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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03만1065명이던 농가인구는 2007년 327만4091명으로 70만명 넘게 줄었다. 전체인구 중 차지하는 비율도 8.6%에서 6.8%로 떨어졌다. 농촌을 떠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1994년 788만5천원이던 농가부채는 2003년 2661만으로 7년새 3배 넘게 늘었다. 1994년 도시근로자가구와 거의 비슷했던 농가소득은 2004년 77.6% 수준으로 떨어졌다. 1970년대 중반 농촌 소득이 도시보다 앞섰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만 하다.

모든 게 떨어지는 가운데 농촌에서 유일하게 늘어난 게 있다. 60세 이상 인구 비율이다. 2005년 39.3%인 60세 이상 비율은 2010년 46.5%로 크게 뛴 뒤, 2020년이면 62.8%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농촌과 관련된 전망은 이처럼 한숨만 나오게 만든다. 작가 이시백은 1990년대 이런 농촌을 굳이 찾아 들어가 2003년 <시골은 즐겁다>를 내놨다. 농촌생활에 대한 노하우를 담은 이 책은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착한 촌놈, 영악한 서울내기?

 이시백의 연작소설집 <누가 말을 죽였을까>
 이시백의 연작소설집 <누가 말을 죽였을까>
ⓒ 삶이보이는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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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로 1970, 80년대를 풍자한 그가 최근 정통농촌소설을 한 권 내놨다. <누가 말을 죽였을까(삶이 보이는 창 펴냄)>다.

세상을 떠난 재담꾼 이문구의 입담을 물려받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의 풍자와 해학이 제대로 배인 작품이다.

판소리꾼이자 연출가인 임진택이 "그의 소설은 자유분방하면서 흥미진진하고, 시끌벅적하면서 화기애애한가 하면, 비분강개하다가 태연자약하고, 능청 익살맞다가 청승 비감하고, 우렁우렁하다 다시 소곤소곤하고, 통쾌무비하다 망연자실하다"면서 감탄했을 정도다.

이 책엔 10년을 넘긴 그의 농촌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임진택이 감탄한 것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바로 옆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맞아, 맞아 사람이 원래 저렇지, 나도 저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라는 생각이 절로 나온다.

'농촌사람은 선하다, 도시사람은 영악하다'나 또는 그 반대논리를 들이대며 이분법으로 손쉽게 가르지 않은 탓이다. 이는 그가 실제 농촌에 살고 있으면서 관찰자로서 시선을 잃어 버리지 않은 탓이다.

농촌사람들은 피곤하다

"종필은 정보화마을인지 뭔지가 되고서 마을회관에 머리 허연 이들부터 애 업은 여자들까지 컴퓨터 배우느라 시끌시끌하던 일을 익히 알고 있었다. 집집마다 인터넷인가가 들어오고부터, 여편네들은 고스톱을 컴퓨터로 친다며 꿀이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온종일 방구석에 붙어 지내더니, 급기야 애 엄마까지 컴퓨터에 달라붙어 맞고에 미쳐 지내는 걸 알고 있었다."

지난 시절, 대한민국 경쟁력 강화라는 이름 아래 또는 농촌살리기라는 이름 아래 농촌은 많은 외풍을 맞았다. 우루과이 라운드, 골프장 건설, 정보화마을, 생태마을, 행정수도 이전, FTA협상, 농협야구단 창설 등은 그동안 농촌에 불어 닥친 외풍들이다.

책엔 이런 외풍들이 농촌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생생하게 나온다. 기사나 방송에선 '농촌에 1조원 지원' '농촌에 10조원 지원'과 같은 수치만 나올 뿐, 그 결과를 보긴 힘들다.

'정보화마을'이라고 농촌에 최신 컴퓨터를 깔아놓은 뒤 풍경은 영화 <부시맨>에서 원주민마을에 콜라병이 떨어진 뒤 벌어지는 해프닝을 떠올리게 한다. 아낙들은 컴퓨터 도박에 푹 빠져 버리고, 남편들은 아내들이 낯선 남자와 채팅을 하진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구본중 이장의 모습도 시사적이다. 구 이장은 어느 날부터 농사에 흥미를 잃어 버렸다. 행정수도 이전 소식이 들리면서 평당 3만원에도 둘러보겠다는 사람이 없던 땅에 신문지에 둘둘 만 돈다발을 든 사람들이 줄을 지어 찾아오는 모습을 보면서부터다. 땅이 나빠 못자리로도 못 쓰던 곳을 팔아 목돈을 손에 쥐게 되니, 그동안 농사 지은 삶이 영 미련스럽게 느껴진 탓이다.

