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가루베 지온이란 몹쓸 일본인이 하나 있었다. 1927년에서 40년까지 공주고보에서 일본어 담당 교사로 일하면서 무려 1천기에 달하는 백제 고분을 제 멋대로 도굴한 위인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고고학을 가장한 도굴업자요, 역사학자를 가장한 침탈자였다.

 

가루베 지온, 응징하고픈 일본인의 전형

 

자신이 가르치는 조선인 학생들을 동원하여 공주와 부여에 위치한 백제 고분들을 무단으로 도굴한 후, 그 부장품들을 깡그리 일본으로 밀반출한 가루베 지온. 우리에게는 철저히 응징하고픈 일본인의 전형이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백제 무령왕릉이 단 한 번의 도굴도 없이 처녀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가루베가 눈에 쌍불을 켜고 찾아 헤맸던 무령왕릉은 그가 도굴한 송산리 6호분에서 불과 10m도 안 된 지점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로선 통탄한 일이지만 우리로선 정말 천만다행이랄 수밖에. 또 그가 죽은 지 1년 후에 왕릉이 발견된 것은 후안무치한 범죄자에게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무령왕의 의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간절히 원하는 것은 가루베 지온의 유족들에게 마지막 양심이 남아 있다면, 그네들이 신으로 떠받드는 천황의 조상들인 백제왕들의 유품을 하루 속히 아버지의 나라에 돌려주라는 것이다.

 

사진 찍으려는 기자들, 무령왕릉 짓밟고…

 

무령왕, 일본 천황가의 계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신비의 인물. 그는 백제 중흥을 이끈 현철한 왕이자 백제의 전성 시대를 연 위대한 군주였다.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고,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는 무령왕. 일본에서 태어나 백제의 왕이 된 이력도 흥미롭고, 그의 동생이 일본의 게이타이 천황이었다는 신기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도 흥미롭다.

 

1971년, 7월 5일. 폭우가 쏟아지던 날 밤에 무령왕릉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장 인부의 삽날에 벽돌이 부딪혔고, 곧 이어 공주박물관장과 국립중앙박물관장이 현장에 달려왔다. 그와 더불어 수많은 기자들과 경찰, 시민들이 자가사리 끓듯 나타났고 발굴 현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기자들은 발굴단을 밀치고 들어가 유물들을 밟으며 사진을 찍어댔고, 발굴단원들은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동원해 소중한 유물들을 쓸어 담기에 바빴다. 무령왕릉의 무덤임이 밝혀지자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무령왕릉 발굴은 한국 고고학 역사상 최대의 성과이자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유물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실측 도면 하나 없고, 유물에 묻어 있는 미생물 분석도 하지 못한 졸속의 극치인 발굴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무령왕은 기뻤을 것이다. 가루베에게 얌전한 모습으로 도굴당하는 것보다, 후손들에게 떠들썩하게 발굴되는 것을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천 오백년의 신비를 벗고 마침내 나타난 무령왕릉 내부. 왕과 왕비의 관을 지키는 진묘수가 묵언의 호위를 하고 있고, 그 아래에는 지신에게 땅을 산다는 내용이 실린 매지권이 놓여 있던 무령왕릉. 그 매지권에 쓰인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글귀에 의해 고대 삼국시대의 왕묘 중에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게 된 무령왕릉.

 

  지난 1997년부터 묘 내부를 볼 수 없게 된 무령왕릉은 자신의 모습을 보러 온 후손들에게 그 어떠한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산허리에서 공주 시내를 굽어보며 그는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은 108종 2,906점에 달하며 이 유물 중 상당 수가 국보로 지정되었다. 유물들은 실로 엄청난 양이었다. 금관과 금동제 신발, 환두대도, 청동거울, 각종 금은 장식, 목받침과 발받침, 금귀고리 등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유물이 없었다. 결국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은 찬란한 백제 문화의 정수인 것이다.

  

  특히 이 유물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 중 하나는 청동거울이었다. 의자손수대경은 천지사방을 맡아 다스린다는 사신과 상서로운 동물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신비의 거울이었다. 23.2cm의 직경을 가진 이 거울이 일본 천황가의 무덤에서도 발굴된다는 사실은 백제와 왜가 상상 이상의 긴밀한 관계였음을 나타내는 증거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백제는 일본의 아버지 나라인 것이다. 오죽했으면 아키히토 일왕이 칸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고백까지 했을까?

  

  

  송산리 고분군 위에서 무령왕릉에 돋아난 무심한 풀들을 바라본다. 못난 후손에 의해 자신의 안식처가 무뢰한에게 도굴당할 뻔한 무령왕릉이 아니던가. 신묘한 힘을 발휘해 끝까지 자신의 모습을 후손에게 전한 무령왕의 의지에 새삼 눈물이 난다. 그리고 고맙고 고마울 뿐이다. 이나마 남겨주어 우리에게 백제 문화의 찬란함을 알게 해 주었으니.

  

  공주박물관 무령왕릉 전시관을 나서며 다시 진묘수를 바라본다. 지하 세계에서 주인으 지킨 그 신령한 짐승에게 자꾸만 눈길이 간다. 아마도 저 진묘수는 앞으로 다가올 천 오백년의 세월 동안에도 주인을 지킬 것이다. 못난 후손들의 행태를 꾸짖으며 저렇게 자리를 지킬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송고함


태그:# 무령왕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