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8월 5일~11일 일정으로 방한한 아마미야 카린. 일본 프리터 노조의 활동가이자 왕성한 글을 쓰는 르포작가이기도 하다.
8월 5일~11일 일정으로 방한한 아마미야 카린. 일본 프리터 노조의 활동가이자 왕성한 글을 쓰는 르포작가이기도 하다. ⓒ 장일호
 아마미야 카린과의 간담회를 위해 모인 서부비정규센터(준) 모임과 삶이 보이는 창 르포문학 모임 회원들.
아마미야 카린과의 간담회를 위해 모인 서부비정규센터(준) 모임과 삶이 보이는 창 르포문학 모임 회원들. ⓒ 장일호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도, 발표자의 이름이 적힌 명패도 없었다. 7일 오후 7시 30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아담한 세미나실은 서부지역비정규센터 준비모임 활동가들과 '삶이 보이는 창' 르포문학모임에 참가하는 회원을 비롯하여 약 25명 정도의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북적였다.

 

소박한 장소였으나 손님은 특별했다. 일본으로부터 온 그의 이름은 아마미야 카린(34). 생김새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요즘 즐겨입는 옷이 롤리타풍'이라더니 흰 원피스와 머릿수건, 노랗게 물들인 긴 머리가 그야말로 소녀스러웠다. 이름 뒤에 붙는 수식어들도 화려하다. 작가·에세이스트·뮤지션·<주간 금요일> 편집위원·반빈곤네트워크 부대표, 그리고 전 '우익활동가'.

 

생김새부터 프로필까지 온통 궁금증을 자아내는 그는 현재 일본의 노동과 생존권 문제에 올인 중이다. '프리터 노조'의 활동가로 또 르포 작가로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는 그의 이야기와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를 걱정하는 이들의 고민이 머리를 맞댔다. 장장 2시간30여분간 이어진 간담회는 한·일의 노동운동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쏟아냈다.

 

죽고싶다, 이게 내 탓일까

 

아마미야 카린이 처음 노동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2006년 4월의 일이었다. 일본의 프리터 노조가 '프레카리아트'를 내걸고 한 노동절 행사에 참여한 것이 계기였다.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성'이란 뜻의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로서 '신자유주의화 세계 아래서 불안한 사람들'을 뜻한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쓰여 유럽에 번진 말이 일본으로 들어온 것으로서, 최근 몇년 간 유럽과 라틴의 신좌파 시민운동가들 사이에서 새로이 부상중인 개념이다. 사회보장 제도의 기반이 흔들리는 현 상황에서 사회보장조차도 힘 있고 부유한 자들에 의해 휘둘리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혁파하려는 운동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그는 "내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내 자신의 생활고 때문"이라며 "현재 일본은 하루에 90명 꼴로 자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그 또한 자살미수 경험이 있었다) 그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원인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런 사회상황은 그야말로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 그렇게 찾아간 프리터 노조의 노동절 현장에서 그는 '살게 하라'는 구호를 듣는다. 그는 그 구호를 들으며 "2006년의 일본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생존을 요구해야 하는 게 충격"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에게 그 상황은 한편으론 감동적이었다. "힘든 상황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문제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반가웠던 것. 생활고에 시달리던 또래들이 자살하면서 모든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아마미야 카린, 통역을 맡아준 후지 다케시, 서부비정규센터(준) 모임 회원인 이류한승 씨.
왼쪽부터 아마미야 카린, 통역을 맡아준 후지 다케시, 서부비정규센터(준) 모임 회원인 이류한승 씨. ⓒ 장일호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쳐드립니다

 

그는 그 때부터 일본의 노동현장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취재하다 보니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시골마을의 할 일 없는 청년들을 납치하다시피 해서 파견업체에 등록시키고 공장으로 보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가난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해서 돈을 벌고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분노'했다.

 

분노는 노조활동 참여로 이어졌다. 그는 활동가들과 함께 파견업체에 등록해서 현장의 불법 행위들을 적발해내고 노조를 조직했다.

 

특히 올해의 가장 큰 성과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무직·실업자도 함께 목소리를 내는 이른바 '독립 노동절 행사'를 치러낸 것이다. 그들이 내 건 것은 '자유와 생존'이었다. 그리고 일본 북의 훗카이도에서 남의 규수까지 14군데서 사람들을 조직하고 행사를 열었다.

 

그는 노동과 생존의 문제를 비정규직에만 한정짓지 않았다. 독립 노동절 행사에는 정규직도 참여했다. 이른바 '야근수당 없이 야근하는, 시간당 계산하면 비정규직만도 못하는 정규직들'에게도 참여의 문을 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부자가 아닌 거의 모든 사람이 참여한 노동절 행사"였다. 그는 이 운동을 단순히 노동운동으로 부르지 않고 "노동생존운동"으로 지칭했다.

