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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낮 12시. 대부분의 KBS 사원들이 점심식사를 위해 본관을 빠져나갈 무렵, '공영방송을 위한 KBS 사원행동'(사원행동) 소속 회원들이 속속 민주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어젯밤 9시 54분 사내게시판을 통해 발표된 팀원 인사 규탄집회를 열기 위해서다.

 

분위기는 침통했다. 워낙 늦은 시각에 발표됐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출근해서야 인사 발령 사실을 안 사원들도 많았다.

 

여기저기서 "탐사보도팀 박살" "보복인사" "숙청", "대학살"이라는 말이 터져나왔다. 한 PD는 "전형적인 핀셋인사"라고 꼬집었다. 사원행동 소속으로 이사회와 새 사장 선임 반대 운동을 주도적으로 한 직원들만 콕 집어냈다는 뜻이다. 사원행동이 배포한 성명서에는 '이병순 관제사장의 광기어린 인사전횡'이라고 박혀 있었다.

 

"비판적 시사프로그램 씨를 말리겠다는 인사"

 

한 PD는 "센터장·팀장 인사가 이미 단행된 뒤여서 대부분 직원들은 선임 인사가 날 것으로 예상했다"면서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각에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의 인사가 발표됐다"고 말했다. 

 

인사 대상은 40여 명. 사원행동에 소속해 활동했던 직원들과 탐사보도팀 팀원들이 주요 대상이 됐다. 사원행동이 이번 인사를 가리켜 "비판적 시사보도프로그램을 씨 말리는 인사"이자 "사원행동 참가자에 대한 막가파식 보복인사"라고 비난한 이유다.

 

우선 양승동 사원행동 공동대표는 TV제작본부 스페셜팀에서 심의실로 발령났다. PD연합회장 임기를 마치고 현업으로 복귀한 지 일주일 만이다. 한미 FTA와 미 쇠고기 광우병 문제 등 대형 이슈를 다뤄왔던 이강택 PD 역시 수원연수센터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사원행동은 "뜬금없다"는 표현을 썼다. 현상윤 PD 역시 시청자사업팀 사무실로 출근해야 한다.

 

이밖에 최용수 PD는 부산총국으로, 탐사보도팀 최경영 기자는 스포츠중계제작팀으로 이동한다. 국은주·하석필·박종성 PD 등 1라디오의 대표 중견 PD들은 1FM·3라디오·한민족방송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사원행동에 참여했던 엔지니어들은 전원 경향 각지의 송중계소로 보내졌다. 이 가운데는 최근 정기순환 인사에서 지역근무를 마치고 본사로 온 지 얼마 안 된 고참급 직원도 있고, 방송문화연구소 연구원을 하다가 양주 중계소로 이동해야 하는 직원도 생겼다. 모두 사원행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직원들이다.

 

탐사보도팀 인사에 "아예 박살내겠다는 대학살 수준의 인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KBS의 대표적 시사프로그램인 <시사기획 쌈> <미디어포커스>의 팀원 절반 가량이 지역방송국, 스포츠 중계제작팀, 방송콘텐츠팀, 뉴스제작팀으로 발령났다. 김용진 전 탐사보도팀장은 부산총국으로, 최경영 기자는 스포츠중계제작팀으로, 복진선·김명섭·김웅규 기자 등이 보도본부로 복귀하거나 파견이 해제됐다. <미디어포커스> 제작을 맡았던 용태영 시사보도팀 기자도 보도본부로 발령났다.

 

 

사원행동은 "팀에서 그 사람이 어떤 기여를 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다만 비판적 시사 보도프로그램의 날을 무디게 하고, 힘을 빼는 것만 관심사"라고 비판했다.

 

성명서에서 사원행동은 "부사장 센터장 팀장에 대한 보은 부실인사에 대한 비난여론이 가시기도 전에 평팀원에 대한 비열하고 치졸한 표적 보복인사가 단행됐다"면서 "이런 인사야말로 '인사권 남용'과 '업무상 배임'"라고 주장했다.

