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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전.  창경궁의 정전이다.
명정전. 창경궁의 정전이다. ⓒ 이정근


동관에 칙서가 도착했다. 하지만 열어 볼 수 없다. 칙서란 받들어 모셔야 할 황제의 문서이고 국왕에게 전해야 할 국서다. 이동할 때도 별도로 모셔야 하고 강을 건널 때도 단독으로 배를 타야 한다.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지만 사신은 열어 볼 수 없다. 이 상황에선 사신은 배달부에 불과하다. 세자관에도 알리지 못하고 칙서를 가지고 고국으로 달려가는 수밖에 없다.

한성에 도착한 이경헌은 즉시 인조에게 칙서를 올렸다. 대소신료들이 도열한 가운데 임금이 예를 갖추고 칙서를 받았다.

"그대 나라가 떳떳하지 못한 일을 반복하기에 두 왕자를 인질로 삼았다. 여러 아이들이 이곳에 있거나 그곳에 있거나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세자를 보내어 귀성케 할 것이니 그대의 아들과 세자의 아들을 속히 출발시켜 봉황성에 도착하도록 하라. 나도 곧바로 세자를 출발시켜 봉황성에서 교체하게 하였다가 문병을 마치고 돌아오면 이곳에 있는 아들은 귀근하도록 할 것이다.

그대가 명을 준수하려 했다면 징집이나 조발하는 일을 지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시를 어기고 남한산성과 평양성을 마음대로 수축하여 말 먹이와 식량을 저축하고 다른 곳의 성지들도 수선하고 있다. 그대의 토지를 내가 이미 얻었고 그대의 처자 및 여러 신하의 처자들을 내가 이미 모두 거두었다가 다시 놔두었다. 지금 또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다시 전쟁의 실마리를 일으키려고 하는가? 하늘을 배반하고 명을 어기지 말라."

남한산성.  쌓고 헐기를 반복했던 산성이다.
남한산성. 쌓고 헐기를 반복했던 산성이다. ⓒ 이정근


칙서를 받아든 인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전쟁의 실마리를 일으키려고 하는가?'라는 마지막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전쟁?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삼전도에서 환궁할 때 널브러져 있던 시신들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참혹한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이 일을 어찌할꼬?"

세자를 불러오기 위하여 대군을 보내겠다고 한 것은 조선에서 제안한 것이었기 때문에 불만이 없다. 허나, 원손을 보내라니 억장이 무너졌다. 원손 나이 이제 다섯 살이다. 그 어린 것이 천칠백여 리 머나먼 곳까지 가야 한다니 가슴이 미어졌다.

"세자와 원손이 청나라 땅에 있을 때 내가 잘못이라도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인조는 깊은 탄식을 토해냈다. 지금도 이형익으로부터 침을 맞고 있다. 언제 어떻게 쓰러질지 알 수 없다.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거역하면 전쟁이다. 준비 없는 전쟁의 참화.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또 다시 전쟁이면 파멸이다. 패전국의 국왕으로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이 죽음보다 더한 참람함으로 밀려왔다.

또 다시 전쟁이라면 파멸이다

"칙서를 살펴보건대 우리를 협박하고 의심하는 뜻이 숨어 있어 예사로운 말이 아닌 듯합니다. 뒷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군을 보낸다는 뜻은 우리가 제안했으나 원손은 아닙니다. 원손은 아직 나이가 어린 데 어찌 수천 리 먼 길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우리 쪽에서 할 말이 있으니 저들도 혹 들어줄 가망이 있습니다."

"승문원으로 하여금 문서를 작성하게 하여 중사(中使)가 밤낮으로 달려가 우리의 사정을 여쭙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임금의 참담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대소신료들이 청나라에 조선의 입장을 전달하자고 의견을 내놓았다.

"오늘 도착한 문서를 보건대 원손도 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원손과 대군의 행차만큼은 거역하기 어려울 듯하니 일을 아는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원손과 대군이 들어간다는 뜻을 먼저 보고해야 할 듯합니다."