 

그와 프리터 노조 활동가들은 노동운동의 틀을 넘어섰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사채 정리 상담을 하거나 굶어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에겐 돈이나 쌀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의 바람은 "어떻게 하면 안 죽고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는 것. 그는 프리터 노조를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생명줄이자 피난처"라고 정의했다.

 

"프리터족은 행복한 거 아니었어?"

 

아마미야 카린의 이야기가 끝나자 사람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프리터는 '자유(free)'와 '아르바이트(arbeiter)'의 합성어로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면서 남는 시간에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일본 신조어였다. 그런 프리터 족에게 '노조'라니?

 

한 참석자는 "일본의 프리터족은 행복하다고 알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아르바이트생도 높은 임금을 받고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아마미야 카린은 "실제로 그런 시기가 있었지만, 일본의 거품경제 절정기인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그 때는 시간당 임금도 많았고 부모의 고용형태도 안정적이어서 프리터족도 넉넉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

 

문제는 거품경제가 붕괴된 90년 대 중반 이후. 시급은 떨어지고 부모들은 고령화되었다. 카린은 "특히 일본은 집세가 매우 비싸다, 시간당 800엔(한화 약 8000원 정도)의 돈으로는 혼자 먹고 사는 것도 빠듯하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30대가 되어 아르바이트도 하기 어려워진 프리터족은 건강이 나빠졌을 뿐더러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급기야 2003년에는 부모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청년이 부모가 죽고난 뒤 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마미야 카린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던 사람들은 질문을 쏟아냈다.
아마미야 카린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던 사람들은 질문을 쏟아냈다. ⓒ 장일호

한 참석자는 일본의 비정규직 상황에 대해 질문했다. 카린은 "전체 인구의 33.7%인데, 24세 이하가 50%이고 여성도 50% 이상"이라고 밝혔다. 그는 "90년대 중반 이후 기업의 신규채용이 거의 없거나 한정적이었다"며 "당시 학교를 졸업한 현재의 25~35세 사람들을 '잃어버린 세대'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 인구가 2200만 명이 된다.

 

그는 "이들은 평생 저임금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사회 문제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꼬집었다. 많은 사람들이 청년 비정규직에 대해 "노력을 안 하고 의욕이 없다"고 치부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젊은이들은 '자기 책임론'에 빠지게 된다. 그것이 그가 운동을 하가는 데 있어 가장 큰 장벽이다.

 

사운드 시위, "재밌는 사회가 좋은 사회"

 

아마미야 카린이 말하는 운동의 핵심은 '재미'다. 그는 실제로 사운드 시위를 통해 창조적 시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시위 대오 앞에 음향시설을 준비해 DJ가 튼 음악에 맞춰 춤추면서 시위하는 것이 그것이다.

 

비정규직 대부분을 차지하는 젊은이들에게 친숙한 표현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재밌으면 자주 나오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노조 조합원이 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야 활기가 생기는 것"이라고 자신의 전략(?)을 소개했다.

 

이어 "우리는 가난하기 때문에 오히려 창조적일 수 있다"고 말하며 웃었다. 또한 재정문제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돈이 없는 사람을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프리터 노조의 운영은 자원봉사식이다. 그는 "돈도 못받고 일하는면서도 자기가 좋아서 하는 사람들"이라며 "그런 면에서 우리 노조 사람들은 변태"라고 해맑게 웃었다.

 

야마미아 카린과의 간담회를 주관한 두 단체

 

'삶이 보이는 창' 르포문학모임은 르포문학에 천착해오면서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작업하고 있다.

 

2006년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나고 취재한 결과를 묶은 책 <부서진 미래>를 출판했고 최근 이랜드 지원대책위원회와 함께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를 엮어냈다.

 

서부비정규센터(준)는 2006년 9월부터 홈에버 월드컴점(상암점)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일을 해왔다.

 

비정규직 문제가 개별 사업장 내에서 해결하기 어렵기기 때문에 지역 조직이 필요하다는 고민으로 시작됐다. 현재는 지역내 비정규직을 조직하거나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준비모임을 갖고 있으며 앞으로 센터를 꾸려나갈 예정이다.

 

한 참석자는 우익활동 경력을 짚었다. 그는 "애국심이 있어 들어간 건 아니다, 불안정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국가를 의지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나를 돕지 않았다, 이미 사람들이 그런 걸 많이 깨닫고 있고 우경화 문제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간담회는 밤 10시를 훌쩍 넘겨서야 마무리 됐다. 이어진 술자리에는 그의 친구들도 함께 해 한·일 양국의 언어가 시끌하게 오갔다.

 

그동안 그는 전국백수연대와 수유+너머 등의 모임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고 이주노동조합과 이랜드 천막 농성장을 찾기도 했다.

 

11일 출국하는 카린은 "이번 주 토요일은 10대연합과 함께 촛불집회도 나가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장일호 기자는 <오마이뉴스> 8기 대학생 인턴기자 입니다. 


#아마미야 카린#비정규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