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올 한 해 동안 연중기획으로 '쓰레기와 에너지'를 다룹니다. 지난 5월 '친환경 결혼'을 주제로 쓰레기 문제를 다뤘고 6월~8월엔 '쓰레기 이동을 막아라'란 주제를 통해 쓰레기 감량과 재활용 없이는 결국 쓰레기 절대치가 변함 없다는 점을 확인할 계획입니다. 이번엔 휴가철을 맞아 여행을 다룹니다. [편집자말] |
주5일제 시대를 맞아 국내·외 여행을 많이 떠난다.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난 즐거움을 얻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쓰레기를 무심코 만드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 집이나 우리 동네에서 만든 쓰레기를 다른 지역에 두고 오는 등 쓰레기 이동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불교수행공동체인 정토회 회원들이 벌인 인도 여행은 다소 극단적인 실험이라는 점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우리 여행 방식을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참고할 점이 있다고 본다.
당시 여행에 참가했던 정토회 최윤희씨는 그 때 여행을 한 뒤, 삶을 돌아보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꼭 따라할 순 없겠지만, 삶을 돌아보면서 한 두 가지라도 바꿀 수 있다면 좋은 게 아닐까.
최윤희씨와 당시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최윤희씨는 그 짧고도 긴 경험을 통해 삶을 되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야기의 생생함을 위해 화자의 시점에서 글을 정리했다.
꾀죄죄한 아이들, 물을 함부로 쓰는 게 죄스러웠다
지난 1월 나는 14박15일 일정으로 280명의 신청자와 함께 정토회와 (사)제이티에스가 준비한 인도 북쪽 불교8대 성지순례에 참가했다. 여행 전에 나는 이 여행 동안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넘어 부처님처럼 살 것에 동의한다는 신청서에 서명을 했다. 그리고 특별한 주의사항도 새겨 들었다. 부처님의 성지를 여행하는 것은 감사한데 그 땅에 쓰레기를 남기고 오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가방 크기도 정해 주었다. 가로와 세로, 높이가 35*20*55cm다. 수하물로 부치지 않고 반입 가능한 크기 40*20*55cm보다 작다. 여기에 15리터 배낭 하나를 멜 수 있단다. 이 안에 쌀 7일분, 라면 5개와 침낭까지 넣으란다.
인도는 낮은 덥고 해가 없으면 추우니 여름옷, 겨울옷이 다 필요하단다. 반팔, 긴팔, 겨울 점퍼를 차례대로 껴입고 가기로 했다. 갈아입을 옷 몇 벌과 비상식량인 초콜릿은 넣었다가 뺐다. 배낭에는 컵 하나, 밥그릇, 수저, 손수건, 뒷물 수건, 비닐봉투 대신 쓸 방수천주머니, 장바구니를 챙겨 넣었다.
공항에서 우리 팀을 만났다. 규격보다 큰 가방을 가져온 사람이 살짝 부럽기도 얄밉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에서 내 가방은 내가 든다는 원칙 아래 기차역의 수많은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없는 여관의 계단을 바삐 움직여야 했다. 내 가방 크기는 딱 내가 감당할 정도였다.
인도 델리 공항에 도착했을 때 드디어 말로만 듣던 인도가 현실로 다가왔다. 국제공항인데도 먼지가 뽀야니 준비한 마스크를 얼른 썼다. 에어컨이 없어 창문을 열고 다니니 차안에도 먼지가 그득했다. 당장이라도 물로 씻고 싶었지만 몇 시간을 달려 성지 하나를 찾아가는 길가에서 수도시설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곳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씻지 않아 꾀죄죄하고 그 얼굴에 파리가 붙어도 쫓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그 귀한 물을 내가 감히 사용해도 될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여행 내내 최소한의 물만 쓰기로 작정했다. 물 한 바가지로 세수하고 그 물로 발을 씻고, 머리도 열흘 만에 한 번 감았다. 몸에 배인 땀과 먼지는 손수건에 물을 적셔 닦았다.
