라본 응봉산과 골짜기 입구의 입산금지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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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힘들어 죽겠구먼, 늘그막에 이게 웬 고생이람."
"아니 이 나이에 이런 특수훈련을 꼭 받아야 하는겨? 우리가 무슨 특공대원도 아닌데 말이야."

뒤쳐진 몇 사람이 숨을 헉헉거리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들의 푸념이 아니어도 길이 나있지 않은 산을 오르기는 정말 힘이 들었다.

"모르셨습니까? 오지산행은 본래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도 다행히 산이 험하지 않아서 위험하지는 않으니 다행이네요."

우리들과 함께 후미 그룹에 끼어 힘들어 하며 오르고 있던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등산객 한 사람은 이런 오지산행의 경험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처음 당하는 다른 사람들은 힘들고 황당한 마음에 여간 불만스러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천천히 조심해서 오르십시오, 등산 다니면서 이런 색다른 경험 해보시는 것도 재미있잖아요?"

재미있다고 하기엔 뒤쳐져 쩔쩔 매는 사람들에겐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불만스러웠지만 이미 산 중턱 이상을 올랐으니 되돌아 내려 갈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니 왜 내려오십니까? 그냥 내려가시려고요?"

우리 후미 그룹들이 허위허위 힘들여 올라가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위에서 헐레벌떡 내려온다. 얼굴은 그리 늙어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가 거의 백발인 사람이었다.

"아! 네, 올라오다가 땀수건을 떨어뜨려서 찾으러 내려가는 중입니다."

아니 이렇게 힘든 길을 그까짓 땀수건을 찾으려고 다시 내려갔다가 올라온단 말인가. 뒤쳐져 올라가던 사람들이 혀를 찬다. 내가 땀수건 하나 줄 터이니 그냥 올라가자고 했지만 그는 그냥 바삐 내려갔다.

산딸기와 오디, 그리고 개망초꽃밭과 숲
 산딸기와 오디, 그리고 개망초꽃밭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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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렇게 내려간 그는 20여분 후 능선에 도착하기 전에 다시 우리들을 앞질러 올라간다. 땀수건을 찾아 목에 걸고 있었다. 대단한 등산 실력이었다. 잠깐 같이 걸으며 물어보니 더덕이나 산삼을 캐기도 한다는 그는 일주일에 2~3회 등산을 한다는 베테랑 등산가였다. 그는 여전히 뚜렷하지 않은 능선길을 걸으며 가끔씩 길에서 벗어나 무엇인가를 채집하는 모습이었다.

능선길에는 전에 다른 산에서는 본 기억이 없는 이름 모를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었다. 하얗고 예쁜 꽃이 피어 있는가 하면 작은 나팔꽃 모양의 노르스름한 꽃들이 수없이 많이 피어 있었다. 그렇게 2시간 30분 만에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오지의 높은 산이어서인지 어느 산에나 있는 정상표지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았다. 다만 "응봉산 정상(1103m) 홍천 북방면 남궁가족"이라고 하얀 종이에 써서 비닐로 코팅한 작은 표지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정상에서 간식을 먹으며 잠깐 휴식을 취한 다음 하산길로 나섰다. 그런데 방향이 꼭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방향이 맞을 것 같은데 오른쪽 방향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산악회 리더 한 사람이 앞장을 섰다.

하산길도 경사가 급했다. 그러나 대부분 바윗길이 아닌 흙길이어서 위험하지는 않았다. 급경사 길이어서 거리는 그만큼 짧았다. 절골 마을입구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장소에 내려오니 30여 명의 일행들 중에서 10여 명밖에 보이지 않는다. 맨 후미그룹이라고 생각했던 우리일행 3명이 사실은 선두그룹이었던 모양이었다.

길없는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
 길없는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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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봉산 정상에서 일행 두 사람과 함께
 응봉산 정상에서 일행 두 사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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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 3명은 하산 예정시간인 오후 3시 30분에 맞춰 내려온 것이다. 등산객들은 늦은 점심을 먹으며 소주와 막걸리를 곁들여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일행들도 모처럼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사라진 등산객 1명, 전화 통화도 안 되고, 가슴 조이며 걱정한 등산객들

5시가 지나자 산에 올랐던 등산객들이 거의 내려온 것 같았다, 산악회 간부가 서울로 출발하겠다며 버스에 오를 것을 독려했다. 그런데 출발하기 전 인원 파악을 하던 간부가 얼굴을 찡그린다.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요, 혹시 아는 분 없으세요?"

버스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내려오지 못했다면 혹시 사고라도 난 것 아닐까 하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버스 안을 두루 살펴보니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길이 없는 산을 오를 때 땀수건을 잃어버렸다며 산을 내려가 수건을 찾아가지고 다시 우리들을 앞질러 올라갔던 백발의 그 베테랑 등산가였다. 차 안을 모두 둘러보았지만 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큰일 아닌가, 그런 등산전문가가 내려오지 못했다면 사고를 당했을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와 지친 다른 등산객들에겐 그를 다시 찾아 나설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산악회 간부들이 논의 끝에 119에 구원 요청을 하자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119에 신고를 하고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 안은 무거운 분위기에 감싸였다.

능선길에서 만난 예쁜 꽃들
 능선길에서 만난 예쁜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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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버스가 서석면 소재지에 정차하고 간부들이 소방서와 경찰관 파출소를 들러 나올 때 쯤 표정이 밝아졌다.

"조금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무사히 산을 내려왔답니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맨 모양입니다."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버스 안의 사람들이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는 표정이었다.

"그 양반 베테랑 등산가던데 자신의 실력만 믿고 혼자 행동하다가 길을 잃은 모양이구먼, 무사히 내려왔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다른 30여명이 얼마나 걱정하고 기다리게 만들었어, 단체 행동에서 그렇게 이탈하면 안 되는데 말이야."

누군가 불만을 터뜨리자 몇 사람이 합세를 했다. 염려가 불만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도 무사히 내려왔다니 다행이잖아요, 그분도 다음엔 그런 행동 하지 않겠지요, 이제 그만 합시다."

버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오지등산에서 발생한 낙오자로 인해 발생한 짧은 해프닝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응봉산, #오지산행, #등산객, #낙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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