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치고 다시 날이 푹푹 찝니다. 손가락이 냉풍기 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입니다. 오늘은 배내옷 입은 둘째에게 바람이 갈까 봐 참지만, 언젠가는 전기요금 때문에 눈물을 뿌리며 참아야 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유가가 이대로 배럴당 380달러까지 오른다면 말입니다.
"원유 값이 배럴당 380달러를 돌파한다면 우리의 삻은 어떻게 될까요?"
짧은 질문에 200페이지로 대답한 책이 있습니다. <(거의) 석유 없는 삶>(제롬 보날디 지음, 성일권 옮김, 고즈윈 펴냄)은 프랑스 저널리스트 제롬 보날디가 몇 가지 근거에 입각해 십 년 뒤의 생활을 예측한 책입니다.
유가 폭등한 미래의 삶, 지금 제 모습과 다를 게 없는데요?
뻔한 질문이니 결론부터 얘기합니다. 이틀 안에 지구 어디든 갈 수 있던 '슈퍼맨'에서 자전거로 바캉스를 떠나는 19세기 스타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생태계 파괴를 내 몸 같이 아파하는 사람들이나 귀농보다 한 술 더 떠 자급자족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멀지 않은 미래에 쟁취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행복한 세상이 도래할 것입니다.
하지만 손재주가 없어서 뭐든 남이 만들어준 것을 사다 쓰고, 틈만 나면 어디론가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는 역마살에 해외수가 낀 사람들은 끙끙 앓는 인생 후반부를 보내게 될 공산이 큽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오늘날 석유 가격은 이미 통제 범위를 넘어섰다. 2003년 8월 배럴당 29달러였던 것이 2006년 4월에는 150퍼센트나 오른 75달러였고, 2008년 6월에는 130달러를 넘어섰다. 전문가들은 10년 안에 380달러를 돌파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저자의 예상대로 2016년 5월 5일에 유가가 배럴 당 380달러에 육박한다면 석유에 의존한 우리의 삶은 상당 부분 달라질 것이 자명합니다.
"과일 몇 개를 사기 위해 1톤 무게의 자동차를 끌고서 대형매장에 가는 일은 이제 지난 시대의 풍경이 될 것이며, 그 대신 동네에 있는 작은 가게의 장점을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 겨울철에 가장 적합한 난방 수단은 뭐니 뭐니 해도 목까지 올라오는 두툼한 스웨터와 내복일 것이다."
읽고 보니 바보 같습니다만 부끄럽게도 현재 저의 모습입니다. 겨울에도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어 놓고 가벼운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고 살면서, 먹을거리 조금 싸게 사려고 자동차를 끌고 대형마트에 갑니다. 동네 슈퍼로 걸어나가 밀가루나 아이스크림 사 먹어 본 게 언제적 일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이 책 1장은 슈퍼맨에서 크로마뇽인으로 회귀하게 될 우리의 상황과 배럴당 380달러가 될 수밖에 없어 보이는 원유 시장의 징후들을 증거로 보여줍니다. 2장에서는 유정탑이 마르고 있다는 사실부터 대체 에너지 개발의 현주소와 부정적인 미래를 알려줍니다. 막연하게 과학의 눈부신 발전이나 핵 에너지, 원자력 따위를 믿고 있던 저 같은 사람들에게 좋은 정보입니다. 이어 3장에서는 거의 석유 없는 삶은 어떤 형태일런지 예상되는 미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농업이나 수공업 관련 직업이 늘어나고, 우아한 승마 도로의 부활을 그려 보입니다. 뗏목이나 수레도 좋은 이동수단이 되겠지요.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석유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유가가 몇 달러를 돌파했다는 뉴스에 민감해지게 됩니다. 난방 시스템, 온수, 섬유, 시멘트, 유리, 종이, 비료, 금속, 자동차, 농산물, 전기, 전자, 냉동, 석유화학, 플라스틱 제품들(포장지, 케이블과 커버, 파이프, 피복, 병, 필름, 거푸집 등) 없이 인간적으로 품위 유지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지요.
석유 값이 오르는 게 반드시 나쁜 상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자동차 타고 출퇴근하면서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살았지만, 자전거로 이동하면서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게 될 테고, 제철 음식으로 식탁이 건강해질 것입니다. 석유 사용이 줄어들면 자동적으로 공기가 맑아지겠지요. 무엇보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끌려다닐 필요가 없이 지역 중심의 경제와 문화체제로 재편될 테니 속도전에서 이탈해 삶에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에너지를 수입해야 하는 에너지 빈국입니다. 게다가 효율도 낮지요. 저자가 내놓은 가장 확실한 해결책 하나는 '아껴 쓰는 것'입니다. 단순한 논리지만 게걸스럽게 사용해 온 우리에게 가장 뼈아프고 가장 필요한 채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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