부처님께서는 걸식을 하시며 걸어 가셨던 길을 우리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부처님처럼은 못해도 최소한의 경비를 들여 검소하게 인도인의 삶을 체험하는 여행이었다. 허름한 여관에서 천장에 도마뱀이 지나가는 스릴을 만끽하면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쥐들이 왔다갔다 하는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고, 의자인지 침대인지 구분이 안 가는 기차 침대칸에서 인도남자들과 마주하고 하룻밤을 자기도 했다.
비포장도로를 몇 시간 동안 달려야 우리가 목적한 성지 하나에 도착하니 밥 먹을 식당을 찾을 시간도 마땅치 않다. 밥은 들고 간 전기밥솥에 지은 뒤 새벽에 밥솥을 안고 버스에 탔다. 오전 10시, 오후 4시쯤 밥 먹기 적절한 넓은 공터를 만나면 각자 자기 밥그릇과 수저를 꺼내고 가져온 김치와 밑반찬으로 밥을 먹었다. 쓰레기를 만들 일이 없었다.
모래사장에 쪼그리고 앉은 사람들, 뭘 하는 것일까?
어느 날 해 뜰 무렵 차창 밖 모래사장에 여기저기 사람들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여 호기심에 자세히 보았다. 앗, 큰 볼일을 보는 중이구나! 집에 화장실을 따로 두지 않는 인도인들은 아침에 물을 한바가지 들고 이렇게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고 물로 뒤를 닦는다고 했다. 재밌고도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했느냐고? 우리도 똑같이 했다. 인도의 뒷물 문화를 배워 정토회관에서도 화장실에서 휴지 대신 뒷물을 한다. 대신 큰 볼일은 여관에서 보고 물로 씻고 뒷물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이동 중에는 화장실을 만나기 어려우니 인도인들처럼 길가 어디서건 볼일을 보았다. 몸을 조금이라도 가릴 곳이 있는 곳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닌 게 약간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작은 볼일을 보고 휴지 대신 준비한 뒷물수건으로 닦았다.
인도는 과일이 저렴하고 맛있단다. 과일을 살 때 비닐에 담아 주려 해서 준비해간 장바구니와 방수천주머니를 내밀었다. 비닐은 아주 얇은 것이 우리랑 다른 데 특별히 분해가 빠른 재질로 만든 것이라 했다. 기차 안이나 시내에서 짜이(인도 차)를 마시곤 했다. 아주 얇은 페트 컵에 팔기에 우리는 준비해 간 자기컵에 마셨다. 이렇게 인도 시내에서 일회용물품이 눈에 띄었는데 조금만 시골로 가니 놀라운 일회용품(!)이 등장했다.
가게나 마을에서는 마른 나뭇잎을 몇 개 붙여 접시 모양을 낸 그릇에 먹을 것을 담아 주었다. 사용하고 나면 그냥 버려도 퇴비가 된다. 우리 여행객을 위한 차를 담은 컵은 황토로 빚은 토기였다. 다 쓰고 깨면 그냥 흙이라고 한다.
그들의 일회용품은 쓰레기가 아닌 자연이었다. 가난하기에 오히려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이들의 삶에 뭐라 말할 수 없는 미안함이 올라왔다. 안타깝게도 성지 주변에는 비닐과 휴지, 생수병이 뒹굴고 있었다. 모두 여행객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다.
인도 시내를 지났다. 길에는 사람과 릭샤(자전거나 오토바이 뒤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음), 자동차, 자전거가 중앙선도 없이 서로 뒤섞이고, 좌우로 움직였다. 좋은 옷에 말끔한 얼굴을 한 사람과 구걸하는 사람이 한곳에 있었다. 그 속에 뼈만 앙상한 소와 개도 함께 있었다. 이 복잡한 모습을 한 눈에 보는 것은 너무나 놀라웠다.
