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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요즘 유행하는 '일반 시민'은 아니다. 보수언론이 만든 프레임이기도 하고, '일반 시민 대 운동권'이라는 구도도 좀 웃겨서 비판하곤 하지만, 어쨌든 따져보면 순박한 얼굴로 "전 일반 시민이에요"라고 하긴 좀 민망한 구석이 있다. 차라리 그들이 이야기하는 '프로'(운동권)에 조금 더 가깝다고나 할까.

 

그런 나에게 5월부터 시작된 '거리 촛불'은 끊임없는 의문을 던졌다. 청소년들이 왜 거리에 있을까? 이 행진은 누가 이끌고 누가 방향을 잡는 걸까? 한국처럼 군사적인 사회에서 비폭력 외침은 어디서 나왔을까? 왜 김밥과 물이 남을까? 새벽에 집에 안 가고 거리에서 사람들이 버티는 이유는 무얼까?

 

'프로'랍시고 좀 안다고 생각했지만 혼란스럽고 놀라웠다. 그런데 혼란스럽기는 이걸 진압하려는 저쪽 '프로'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 초는 누가 샀느냐고 물었다. 그래, 정말 그 초는 누가 샀을까? 촛불과 함께 거리에서 보낸 시간은 그러한 질문이 조금씩 풀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직도 촛불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되돌아본다는 표현이 적절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 글을 통해 2008년 촛불들과 함께 참 많이 궁금했고 배웠던 몇 가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런 나의 정리가 지금 미친 듯이 사람들을 잡아넣고 있는 저쪽 '프로'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프로'란 무언가. 그걸로 돈을 버는 사람이다. 무식은 죄가 아니지만, 월급 받으면서 무식한 것은 죄다.

 

밤은 왜 새는 겁니까?

 

정말 궁금했다. 나도 그 속에 앉아있었지만, 5월 말 새벽 교보문고 앞의 장면은 비현실적이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들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전경차를 바라보며 누가 본다고 손피켓 들고 서있는 이들, 가로등 불에 책장을 넘기는 이들. 이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시대에 말이다. 이런다고 돈이 나오나, 경력이 인정되나. 도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 거리에서 밤을 새울까.

 

진심이었던 것이다. 진심으로 청와대로 갈 작정이었다. 가서, 만나서 자신들의 뜻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대통령의 결단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은 묵묵부답. 대통령 취임한 지 채 100일이 지나지 않았고, 국회의원 선거는 이제 막 끝난 시점. 게다가 국회는 보수정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상황에서 시민들에겐 방법이 없었다. 누가 봐도 엉망인 협상. 게다가 내 입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문제. 절박했다.

 

그래서 그렇게 눌러앉아 기다렸다. 마이크 잡은 이가 "해산합시다"하면 "뭐가 해결되어서 해산입니까? 너나 가세요"하며 버텼다.

 

촛불집회를 분석한 동아시아연구원(EAI)의 최근 보고서에는 이렇게 청와대행을 고집한 것이 '지도부 부재에서 기인한 몰전략적 행동'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맞다. 전략과 전술로써 그렇게 한 것이라면 그처럼 많은 이들이 무모하게 거리에서 밤을 새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청와대로 갈 작정입니까? 네. 그래서 이렇게 밤새 앉아있는 겁니까? 네. 진심이었다. 그게 더 무거운 거다.

 

2002년도 촛불집회 때 "미대사관 갑시다!"하면 가다가 대치하고, 밀고 당기고, 그리고 집에 갔다. "지도부가 타협적이다!" 외치면서 더 열심히 밀어보았지만, 고백한다. 그렇게 끝내는 게 분해서 그랬지, 사실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조금 더 하고 집에 갔을 뿐. 꽤 전략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2008년의 촛불은 정말 갈 작정이었다. 그 진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6월 10일 태평로에는 '명박산성'이라는 장관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미 그 순간, 그 모양 빠지는 짓을 하게 만든 순간, 진심은 이긴 거다.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비폭력! 비폭력!

 

묵묵히 기다렸던 새벽은 촛불이 가진 비폭력적 가치의 한 단면이다. 우리는 힘과 힘의 대결에서 빠르게 결정되는 승부에 익숙하다.