비국이 임금의 의견에 맞장구를 쳤다.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달리 좋은 방도가 없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그들의 말을 흔쾌히 따라서 의심과 노여움을 풀어주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세자가 오가려면 배(舟)를 정비하고 온갖 곡식을 파종하는 때에 해당되니 서쪽 지방 백성들이 농사철을 놓치고 말 것이다. 대군과 원손은 지금 들어가고 세자는 6, 7월쯤에 내보내라는 뜻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저들이 세자를 돌려보내기로 허락한 목적이 성후(聖候)를 살피게 하기 위함인데 지금 민폐가 된다는 것을 거론한다면 저들이 필시 의심할 것입니다. 또 6, 7월경에 내보내라는 말은 이곳에서 기일을 정하는 것이 되니 역시 타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비국이 임금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유 없이 황제의 명을 따르겠다는 사신을 파견한 인조는 편전으로 원손을 불렀다.

다섯 살 어린아이가 머나먼 곳을 가야 한다니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원손 나이 몇이지?"
"다섯 살이옵니다. 할바마마!"

아무것도 모르는 석철은 생글거렸다. 석철은 엄마 아빠 얼굴을 모른다. 10개월 갓난아기 때 엄마 강빈과 헤어졌으니 알 턱이 없다.

"이 못난 할아버지를 용서해다오."

하고 싶은 말이 목에 거렸다. 인조는 마음속으로 흐느꼈다. 석철을 끌어안고 있는 인조의 얼굴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렷다. 삼전도에서 항복할 때도 이렇게 서럽지 않았다. 창릉고개에서 세자를 떠나보낼 때에도 이렇게 가슴 아프지는 않았다. 자신의 미욱함으로 원손을 오랑캐나라에 보낸다는 현실이 저주스러웠고 자신이 미웠다.

심양에 도착한 사신 이혼(李俒)이 예부를 방문하여 원손과 대군 출발 기일을 알렸다.

"세자의 출발 일정은 원손과 대군이 심양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알려주겠다."

칼자루는 청나라가 쥐고 있었다. 황제의 칙서에는 봉황성에서 맞바꾸자고 되어 있다. 하지만 청나라는 말을 바꾸었다. 1차 요구조건에 응하면 그것은 기정사실화하고 슬그머니 또 다른 요구조건을 추가하는 것이 중국 사람들의 습성이다. 피파박시가 세자관을 찾아왔다.

귀국을 서두르는 세자를 보면서 눈물짓는 여인

"세자저하의 귀국을 감축드립니다."
"귀국이라니요?"

소현은 깜짝 놀랐다.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축하를 받을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이었다. 청나라의 심장부 심양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질가왕과 구왕이 세자를 집으로 초청하여 송별연을 행하겠다 합니다."
"고마울 따름이오."

행장을 갖춘 소현이 시종관원들을 거느리고 구왕 집을 방문했다.

"어서 오시오. 세자! 귀국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도르곤과 소현은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청나라 군대가 삼전도에서 철수할 때 도르곤과 함께 배를 타고 상암들로 이동했고 압록강을 같이 건넜다. 정벌군 장수이긴 하지만 소현에게 연민의 정을 보냈고 깊은 관심을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세자저하!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안으로 들어가자 반갑게 맞이하는 여인이 있었다. 소현은 귀를 의심했다. 청나라 옷을 걸쳤으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분명히 조선말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고 젊잖은 처지에 '조선 사람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다. 푸짐한 대접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까지 배웅 나온 구왕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세상구경? 무엇일까?

"조선을 다녀오면 세상구경 한 번 화끈하게 시켜드리겠소."
"몸 건강히 잘 다녀오십시오."

다소곳이 절을 올린 여인은 소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속에 품었던 남자. 그 남자가 눈앞에 있지만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여인. 다시는 고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세자가 귀국한다니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는 연실이었다.

구왕에 이어 질가왕의 초청을 받은 소현은 심양을 떠나기 하루 전, 황제의 초청을 받았다. 봉림대군을 대동한 소현을 용골대가 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귀국선물로 안마를 내준 용골대는 대홍망룡의(大紅蟒龍衣)를 입을 것을 요구했다.

"아니 됩니다. 이것은 국왕의 장복입니다."

소현이 한사코 거절했다. 완강한 소현의 태도에 용골대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세자의 예복으로 황제를 알현하도록 했다. 이 사실은 빈객 신득연을 통하여 그대로 인조에게 보고되었고, 소원 조씨가 심어놓은 세작에 의해 '세자가 국왕의 법복을 입고 황제를 배알했다'는 것으로 전달되었다.


#소현세자#원손#남한산성#칙서#도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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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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