느린 농촌의 삶과 빠른 도시문명이 충돌하면서 교통사고도 크게 늘었다. 자동차를 몰고 휴일을 즐기러 오는 도시인들이 늘고, 농촌에도 자동차 인구가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제대한 지 일주일도 안된 갑동 근제네 맏아들이 술 먹고 운전한 차에 받혀 충용이는 그 자리서 세상 뜨고, 그 처는 반년을 병원에 누워있어야 했다. 소 기르던 병규가 김치 공장서 나오는 배춧잎 주워다 소 먹이려고 경운기 끌고 나가다가 트럭에 치여 이틀 만에 병원서 죽고, 트랙터가 논 구렁에 빠져서 갓길에 서 있다가 승용차에 치어 절름발이가 된 금병 씨나, 자전거 타고 가다 차에 받쳐 갈비뼈가 몽창 부러진 양태 노인이며, 이젠 멀쩡하니 사는 이가 드물 지경이었다."

농촌사람들은 도시사람을 이렇게 생각한다

 <누가 말을 죽였을까>를 펴낸 이시백.
 <누가 말을 죽였을까>를 펴낸 이시백.
ⓒ 심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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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만 보고 가는 사람은 자신이 남긴 흔적에 무심해지기 마련이다. '참살이다' '웰빙이다' 하면서 주말마다 숱하게 농촌을 찾는 도시사람들, 그들에 대해 농촌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누가 말을...>엔 농촌 사람들의 속내가 잘 드러난다. 소설 속 종필은 도시 사람들에게 격분한다. "자동차 팔아서 쌀 사다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쌀 없으면 빵 먹고, 반찬거리 없으면 라면 삶아 먹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농약음식'을 찾으면서, 벌레 먹은 음식을 피하는 도시사람들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무농약이라면 당연히 벌레가 꼬이기 마련이다.

"유기농두 좋구, 무농약두 다 좋은디, 막상 장에 가서 배추며 열무 고를 때면 잎사귀 앞뒤루 까뒤집구 행여 벌레 먹은 구녕 하나라두 있나 샅샅이 뒤지는 게 도시 것들이여. 말 다르구 장바구니 다르대니께."

농촌사람들은 '울컥' 하지만 그래도 결국 웃고 만다. 덩달아 나도 웃는다.

"찬거리두 대줘야 혀. 설 사람덜은 입맛두 별나데. 겨우내 파먹다 군내가 나서 덮어둔 묵은지에 아주 머리를 빠뜨린대니께. 국을 끓여두 뒤뜰에 십 년은 넘게 묵힌 조선간장을 늫구, 거기 멫 년 동안 빠져서 입만 대두 진저리가 나는 무장아찌며, 고추 삭힌 걸 사죽을 못 쓰구 먹더래니깐. …말끝마다 동니버덤 촌스럽다구 투박허던 것두 발써 다 잊었어? 생태마을이 별 게여, 워떠케든 촌스럽게 꾸미자는 거 아녀?"

약은 체를 하기도 하고, 도시 사람들 골탕도 먹이는 농촌사람들이다.

시위를 하다 옥살이까지 하다 낙향한 달수를 동네 사람들이 꼬여낸다. 골프장 건설 반대 시위에 앞장세우기 위해서다. 하지만 보상비를 받을 만큼 받고, 업자측과 합의한 뒤엔 달수를 그냥 내팽개친다. 게다가 달수의 과거 이력까지 다시금 끄집어내며 뒷말을 한다.

농촌사람은 농촌사람이다

그래도 농촌사람은 농촌사람이다.

고엽제 전우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사람이 모자라 6·25 유공자 노인들까지 섭외하느라 막걸리값만 왕창 든 최건출 회장, 지역유지 행세를 하며 거드름 피우다 음주단속에 걸려 크게 망신을 당한 자율방범대장 김태봉, 어린 신부를 얻었다고 좋아하다 사기결혼에 된통 당한 고엽제 전우회 전충국 사무국장, 박정희 정권 때 누리던 대우를 못잊다 결국 큰 화를 당하는 새마을지회 분회장, 노래방에서 도우미로 일하던 며느리를 만난 구 이장 등 소설 속 인물들은 어쩔 수 없는 농촌사람들의 모습이다.

도시보다 변화 속도가 느리고, 정보가 부족한 게 농촌이다. 새것과 헌것, 근대와 현대가 부딪치면서 농촌사람들도 혼란스럽다. 외국인에 대한 배타성이 드러난 부분에선 참 마음이 아프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 못한다'는 대목이 어찌 그렇게 들어맞는지. 우리가 홀대하는 이주노동자는 30~40년대 미국과 유럽으로 돈 벌러간 우리들 아니었던가.

<누가 말을 죽였을까>는 사실에 기반한 농촌소설이지만 딴 동네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도시라고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FTA문제, 땅값 폭등, 사교육 등은 이름만 다를 뿐 도시사람들도 똑같이 겪어야 하는 문제다. 실컷 웃다가 결국 책장을 덮고 착잡해지는 것은 바로 책 속 주인공이 어쩌면 나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가 말을 죽였을까 - 이시백 연작소설집

이시백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2008)


#이시백#농촌#삶이보이는창#누가말을죽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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