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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의사 장기려>
<청년의사 장기려> ⓒ 다산책방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한 사내가 여든다섯 해 함께 한 세상을 남겨두고 갔다. "예수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느라 예수를 닮아버린 사내" '장기려'다. 신앙을 가진 자들이 신앙 대상자들을 숭배 대상으로만 여기지만 장기려는 예수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를 닮았다는 말에 기독교 교리와 신학 냄새가 싫어 거부감이 들겠지만 손홍규가 지은 <청년의사 장기려>(다산책방 펴냄)는 '의사'로서 '생명' 충실했던 그를 만나면 '기독교 교리' 냄새가 아니라 '생명'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장기려에게 생명은 가난한 자와 부자,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모두 평등한 하나의 생명이었다.

 

일제 강점기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에 사는 자본가 기독인들은 유곽을 차려 번 돈, 일본군에게 전쟁 물자를 공급한 대가로 평양에 이권을 챙긴 돈, 지주로 살면서 소작인과 소작료를 7:3, 8:2로 나눈 후 수탈로 얻은 수입으로 교회에 헌금하여 영혼의 안식을 구했다.

 

예수를 저버리고, 세속 권력과 세속 자본에 눈먼 기독교 권력은 조국 해방 이후 자신들이 가진 것을 새로 집권한 공산정부가 몰수하자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평양을 떠났다. 하지만 장기려 눈에 비친 그들은 치부의 자유였을 뿐이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피난을 떠난다고 하지만 정작 일본이 신앙의 자유를 빼앗았을 때는 숨죽여 지냈던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신앙의 자유란 곧 치부의 자유였다."

 

돈에 예수를 팔고, 권력에 예수를 팔아 버린 숱한 잘난 예수장이들은 신앙을 말하고 진리를 입으로 말했지만 그는 입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보여주었다. 생명을 있는 그대로 보았다. 화석화된 교리보다는 생명을 택했다.

 

"저는 의사입니다. 만약 당신이 위급한 병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저와 같은 의사가 주일성수를 이유로 당신에게 오지 않는다면, 그래도 당신은 기꺼이 받아들일 자신이 있습니까?"

 

장기려가 이념과 사상, 권력이 아니라 생명만을 위하여 살았던 단적인 예는 당시 최고권력자 김일성을 수술한 예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북한 김일성을 수술하고 나서 그 공로를 치하하자 "저는 특별히 신경 쓴 게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 환자에게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 환자가 돈이 있나 없나, 지위가 높은가 낮은가 따위는 상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장기려의 놀라운 답에 김일성이 "만약 지금 여기 누워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닌 이승만이라 해도 그랬을 거냐"고 묻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장기려에게 김일성과 이승만은 '권력자'가 아니라 치료받아야 할 '환자'일 뿐이었다.

 

최고 권력자와 비천한 자와 군인, 어떤 누구를 대해도 치료받아야 할 환자였을까? 왜 그는 생명에만 관심을 가졌을까? 송도보고 시절 동무였던 김주필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모른 척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과 "만약 제가 의사가 된다면 의사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라고 신께 드린 서원 때문이다.

 

가난한 자를 모른 척하지 않고, 의사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살겠노라고 한 약속과 서원은 공허한 소리가 아니었다. 갈등, 실패, 좌절을 경험하면서 몇 번이고 거듭남을 반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진료하고, 항상 무의촌 등 낮은 곳에서 병든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자처했다. 195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간 대량절제수술에 성공했을 만큼 실력 있는 의사였다. 또한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효시인 청십자 의료보합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아무도 밟지 않았던(未踏) 길을 장기려는 가기 원했고, 갔다. 마지막 가는 길 그의 옥탑 셋방에서 발견된 것은 낡은 의사 가운과 희미해진 가족사진뿐이었다. 그랬다. 그는 동무와 신에게 서원한 것을 이루었다.

 

"왜 아픈 사람을 일컬어 환자라고 하는지 아나? 환(患)은 꿰맬 관(串) 자와 마음 심(心) 자로 이루어져 있다네. 상처받은 마음을 꿰매야 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네. 다시 말해 환자란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줄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야. 눈에 보이는 상처는 치유하기 쉽지만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네. 자네가 진정한 의사가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환자의 마음을 고치는 의사가 되어야 하네."

덧붙이는 글 | <청년의사 장기려> 손홍규 지음 ㅣ 다산책방 ㅣ 11,000원


청년의사 장기려 -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성자, 개정판

손홍규 지음, 다산책방(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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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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