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불온서적'

이게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인지 모르겠다. 나는 직업이 도서관 사서이다 보니 생각의 자유와 자율적 독서를 상당히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특히 국가권력)의 인위적·기계적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불온서적이라는 말에 심한 알레르기가 있다.

현직 대통령을 설치류에 비유하는 유머가 나돌 정도로 세상이 자유롭고 발칙해졌는데 국방부는 뜬금없이 '반정부' '반미' '반자본주의'를 들먹이며 불온서적 목록을 만들어 발표하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략난감' '어이상실'이다.

국방부는 예나 지금이나 규제로써 사람의 생각을 어떻게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불온서적, 너 얼마 만이니?

 군생활 당시 문제가 되었던 최인훈의 <광장>
군생활 당시 문제가 되었던 최인훈의 <광장> ⓒ 문학과지성사

내가 군생활 할 때도 군기강과 보안을 위해 읽어서는 안 될 책들이 있었다. 또 읽어도 되는 책들은 부대장의 검토를 거친 후 이른바 '보안성 검토'라는 딱지를 붙여서 읽도록 했다.

책읽기를 좋아한 나는 상병 6호봉(18개월 차)이 되면서부터 내무반에서 마음놓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보고 싶은 책은 휴가 나가서 가져오기도 하고, 가족들에게 보내달라고 하기도 하고, 휴가 나가는 후임병에게 부탁하기도 해서 어렵지 않게 구해서 읽을 수 있었다.

그 당시 한 달 평균 10권 정도 책을 읽다보니 내 관물대는 늘 이런저런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이 책 때문에 내가 곤란한 일을 겪게 된 적이 있었다. 사건은 97년 12월, 내가 갓 병장을 달았을 때 일어났다.

일석점호 시간에 일직사관(군대 내에서 숙직을 서는 간부)이 위생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내 관물대를 검사하던 중 바탕이 온통 붉은색에 붉은 깃발마저 나부끼는 표지의 책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일직사관은 나에게 '이게 무슨 책이냐'고 물었고, 나는 '최인훈이라는 유명한 작가가 쓴 소설 <광장>'이라고 대답했다. 내 말을 듣고 책장을 넘겨보던 일직사관은 이 책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책의 내용 때문에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고, 일직사관은 다시 한 번 내용에 대해서 물어왔다.

"이게 무슨 내용이냐고?"
"그게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남한 사회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월북을 하게 되는데 말입니다."
"뭐 월북?"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월북을 하긴 하는데 말입니다. 북한으로 간 주인공이 북한체제도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나중에 중립국으로 간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 새끼가 미쳤나, 군인이 월북이나 하는 이 따위 소설이나 보고 말이야 안 되겠구만!"
"아닙니다. 이 책은 나쁜 책이 아니고 말입니다. 청소년 권장도서로도 선정되는 그런 책입니다."
"네가 군인이지, 청소년이냐? 어쨌든 내일 너희 대장님 오시면 보고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이 책은 일단 내가 가져간다."

"권장도서? 네가 군인이지, 청소년이냐"

그렇게 책을 압수당한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고 우리 부대 간부들이 모두 출근했을 때 일직사관은 어제 있었던 일을 우리 부대장에게 보고하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일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보고를 받은 부대장은 이래저래 문제 생기고 신경 쓰는 것이 싫었는지, 아니면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말하며 일직사관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우리 부대 교육담당관을 불러 자신의 도장을 내주면서 내무반에 있는 모든 책들과 카세트테이프, 레코드판에 '보안성검토' 딱지를 다 붙이라고 지시를 했다. 물론 빼앗긴 <광장>은 '보안성검토' 딱지가 붙어서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빼앗긴 <광장>은 이렇게 '보안성검토' 딱지가 붙어서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빼앗긴 <광장>은 이렇게 '보안성검토' 딱지가 붙어서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 문동섭

따지고 보면 소설 <광장>은 남한 사회체제를 비판하고, 월북하는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에 지금 국방부가 불온서적으로 판단한 기준으로 보자면 <광장> 역시 불온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직사관도 문제를 삼은 것이다. 하지만 '보안성검토' 딱지가 붙은 후에는 장병들이 내무반에서 버젓이 돌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불온서적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도 '보안성검토' 딱지가 붙어서 내무반에 비치되어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내무반에서 <태백산맥>도 볼 수 있었던 까닭

정리하자면, 내가 군대 복무할 때도 지금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선정한 불온서적 목록이 있었고 장병들의 독서문화를 감시하는 간부들도 있었지만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또 행정적 절차만 잘 거치면 불온서적도 공식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보안성검토'라는 것이 어떤 기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지, 또 그 실효성은 무엇인지 장병도 간부도 잘 몰랐다. 한 마디로 불온서적 선정이나 보안성검토는 유명무실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10여 년 전에도 이러했는데, 표현이 더 자유로워지고 다양한 정보를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요즈음, 이러한 불온서적 선정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스러울 뿐이다. 또 우리 젊은 장병들이 국방부의 이런 조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염려스럽다.

또한 인터넷서점이 불온서적 특별코너를 마련하고, 그 책들의 판매량이 급증하는 현상을 보면서 이번 조치가 국방부 스스로 자신을 희화화함으로써 조롱거리로 전락시켜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흔히 쓸데없는 일에 과도한 힘을 쓰는 것을 '삽질'이라고 한다. 국방부는 나라 지키러 간 우리 장병들에게 삽질시키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제대로 삽질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군대라는 곳은 국가와 국민을 보호(保)하고, 지켜야(守) 할 의무가 있는 곳이기에 태생적으로 구조 자체가 보수(保守)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한다. 그래서 생각도 유연하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아무리 군대가 보수적이라고 해도 불온서적 선정과 같은 구시대적 산물까지 보호하고, 지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 거기에 맞춰 군대도 변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국방부에 필요한 것은 보수(保守)적 생각이 아니라 생각의 보수(補修)가 아닌가 싶다.

국방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불온서적 목록을 선정하고, 선정된 책을 차단하겠다고 하니 그 삽질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실소하며 지켜 볼 일이다.


#불온서적#국방부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