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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금성출판사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표지<금성출판사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 금성출판사

각 시도에서 교육발전과 인재 양성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시는 시도교육감님들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바쁜 일정을 쪼개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까지 열어 일선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추석을 앞두고 각별한 선물을 준비하셨더군요. '이념적으로 편향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퇴출시키겠다'는 아주 특별한 선물 말입니다.

 

모름지기 선물이란 주는 사람, 받는 사람이 즐거워야 하는데, 이번 선물은 전혀 즐겁지 않더군요. 즐겁기는커녕 아예 받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습니다.

 

물론 선물을 준비하신 전국시도교육감님들 역시 즐거운 마음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 선물이 초래할 파장 또한 생각하셨겠지요. 적어도 한 지방의 교육행정을 총괄하는 분들이 그 정도 생각도 안 하셨을 리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모스크바? 거기 사람들은 다 빨갱이인데… 

 

인터넷을 통해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문득 초임 발령 시절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제 교단 경력이 20년이 되었으니 어느새 20년 전의 일이군요. 강산이 변했어도 두 번은 족히 변했음직한 먼 과거의 일이지요.

 

어느 날, 교감 선생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갔더니 우리 반 아이가 제출한 독후감 공책을 펼쳐놓고 계시더군요. 제가 다가가자 교감 선생님께서는 독후감 공책을 제게 내밀며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이런 책을 읽힐 수 있느냐는 것이었지요.

 

그 아이가 읽고 독후감으로 썼던 책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스크바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였습니다. 영화로 먼저 개봉되었던 게 책으로 나온 것이지요. 저는 교감 선생님의 질책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머뭇대고 있는데 교감 선생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더군요.

 

"모스크바는 소련의 수도가 아닙니까? 거기 사람들은 다 빨갱이들인데, 이런 책을 어떻게 아이들이 읽고 독후감을 쓰게 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아이들 지도를 어떻게 했습니까?"

 

전 그때 교감 선생님 앞에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새내기 교사라서 말을 못한 게 아닙니다. 교감 선생님의 생각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습니다. 덕분에 질책이 하나 덧붙여지더군요. "젊은 선생이 잘못했다 죄송하다는 말도 할 줄 모르냐?"는 질책이었지요.

 

20년 전 제게 호통 치던 교감 선생님의 생각과, 그 호통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제 생각 중에 어느 것이 더 편향된 생각이었을까요? 이제 와서 물어봐야 소용없는 일이지요. 그 시절 경직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게 그 교감 선생님 한 분만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 기억이 하필이면 지금 되살아나는 것일까요. 편향된 근현대사 교과서 퇴출을 결의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왜 자꾸 20년 전 교감 선생님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일까요.

 

이번 기회에 역사 공부 좀 하시지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가 편향되어서는 당연히 안 됩니다. 그래서 교과서는 검정 과정을 거칩니다. 교육감 회의에서 편향된 교과서로 지목되고 있는 금성출판사 교과서 역시 교육과학기술부의 검정을 거친 책입니다. 실제로 편향되게 서술된 교과서라면 통과조차 되지 않았겠지요.

 

제가 근무했던 학교 중에는 대한교과서에서 발행된 한국근현대사를 사용했던 곳도 있고, 금성출판사에서 발행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사용했던 곳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 두 교과서 모두 사용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금성교과서라 해서 특별한 내용이 덧붙여진 건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시도교육감님들은 특정 교과서를 지목해서 편향되었다고 퇴출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까요. 혹시 교과서를 바라보는 시각이 편향되었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요. '모스크바'란 제목만 보고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20년 전의 교감 선생님처럼.

 

정말로 문제가 있고 편향된 교과서라면 역사 교사들의 손에 의해서 퇴출됩니다. 역사를 가르치며 보람을 찾고 희망을 찾는 교사들이 문제 있는 교과서가 학교 현장에서 통용되도록 방치하지는 않습니다. 하여 시도교육감님들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편향교과서 퇴출 선물은 받지 않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역사 공부 좀 해보시라는 부탁입니다. 현재 고등학교용으로 검정을 통과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편향된 교과서인지를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지 말고, 직접 교과서를 읽어보고 우리 근현대사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관련 서적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육은 국가의 백년지대계라고 이야기하지요. 그 중요한 교육을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지원해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노력하는 교육행정가가 많이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날을 기다리는 제 소박한 꿈이 헛된 것은 아니겠지요?

덧붙이는 글 | 이기원 기자는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입니다.


#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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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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