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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집무공간이다. 창경궁에 있다.
▲ 양화당. 인조의 집무공간이다. 창경궁에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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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골대가 군사를 이끌고 안주에 도착했다는 급보를 받은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안주가 어디인가. 청천강 이남이고 평양이 지척이다. 마음만 먹으면 대동강을 건너 한달음에 한성까지 달려올 거리다. 또다시 청나라 군사들이 궁궐에 난입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이제 겨우 안정을 찾은 조정이다. 위기감을 느낀 인조는 대소신료들을 불러들였다.

"대신들이 김상헌을 불러올 것을 품의해서 그렇게 정했는데 지금까지 시행하지 않아 나라가 욕되고 소란스럽게 되었다. 그날 입시하였던 유사당상을 모두 나추하라."

불똥이 당산관들에 떨어졌다. 인조의 지시는 확실한 명도 아니었다. 심정적으로 김상헌에게 동조한 당상관들이 면피용 하명으로 해석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문제가 되니까 잡아들여 죄를 물어 라는 것이다. 명을 시행하지 않고 미적대던 임담과 허계가 파직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비국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마를 안동에 급파했다. 학가산 아래 석실에 은거하고 있던 김상헌은 모든 것을 하늘의 뜻이라 여겼다. 김상헌이 안동을 출발했다는 보고를 받은 인조는 중사를 중로에 파견하여 위로하고 초구(貂裘) 1벌과 백금 5백 냥을 전했다.

송파나루터 표지석.
▲ 송파나루터. 송파나루터 표지석.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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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이 문경새재를 넘어 송파나루에 도착했다. 멀리 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목멱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만감이 교차했다. 김상헌이 흥인문을 통하여 도성에 들어왔다. 동료 대신을 사지로 들여보내야 하는 조정은 충격에 빠졌고 백성들은 술렁거렸다.

"김상헌의 일이 더없이 비통스럽다.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겠는가?"

"김상헌이 끝내 이역으로 떠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성상의 본심이겠습니까?"
승평 부원군 김류가 내심 옷깃을 여몄다.

"간사한 자가 나라를 파는 기화가 되었으니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영중추부사 이성구가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연호를 쓰지 말도록 사주했다는 말에 대해서는 조정이 분명하게 해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러 신하들이 횡의(橫議)한 문자는 신들이 원고를 보지 못하여 어떻게 표현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울러 자문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판중추부사 심열이 조정 차원에서 자문을 보내 김상헌의 죄를 해명하자고 주장했다.

"신득연이 이미 입증하였으니 자문(咨文)에 쓸 말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경들의 소견이 이러하니 계사대로 시행하라."

자문과 밀서를 휴대한 밀사를 급파했다. 안주에 도착한 밀사는 정명수에게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어미에게 월료(月料)를 지급한다는 밀서를 전하면서 은 1천 냥을 찔러주었다. 뿐만 아니라 용골대와 장수들에게 바치는 내구마를 넘겨주었다. 뇌물이다.

무력시위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철수하라"

용골대는 군사를 이끌고 의주로 돌아갔다. 표면상으로는 김상헌이 한성에 도착하여 곧 출발할 것을 확인했다는 명분이었지만 무력시위가 끝났으니 원위치로 복귀한 것이다. 한성에 머물던 김상헌은 임금을 알현하지 않았다. 인조 역시 부르지 않았다. 피차 거북한 입장이었다. 김상헌은 상소 한 장을 궁에 밀어 넣고 북행길에 올랐다.

"국문(國門)을 지나 궁궐과 멀어지니 근심스런 마음에 사모하는 생각만 더해갑니다. 성상께서 하찮은 신에게 내사를 보내 안부를 물어주시고 초구를 보내주시니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조정에 나아가 다시 용안을 뵈옵게 된다면 비록 죽는 날이라 하더라도 사는 날과 같을 것입니다. 신은 성상께 향하는 피눈물 어린 충정을 억누르지 못하겠습니다."

김상헌이 운종가를 지나 돈의문을 빠져 나갈 때 도성의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통곡했다. 김상헌이 무악재고개를 넘어 의주로 향했다는 보고를 받은 인조는 대소신료들과 마주 앉았다.

"재상을 붙잡아 보냈으니 나라의 참혹함이 정축년과 다름없구나. 이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김상헌의 상소를 보니 이는 바로 영결하는 뜻이다. 참으로 비통하다."

