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지난 23일 이명박 대통령이 예고 없이 청와대 춘추관(출입기자실)을 방문했다. 지난 2월 취임 이후 3번째 방문이다. 휴가에 앞서 기자들에게 인사차 온 것이지만, 오랜만에 이 대통령을 접한 기자들은 현안과 관련한 질문도 빼놓지 않았다.
이 대통령과 기자들 사이에 휴가를 주제로 가벼운 담소가 잠시 오간 뒤, 한 기자가 "휴가를 다녀오면 금강산 피격 사망사건이나 독도 문제 등 현안이 싹 풀릴 것으로 기대하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이 대통령은 "그렇게 싹 풀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며 "독도 문제도 시간이 걸릴 것이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적당히 얼버무려 해결하는 것보다 원칙에 맞게 해결하는 게 좋다"고 답했다.
이명박 "일본에 큰 지도자 나오면 실마리 풀릴 것" 기자들은 다시 "독도 문제 때문에 후쿠다 (일본) 총리에 대해 실망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지난 4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 간에 "미래 지향적인 동반자 관계로 나아가자"고 선언해놓고, 지난 14일 일본 정부가 중등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 주장을 포함시키는 등 '뒤통수'를 쳤다는 평가를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일본도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면 독도 문제가 많이 달라질 것"이라며 "일본도 국내정치 상황이 있으니까…"라고 답했다. 이 대통령은 또 "유럽 같은 위대한 큰 지도자가 나오면 일본도 달라질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독도는 일본이 (자기의 영토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기 쉽다, 분쟁의 여지도 없다"고 강조한 뒤, 거듭 "(일본에) 큰 지도자가 나오면 실마리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독도 문제 외에도 금강산 피격 사망사건과 대북 특사 제안, 미국 대선 상황에 대한 입장, '선 지역발전 후 수도권 규제 합리화' 방안에 대한 의지 등을 피력했다.
20여분 간의 담소(?)가 끝난 뒤, 기자실을 나서던 이 대통령은 갑자기 돌아서서 기자들을 향해 "(기사로) 안 쓸 거지? 쓰지 마세요"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더니 다시 "(쓰더라도) 잘 써줘야 해, 그래야 내가 또 와서 얘기하지"라고 당부했다.
<오마이뉴스> 반대했지만... 표결 끝에 비보도 수용
이 대통령이 돌아간 뒤, 배석했던 이동관 대변인 주변으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이 대통령의 말이 '비보도(오프 더 레코드)'를 뜻하는 것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동관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다른 것은 다 써도 좋지만, 일본 총리에 대한 발언은 비보도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독도 문제가 상당히 민감한 문제인데다, 타국 정상에 대해 폄하를 한 것으로 비췰 수 있는 대통령의 발언이 보도될 경우 국제적 논쟁이 될 수 있어서 자칫 국익을 훼손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이동관 대변인의 요청이 있은 직후 즉석에서 기자들이 회의를 열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이 대변인의 비보도 요청을 받아들이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일부 기자들은 반대했다. 한 기자는 "이 대통령의 발언은 각 언론사에 정보보고가 될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일본 언론사에 흘러갈 가능성이 있다"며 비보도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기자는 "이 대통령이 '위대한(큰) 지도자'라는 말을 3차례나 반복한 것은 즉흥적으로 한 실언이 아니라 나름대로 언론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의지가 반영된 것인데, 언론이 자의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유로 비보도 요청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설사 이 대통령이 무심코 뱉은 '실언'이라고 하더라도, 평소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들이 알아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기사 마감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다수결로 비보도 여부를 결정하자는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결국 거수투표를 실시, <오마이뉴스>를 비롯해 3개 언론사 기자가 반대했으나 이 대변인의 비보도 요청을 수용하는 것으로 결정이 내려졌다
통상적으로 취재원의 비보도 요청이 있을 경우, 취재 기자 중 한 사람만 이를 거부해도 비보도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청와대에서 생산되는 뉴스의 민감성이 크기 때문에, 다수의 의견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청와대 측의 비보도나 엠바고(보도유예) 요청에 대해 투표를 해왔다.
<오마이뉴스>는 비록 청와대의 비보도 요청이 부적절하고 기자들의 협의 과정과 결과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지만, 결국 비보도 결정을 일단 따르기로 했다. 청와대에 계속 출입기자를 둬야 권력의 심장부를 감시할 수 있다는 현실적 필요성, 이 대통령 발언의 뉴스 가치, 당위와 현존하는 질서 사이의 괴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정이었다.
시민기자 기사로 인해 이 대통령 발언 공개그런데 그로부터 1주일 뒤 한 시민기자가 이 대통령의 당시 발언 내용을 인지하고, 청와대 출입의 기자들의 '비보도' 결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기사를 보내왔다.
<이데일리>에 소속된 현직 기자이기도 한 김성재 시민기자는 "'일본에 위대한 지도자 나오면...' MB발언 어디로 사라졌나?"라는 기사에서 "대통령의 직접 발언은 하나하나가 통치철학과 정책 방향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오프 더 레코드' 요청을 남발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김 기자는 이어 "더 큰 문제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이를 그냥 받아들였다는 점"이라며 "도대체 어떤 근거로 비보도 요청을 수용했는지" 묻고 있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를 내걸고 있는 <오마이뉴스>는 사실에 기반해 작성된 시민기자의 어떤 기사도 보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따라서 <오마이뉴스> 기자가 청와대의 비보도 요청을 지키기로 한 약속과 별개로, 김 기자의 기사를 보도하기로 했다.
<오마이뉴스>는 이명박 정부 취임 이후 남발되고 있는 비보도·엠바고 요청에 대해 그동안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해왔다. 실제로 지난 3월 '금융위원회 업무보고 건' 등은 <오마이뉴스>의 '저항'으로 결국 24시간 만에 보도가 되기도 했다.
취재원들은 흔히 비보도 혹은 익명보도 요청을 하면서 "이번에 요청을 받아주지 않으면 다음 번에는 편하게 말해줄 수 없다"는 이유를 댄다. 여러 언론사가 경쟁하는 취재 현장에서 이런 요청을 일일이 다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인 것도 사실이다. 현장 기자는 늘 이런 딜레마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