 

예전 운동권이었다면 그렇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밀어서 뚫고 나가든지, 아니면 해산하든지. 그러나 전자는 승산이 크지 않고, 후자는 억울해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낯선 전략을 택했다. 비폭력. 끈질기게 버티는 것.

 

한국은 매우 군사화된 사회다. 군부가 30년 넘게 집권한 역사, 분단이라는 배경 위에 정권의 통제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아직도 전 사회를 옥죄는 안보 이데올로기, 폭압적인 시위진압문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저항폭력은 쉽게 용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비폭력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이 촛불을 '운동권'이 시작하거나 주도하지 않은 것이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즉, 운동권 내부에 존재하는 저항폭력에 대한 긍정이 시민들 사이에서는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운동권은 스스로의 폭력에 대해 약자의 폭력이라는 이유로 쉽게 용인하곤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러한 정당성을 의심했다. 바로 이것이 비폭력이 유효한 전략으로 올라설 수 있는 토대였다.

 

물론 시민들이 초기에 택한 비폭력 논리는 보수매체를 통해서 각인되어온 폭력-불법 집회에 대한 거부감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또한, 비폭력을 통해서 스스로를 기존 운동권들과 다른 '순수한 시민'으로서의 위치짓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러나 이러한 출발은 결국 그 지형을 만든 보수언론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갔다.

 

조중동 파놉티콘에 갇혀 있다고, 쓰레기를 줍는 것도 다음날 조중동에 어떻게 실릴지를 걱정해서 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비판했지만, 촛불은 진화해나갔다. 그렇게 비폭력을 외쳤는데도 촛불이 변질되었고, 폭력이 난무하는 광란의 새벽이라니. 시민들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비폭력은 전략의 수준으로까지 나아갔다. YMCA의 '눕자'나 '815평화행동단'의 모습은 그러한 전략의 한 쪽 정점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전략으로서의 비폭력처럼 적극적이 되기 위해서는 공포를 극복해야 한다. 공포는 폭력을 만들고 행사하게 하기 때문이다. 맨몸의 시민들이 무장한 공권력 앞에서 어떻게 그 공포를 이길 수 있었을까?

 

외롭지 않아요, 혼자가 아닌 걸요!

 

마틴 쇼(Martin Shaw)라는 학자는 비무장 저항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집단 내부의 연대감이 우선시되는 조건이라고 지적한다. 그러한 연대감이 폭력에 대한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기제를 만들어내고 무장이 아닌 다른 방식의 저항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08년 우리에게 연대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누군가 스스로를 지켜보며 함께하고 있다는 믿음이 그런 연대감을 만든 큰 축이 아니었을까 한다. 철저하게 고립된 1980년 광주에서 시민들에게는 택할 수 있는 선택항이 없었다.

 

그러나 2008년의 거리는 달랐다. 조금이라도 충동이 생기면 사람들은 휴대폰의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플래시 빵빵 터지는 큼직한 카메라들과 노트북에 연결된 생중계 캠코더들은 시민들에게 든든한 '빽'처럼 느껴졌다.

 

과거보다 보편화된 기기들을 통해 많은 현장이 기록되었고, 데스크에서 걸러지는 뉴스가 아닌 개인 블로그와 소규모 언론을 통해 기록된 내용들이 직접적으로 공유된 것은 연대감의 큰 자원이었다. 그러나 2008년의 촛불은 여기에서 더 나아갔다. 인터넷으로 집회가 생중계되는 날이 올 줄이야.

 

집회에 참가하지 못한 이들은 인터넷 앞에서 같이 밤을 새웠고 흥분하고 분노했다. 집에 있는 이들은 참가한 이들에게 각각의 생중계를 종합해서 전체 상황을 알려주었으며,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집에 있다가 달려나가기도 했다. 나 역시 과천의 친구 집에서 집들이하다가 생중계를 보고 안 되겠다 싶어서 세 명이 만원씩 모아 택시타고 광화문으로 향하기도 했다.

 

나만의 경험일까. 물대포를 맞고 떨고 있는 이들을 보다 못해 수많은 이들이 집에 있는 수건을 들고 나왔다. 이 새벽을 많은 이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마음. 그 자신감. 2008년 촛불의 연대감은 이렇게 최첨단 IT를 타고 만들어졌다.