인조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이제는 김상헌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청나라 문제로 의견이 엇갈려 애증이 깊었지만 나라의 기둥이었다. 그가 젊은 대관들의 공격을 무릅쓰고 나덕현을 두둔했던 것으로 보아 무조건 청나라를 배척한 위인은 아닌 것만 같았다.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역사가 두려울 뿐이다

"그와 내 머릿속에 각인된 존주양이는 인정한다. 후금에 기울던 광해를 몰아낸 것이 반정이지 않았는가. 명나라를 섬기자는 생각은 서로 공유한다. 하지만 청나라의 가공할 무력 앞에 그는 '싸워보고 화친을 받아들여도 늦지 않다'고 역설했고 그와 생각을 달리하는 신하들은 '결과가 명약관화하니 화친을 승복하자'고 주장했다. 나는 후자에 동의했다. 그 길이 백성의 도륙을 방지하고 국채를 보존할 수 있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서로 생각의 차이다. 상헌이 주장한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이 옳은 것인지? 화친을 받아들이고 기회를 엿보자는 판단이 옳은 것인지? 후세의 사가들이 평가할 것이다. 그것이 두려울 뿐이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인조가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경들은 상헌을 보았는가? 그의 뜻이 어떠하던가?"

"그 사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저들에게 가서 말하는 과정에 노여움을 폭발할 염려가 없지 않기 때문에 친구들이 모두 그 점을 경계하라 일렀습니다."

떠나기 전 김상헌을 만난 심열이 경과를 아뢰었다. 심열과 김상헌은 한 살 차이로 사석에서는 친구처럼 지냈다. 김상헌과 조한영, 채이항이 의주에 도착했다. 안주에서 철수한 용골대가 홍서봉을 비롯한 의주재신들을 의주관으로 불렀다. 관아 상단에 삼전도 비석을 확인하고 돌아온 오목도와 용골대가 앉고 좌우에 장수들이 앉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누워서 심문받는 김상헌, 괘씸죄를 걸어? 말어?

이윽고 김상헌이 관아에 들어섰다. 베옷에 짚신을 신고 지팡이에 몸을 의탁한 김상헌이 용골대에게 절을 하지 않고 이현영을 의지해 누웠다. 김상헌의 돌출행동에 놀란 것은 오히려 청나라 사람들이었다. 알아서 기어야 할 죄인이 인사도 없이 턱하고 누워있으니 기가 찼다. 용골대와 오목도가 머리를 맞대고 숙의했으나 대책이 없었다.

"우리들은 다 알고 있다. 모두 말하라."

"묻는 말이 있어야 대답할 것이다. 단초를 말하지 않고서 무조건 말하라 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김상헌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정축년에 국왕이 성을 나와 항복했는데 유독 그대만 청국을 섬길 수 없다 했다. 또 임금을 따라 성을 나오지 않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도였는가?"

:내 어찌 우리 임금을 따르려 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노환으로 따르지 못했을 뿐이다."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하였는데도 받지 않고 고신을 반납한 것은 무슨 의도였는가?"

"노환이라 국가에서 직에 제수한 적이 없는데 무슨 관직을 제배하여 받지 않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처럼 허탄한 말을 어디서 들었는가?"
김상헌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잔뜩 주눅 들어 묻는 말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문했다. 녹녹치 않음을 직감한 용골대가 화제를 바꿨다.

"주사를 징발할 적에 어찌하여 저지하였는가?"

"내가 내 뜻을 지키고 나의 임금에게 고하였는데 국가에서 충언을 채용하지 않았다. 그 일이 다른 나라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굳이 듣고자 하는가?"
칼날 같은 반격이다. 반말 투의 김상헌은 오랑캐를 멸시하는 어투였다.

너희와 우리는 나라가 다르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일 뿐이다

"어찌해서 다른 나라라고 하는가?"

"피차 두 나라는 각기 경계가 있는데 어찌 다른 나라라고 할 수 없는가?"

용골대를 쏘아보는 김상헌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용골대 역시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숨 막히는 긴장이 흘렀다. 지켜보던 홍서봉의 숨이 턱에 탁 걸리고 윤휘의 목이 뻣뻣해졌다. 승지 이덕수, 감사 정태화, 병사 이현달, 빈객 이행원, 보덕 정치화 등 배석한 관리들의 손에서 땀이 흘렀다.

괘씸죄를 걸어도 싸다. 하지만 괘씸죄를 걸기에는 상대가 너무 버겁다. 단상에 앉아있던 오목도가 용골대에게 속삭였다.

"조선 사람은 우물쭈물 말하는데 이 사람은 대답이 매우 명쾌하니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조선에도 이토록 기개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이 자를 내보내고 조한영과 채이항을 들라 일러라."

한바탕 회오리가 지나갔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합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목이 탈 지경이었다. 이조판서 이현영의 부축을 받으며 김상헌이 밖으로 나갔다. 조한영 역시 비굴하지 않게 들어왔다. 조한영과 신득연의 대질에 이어 채이항의 심문을 끝으로 신문이 종결되었다.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김상헌, 신득연, 조한영, 채이항을 심양으로 압송하라."
용골대의 명이 떨어졌다. 예상된 수순이었다.


태그:#김상헌, #용골대, #인조, #조한영, #채이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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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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