그러나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었고 오랜 계급사회와 빈부의 격차를 받아들이는 인도인들의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오히려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내 눈을 평화롭게 오랫동안 바라보아 주니 혼란스런 마음도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우리가 성지에 도착하면 어딘선가 순식간에 수십명의 아이들이 몰려와 구걸을 했다. 아이들은 눈빛만 보고도 줄 사람인지 안 줄 사람인지 아는 듯했다. '불쌍해서 줘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어떻게 알고 다가왔다.
하지만 '도저히 안되겠다'고 마음먹으면 가까이 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구걸을 하면서 생긴 놀라운 눈치일 것이다. 그래도 가끔씩, 아이들이 너무나 해맑은 웃음을 웃어 주어 애잔한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가재도구는 접시 몇 개와 물 항아리 하나, 나는 너무 많이 가졌다
부다가야 둥게스와리 마을을 방문했다. 옛날에 시체를 버리던 이곳에서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을 하셨다. 이 마을에 사는 주민들은 인도 최하층민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다. 말 그대로 만지면 부정을 타서 좋은 세상에 못 간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들이 꺼린다. 이런 이유로 가정부로도 종업원으로도 일할 수 없는 계급이다.
16개 마을 1만 2천명이 사는 이곳에 1993년 정토회가 수자타아카데미라는 학교를 짓기까지는 학교가 하나도 없었다. 맨 처음 여행경비를 아껴서 이 학교를 짓기 시작했는데 현재는 이 마을에 학교 1개와 병원 1개가 있다.
이 마을에 사는 집들을 방문했다. 집은 흙으로 지었고 창문이 없다. 물론 전기도 없으니 내부는 깜깜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후 집안을 보니 이런, 아무것도 없네! 곡식이 들었다는 작은 자루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가재도구라고는 접시 몇 개, 침대라고 나무로 이어 만든 것이 하나 있고, 물 항아리 하나, 천 조각 몇 개가 전부였다. 반찬도 없이 곡물 하나로 낮에 한 끼를 먹고 밤에는 자기 직전에 먹고 잔다고 했다. 아마 배가 부를 때 얼른 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영양이 부족해서 불구자와 결핵환자가 많다. 가축들도 다 뼈만 앙상하다. 이 마을은 그래도 "학교에서 점심을 주니 학교로 와라, 구걸하지 말고 배워서 일을 하라"고 가르쳐서 구걸하는 아이가 적은 편이었다.
마을에서 돌아온 뒤 우리는 마을을 둘러 본 소감을 나누었다. 모두 마음 아파했다.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이들과 나눌까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내가 힘들다고 했던 것들, 내 고민은 그냥 하나의 사치였다. 도대체 나는 뭐가 불만이었지? 다 사라졌다. 인도는 내가 너무나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음을, 지금 이대로 아무 문제없이 사는 것에 감사해야함을 알게 해주었다.
인도를 떠날 때 스님께서는 필요 없는 것들을 내어 놓으라 하셨다. 사람들은 그 작은 가방 어디서 나왔는지 많은 물건과 함께 여행 중에 아껴 쓴 경비를 내어 놓았다. 나도 양말과 얇은 담요, 비상약, 옷, 남은 여행경비를 내놓았다. 내겐 버릴 것이 아직도 많았다.
집에 돌아오니 집은 반짝반짝 윤이 나다 못해 화려해 보였다. 냉장고에는 먹을 것이, 옷장에는 옷이 그득했다. 나름대로 검소하다고, 쓰레기를 안 만든다고 자부했는데… 당장 옷장을 정리해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다 먹고 난 후 새로 먹을거리를 사기로 마음 먹으니 식비도 많이 아낄 수 있었다.
5개월이 지났다. 예전의 습관으로 조금씩 냉장고가 채워지고 있을 무렵이다. 북한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인도는 그렇게 가난해도 굶어죽는다는 소식은 없는데, 도대체 얼마나 못 먹으면 굶어서 죽을까? 다시 인도에서 한 내 다짐을 되새기게 된다. 내 욕심 때문에 나와 남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소박하게 살고, 나누는 삶을 살겠다고….
오늘 하루가 나와 남을 살리는 하루가 되었는지 돌아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언론재단 기획취재 지원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