 

젖과 꿀이 흐르는 병역거부자 농성장

 

양심선언 의경 이길준 농성장에서 그러한 연대감의 정점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농성장에서 언론담당이라는 역할을 맡아 함께하게 되었는데, 그 경험은 거리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강렬했고 더 많은 고민들을 던져주었다.

 

먼저 가장 놀랐던 것은 사람들의 아낌없는 후원이었다. 아마 이길준씨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병역거부를 선언한 사람 중에, 아니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동안 전무후무할 지원과 지지를 받지 않았을까 싶다.

 

병역거부자라면 인터넷 악성댓글 천 개도 거뜬한 한국에서 수많은 이들이 매일 이길준씨를 지키고 응원하기 위해 밤을 새고 음식을 날랐다. 무엇이 병역거부자가 그토록 따뜻한 지지를 받게 한 것일까?

 

공감이 아닐까. 그가 거부하는 폭력에 대한 공감. 그런 폭력을 행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공감. 이미 오랜 시간 거리에서 공권력의 폭력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그 속에 한명이었던 젊은이가 느꼈던 죄책감과 이를 거부하기로 한 결정에 공감했고 병역거부자에게 적극적인 연대를 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연대는 참 대단했다. 말로만 듣던 '82cook'분들이 오셔서 식단을 체크하고 관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복날에는 유명한 '다인아빠'가 삼계탕 400인분을 쏘셨다. 어떤 분들은 쑥스러운지 과일이 가득 담긴 봉지와 쪽지만 놓고 가기도 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농성장이었다.

 

농성장 침탈을 대비해 성당 마당에서 매일 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이 밤을 새웠다. 불편하면 어찌어찌 하라고 안내하면 "밤 새는 거 선수들이니까 걱정 말고 좀 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차분하게 돗자리 위에서 자리를 지키는 분들, KBS 앞에 있다가 지금 막 도착했다는 '촛불다방' 분들의 모습,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컬러TV'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건 분명 새로운 무언가라는 확신이 들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떠올리면 뭉클한 그 무엇.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줄 아는 용기

 

세상이 바뀔 것 같았던 5월과 6월도 지났고, 더 이상은 밀리지 않겠다며 으르렁거리는 경찰과 검찰의 탄압에 묵묵히 촛불을 이어나갔던 7월과 8월도 지났다. 미국산 쇠고기는 유통이 시작됐고, 이명박 대통령은 이제 좀 숨통이 트였는지 국민과 대화도 했다. 실정법은 어겼지만 인간의 도리를 어기진 않았다며 자진 출두했던 이길준씨가 성동구치소에 들어간 지 곧 한 달이 된다.

 

여전히 내가 경험한 것이 무엇이라고 정의할 자신은 없다. 그럼에도 촛불을 통해 얻었던 큰 감동과 배움을 조금이나마 많은 이들과 나누고 유지하고 싶다. 돌아본다는 것은, 계속 이어가겠다는 마음이다.

 

그 배움 중에 굳이 하나를 뽑자면, 촛불을 들었던 우리 사이에서 함께 나누었던 용기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줄 아는 용기. 이 용기는 참 어렵다. 스스로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야만 진심으로 다른 이를 이야기하고 연대할 수 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전·의경도 맞으면 아플 거야. 이쪽이든 저쪽이든 사람 안 다치는 것, 이게 비폭력이었다. 인터넷 방송 보다가 뛰어나가는 마음. 내가 나간다고 뭐 달라지겠느냐만은 그래도 이렇게 보고만 있기에는 저 사람의 아픔이 자신에게 크게 다가오기에 견딜 수가 없어서. 절대 이해할 수 없다던 병역거부자에게도 그가 겪었고, 거부하기로 마음먹은 폭력의 처절함을 공감하면서 손을 내밀 수 있었다.

 

이러한 용기는 촛불집회로 끝일까? '82cook' 회원들은 이제 기륭 노동자들의 아픔도 함께 나누려는 용기를 보이고 있다. 용기를 품기도 힘들었지만 이어나가는 것은 더 어려운 세상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냥 눈 감고 살기도 쉽지 않은 시대, 이런 시대에 아픔을 느끼지 않고 산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 아닐까.


#촛불시위#비폭력#병역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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