 

KBS 노동조합에도 화살을 겨눴다. "박승규 (노조) 집행부가 관제사장을 쌍수 들어 영접하는 순간, 사원행동은 본의 아니게 관제사장의 유일한 견제세력으로 자리매김됐다"면서 "역설적이게도 관제사장과 어용화된 노조 집행부가 사원행동의 입지를 넓혀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원행동은 끝으로 이병순 사장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KBS 사장자리를 정권의 전리품으로 전락시키고 KBS 구성원 모두를 자신의 노예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이 쯤에서 그 광기를 멈추기 바란다. 이같은 경고를 무시하다가는 '최초의 KBS 출신 관제사장'이라는 오명에 더해, '최초로 KBS인들의 손에 의해 쫓겨나는 비운의 KBS 출신 관제사장'으로 기록될 것이다."

 

"KBS가 정권의 애완견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 기자회견을 겸한 집회에서 사원들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양 대표는 "이번 인사로 KBS가 또다시 조롱거리가 됐고 권위가 무너졌으며 이후 큰 화를 부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PD연합회장 직을 마치고 현업에 복귀해 '한국사 전' 제작을 하고 있었으나 복귀 일주일만에 제작에서 손을 떼게 됐다.

 

사원행동 투쟁 늘 맨 앞에 섰던 최용수 PD는 "지역에서 다시 촛불을 들고 그 촛불이 횃불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싸우겠다"고 말했다.

 

김현석 사원행동 대변인은 "이번 인사로 인한 최대 피해자는 다름 아닌 KBS"라면서 "일 잘하는 이 사람들을 다 밀어내면 누가 어떻게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절차적 문제도 제기했다.

 

"어젯밤 10시 가까운 시각에 인사 발표가 올라왔는데 (인사) 시행일자를 보니 17일, 어제로 되어 있더라. 그럼 지역에 발령난 기자는 어떻게 움직이라는 것인가. 또 갑자기 타지 생활을 해야 하는 사원들에게 미리 의견수렴을 하거나 본인의사 확인을 하는 절차도 없이 갑작스레 내려진 결정이다. 민주노총 법률원과 상의하고 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집회에 들른 엄경철 정치부 기자는 "어젯밤 술자리에 있다가 인사조치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어이가 없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면서 "'나도 인사조치하라'는 여러 선후배들의 말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김태형 탐사보도팀 기자는 "탐사보도팀은 사냥개가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KBS가 정권의 애완견이 되어가고 있다"면서 "성명서 한 장 달랑 내는 투쟁보다는 훨씬 강력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조합에 대한 원성도 쏟아졌다. 한 PD는 "만일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현재 사태를 바라봤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인사가 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면서 "노동조합이 이번 인사 파동에 대해 책임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 대부분의 인사 대상자들이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KBS 노동조합은 사측의 이번 인사조치에 대해 아직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박승규 위원장을 비롯한 집행부는 이날 전북 군산 선유도로 떠나 노조 비대위 해단식을 진행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원행동은 민주노총 법률원 등의 의견을 두루 참고해 '구제절차' 등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사측 "사전에 협의했지만 일부는 의견수렴 못했다"

 

한편 이같은 사원행동의 주장에 대해 김원한 인사운영팀장은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인사 실무에 참여하긴 했지만 발언할 처지는 아니다"라며 "사내 인사 내용이 외부에 보도되는 것 자체가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왜곡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합법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거나 규정에 위해되는 무분별한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조직안정, 복무관리 차원에서 다수의 직원을 보호할 책임이 회사에 있다. 새 사장과 본부장 등이 새로운 조직을 안정시키려는 기준과 원칙이 있다."

 

김 팀장은 "사전 협의를 한 부서도 있지만 지역으로 이동하는 일부 직원들의 의견수렴을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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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KBS, #사원행동, #이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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