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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비정규직 집회에 단골로 등장하는 피켓이 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팔백오십만 비정규직 노동자 피눈물의 땅 이랜드'

 

이렇듯 '이랜드 투쟁'은 대한민국 팔백오십만 비정규직 문제의 표본이 되었다. 비정규직보호법의 완전한 실패와 비정규노동자의 비인간적인 노동형태가 곪아 터진 '모범 사례'인 셈이다. 지난 참여정부가 개정한 비정규직보호법은 천사 같은 이름을 하고 있지만 실상 비정규직에게 악마의 법률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어느새 그 법률은 '비정규직 개악법'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개정된 법률의 허를 찌른 기업들은 2년차 비정규직을 외주용역화하고 대량해고하며 행복해했다. 그러나 정규직의 꿈을 꾸다 날벼락 맞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절망 속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비정규직 문제에 무심한 세상에 '반란'을 획책한 사람들이 바로 이랜드 노동자들이다. 그제야 세상은 관심을 보였다. 비로소 카메라를 비추고 마이크를 들이댔다.

 

그러나 첫돌을 넘기고 400일을 넘긴 지금 이랜드 투쟁을 말하는 언론은 찾기 힘들다. 철새처럼 슬쩍 떠나간 관심을 생각하면 "성경에는 노조가 없다" 태평하게 말하던 박성수 회장의 말도 차라리 예수의 복음처럼 들릴 지경이다. 세상 아무도 듣는 이가 없으니 마음껏 예수의 탈을 쓰고 예수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 하더라도 누가 욕할 것인가. 거기에 "성경에는 비정규직도 없다"고 악을 써봐야 저쪽은 빙글빙글 웃을 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는 지난 한 해 이랜드 투쟁의 기록이다. 인터뷰를 꾹꾹 눌러 담았다. 이들은 일 년간 매장을 점거했다, 연행되었다를 반복하며 시위 중이다. 이들 대부분은 여성들이다. 투쟁도 몰랐고 노동조합도 몰랐던 아줌마들이었지만 지금은 비정규직 투쟁에 선봉에 선 '투사'다. 그러나 투사들이 모두 무쇠 같은 심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매일같이 눈물을 쏟다가 너무 울어 이제는 나올 눈물도 없다고 말하는 조합원의 모습은 감히 짐작하기 힘들 만큼 처연하다.

 

거의 모든 조합원이 '생계 투쟁'의 짐을 지고 있다. 당연히 투쟁하는 동안 임금이 나오지 않는다.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 전기도 끊기도 수도도 끊겼다. 컴컴한 방에서 촛불을 켜고 공부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엄마의 마음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들은 '비정규직 투쟁'과 '생계 투쟁' 두 가지 투쟁을 한꺼번에 하고 있는 셈이다. 이랜드 투쟁은 조합원들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았다. 이제 이들은 더는 예전처럼 세상을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욕 한마디 못했던 내가 너무 욕을 잘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조합원의 쑥스러운 웃음이 문득 서글퍼진다.

 

어떤 이들은 이랜드 그만두고 딴 데서 일하면 되잖냐고 말 할지 모른다. 물론 이랜드 조합원들 투쟁 그만두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단순히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겠지만 조합원들이 이랜드에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적 존엄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부 똑같이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도록 온종일 활짝 웃어야 했다. 화장실도 팀장에게 허락받지 못하면 꾹 참아야 했다. 비좁은 계산대에 종일 서서 저릿한 다리 통증을 참고 고객의 욕설을 참으며 계산을 해줘야 했다. 방광염이 생겼고 위장약을 먹어야 했다. 그렇게 일했는데 돌아온 것은 외주화 통지와 해고통지다.

 

그들이 이랜드에 빼앗긴 것은 돈이 아니라 존엄이다. 인간이 아니라 쓰고 버리는 부품 취급받았다는 것이다. 돈이라면 존엄은 물론 간 쓸개까지 다 빼줄 것처럼 구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이랜드 투쟁의 이유가 거의 불가해한 '초현실적' 진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랜드 노동자들은 돈이 아니라 존엄을 요구하고 있다.

 

인터뷰를 읽다 보면 이들의 투쟁이 마냥 똘똘 뭉쳐 있지만은 않았다. 민주노총에서 약속한 생계비 지원은 딱 한 번으로 그쳤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조합원들을 향해 돈 받고 저런다고 지분거린다.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이 떨어져 나오는 과정에서도, 대선에서도 총선에서도 차마 말로 다 못할 고통과 분열을 겪었다. 설움을 율동패 활동으로 달래 보아도 감당하기 힘들다. 너무 억울하다. 억울한 사정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정규직도 연대하고 시민도 연대했다. 기륭전자, 코스콤, 코레일 비정규 노동자들과 연대했다. 그러나 여전히 참 외로운 싸움이다.

 

 

이제 '비정규직'이란 말은 우리 시대 절망의 단어가 되었다. 네 글자는 아이들의 끔찍한 미래이며, 어른들의 처량한 현재이며, 신자유주의의 상처다. 우리의 가장 절박한 현실이다. 심지어는 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정규직을 들먹이며 구박하는 편집장의 모습이 왕왕 나온다. 밉보이다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비정규직 기자는 금세 풀이 죽는다. 도대체 마냥 웃으며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지난해 이랜드 농성장에서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날 이랜드 조합원들과 학생들과 시민들과 활동가들이 전경들에게 포위되어 팔뚝질을 했다. 노래를 불렀다. 홈에버를 찾은 사람들은 힐끔힐끔 쳐다보고 수군거렸다. 더러는 욕도 했다. 빨갱이라는 욕도 있었다. 어떤 이는 현실을 말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현실을 말하며 현실에서 도망치는 많은 이들을 보았다. 홈에버 중계점의 거대한 건물과 그리로 꾸역꾸역 밀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이지 괴물과 마주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그랬으니 조합원 아줌마들은 오죽했을까 싶다.

 

아이들에게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엄마는 너무 쉽게 빨갱이로 매도되곤 한다. 옛날 노동 3권을 들먹이면 빨갱이가 되어 뼈가 부러지도록 얻어맞던 시절이 있었다. 경제발전과 일류기업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은 합법이었다. 우리는 그 시대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른다. 찬란한 기적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고 다쳤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오늘날에도 헌법에 명시된 '노동 3권'은 죽은 글자일 뿐이다. 졸지에 빨갱이가 된 엄마는 강제 진압되어 끌려 나간다. 아이들은 어두컴컴한 방에서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릴 것이다. 그런 괴로운 싸움이 벌써 400일을 넘겼다. 오늘도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들은 민중가 '철의 노동자'를 부르며 외로운 팔뚝질을 하고 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를 이랜드일반노동조합을 통해 주문하면 이랜드 투쟁기금으로 쓰입니다. 이랜드일반노조 홈페이지: http://www.elandilban.ba.ro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 이랜드 노동자 이야기

권성현 외 엮음, 후마니타스(2008)


태그:#비정규직, #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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