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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의 글 전체에서 정치에 대한 가장 좋은 정의를 찾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다음 구절을 들겠다.

"정치란 잠시라도 한 눈 팔면, 무너지는 매우 허약한 것이다…정치는 관심과 비판, 욕망과 억제, 격려와 감시의 씨줄과 날줄로 교직되어 서로를 경계하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작동하는 그런 체계이다."(2008년 4월 3일, '주막당, 뻐꾸기당 떨어진 사과당')

그런데 그런 정치의 체제가 지금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야당은 전혀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진보정당은 형체조차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정치의 문제는 한방에 해결할 수 없다

 이대근 경향신문 정치 국제에디터.
이대근 경향신문 정치 국제에디터. ⓒ 유성호
한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하자.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정치 부재'에 있다…우리는 지금 정치라고 부를 수도 없는 정치에 벌써 지쳤다. 그래도 정치를 버리면 안 된다." (2007년 1월 4일, '노 정권에는 정치가 없다')

그런데 버릴 수 없는 정치의 체계가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 크게 위협받고 있다. 정치 부재, 그것이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비극적 결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견제되지 않는 국가권력과 시민의 직접적 마주침인가.

"자기의 욕구와 이익을 대변할 정당을 잃은 이들은 권력과 직접 마주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들은 의사당에서 만나지 않을 것이다. 아스팔트. 다시 거리의 정치인가."(2008년 4월 17일, '54%가 말하는 것')

그렇게 그는 촛불집회를 예고했다.

한국 정치에 희망은 있는가? 그가 정치인들에게 바라는 바는 실천할 수 없는 어떤 가혹한 요구가 아니다. "작은 일이라도 달팽이처럼 한눈팔지 않고 참을성 있게 눈앞에 닥친 일을 풀어가는 것"(2005년 11월 7일, <대연정, 개헌, 달팽이의 꿈>)이고, 스스로 내걸고 약속한 대로 꾸준히 실천하고 진보면 진보답게 보수면 보수답게 일관된 원칙과 대의에 따라 나아갔으면 하는 것이다.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 집권 개혁파는 그렇게 하질 못했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는 약속을 저버렸다. 언제나 늘 국민의 이해 부족을 아쉬워하고 그게 언론 때문이라고 탓을 했다. 비판자들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반대한다며 짜증을 냈다. 그러면서 시민들에게 대고 자신은 원칙과 대의를 소중히 하는 사람임을 늘 내세웠다. 그런 노무현에 대해 그는 단호했다.

"그는 앞만 보고 뚜벅뚜벅 가지도 않았고, 원칙과 가치, 노선대로 하지도 않았다. 좌파든 신자유주의든 상관 않고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실용적'으로 해왔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원칙과 대의 운운하며 누구를 가르치겠다는 것인가."(2007년 5월 10일, '노무현의 롤러코스터 정치')

꾸준하고 일관된 것, 늘 상대와 자신을 돌아보며 과욕하지 말고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가는 것 그는 늘 그것을 말한다. 그는 어떤 파격적인 해결을 원하지 않는다. 뭔가 대통합을 하고 개헌을 해서라도 정치의 문제를 한방에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한다면 그 원리에 맞게 해야 한다는 소박한 주장이 그가 말하는 전부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삶을 희생시키는 꿈의 공허함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한다.

"우리 모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꿈과 환상이 있는 즐거운 극장이 아닌,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2005년 12월 16일, '황우석을 둘러싼 과학과 비과학')

"우리가 할 일은 자기 원칙과 노선, 정책을 견지하며 외롭더라도 꼿꼿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 비장함이 죽은 열정을 살려 태풍을 몰고 올 수 있다."(2007년 9월 13일, '신당, 그 무덤에 아무도 초대 말라')

무슨 때만 되면 개헌하자는 제안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곤 했는데, 한때 그는 아주 인상적인 지적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헌법 조문을 바꿔서 삶을 바꿀 수 있다면, 누군들 아름다운 말들을 동원하는 일을 꺼리겠는가. 현행 헌법과 바람직한 헌법의 차이가 주는 불편보다 현행 헌법과 행복한 삶의 괴리가 더 크다…지도자와 시민들이 자기 삶을 개선하기 위한 의지와 역량이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문제다." (2007년 1월 11일, '개헌 제안 시기가 정략이다'>)

"일상적 실천", "작은 실천"은 그가 자주 쓰는 표현의 하나다. "꿈은 공허한 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작은 실천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을 그는 늘 강조한다. 일상에서는 가족과 동료들에게 무책임한 존재로 살면서 일거의 사회변혁을 꿈꾸는 진보파들에게 이대근의 생각은 성이 차지 않을지 모르나, 그게 현실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급진과 진보를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내세우는 것은 기실 현실의 보수성을 공고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기 쉽다. 왜나면 실제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말은 공언일 수밖에 없고, 그때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체제의 힘이기 때문이다.

지난 정치사를 통해 우리가 보게 된 것은 '오늘의 진보파는 대개 내일의 보수파로 전환한다'는 사실이다. 6·3세대에서 민중당에 이르기까지 그간 가장 급진적인 변화를 주장했던 이들의 오늘날 모습을 보라. 이제 6·3세대의 중심에는 이명박이 있고 어제의 민중당은 오늘 이재오로 대표되고 있다고 해도 과히 지나치지 않다.

386 운동권 엘리트들 역시 앞으로의 운명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한때 급진적 사회변화를 추구했던 운동권 엘리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왜 중도좌파나 중도 정도로 변화되지 않고 보수나 극우로 뛰어넘어가게 되었을까?

일상적 삶에 기초를 튼튼히 갖는 것의 소중함, 이대근 칼럼은 늘 그것을 말한다. 삶은 운동보다 더 넓고 풍부하다. "자신의 삶과 행복을 위해"(2006년 8월 4일, '한반도와 괴물'>) 운동을 하는 것이지 운동을 위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마치 현실의 삶에 굴종하지 않겠다는 듯 일상의 삶을 부정하게 되면 언젠가는 말도 삶도 스스로를 배반하게 된다.

운동이 삶을 희생시키는 알리바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운동의 가치를 내세우며 활동가들에게 과도한 노동과 낮은 급여가 강요되는 일도 달라졌으면 한다. 그것이야말로 생활의 문제가 다가 왔을 때 모두들 운동을 떠나게 만든 원인이었다. 진보라는 이상을 위해 희생과 헌신, 반노동적인 보상체계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조직과 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지금처럼 허용된다면, 오늘의 진보가 내일의 보수로 되는 나쁜 패턴은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꾸준히 할 수 있는 자신만의 일을 갖는 것의 가치

나는 정치를 바라보는 이대근의 일관된 생각에 우리 모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번 실패했다면 다시 나설 때에는 신중해야 하는 법이다. 민주당이든 진보정당이든 그래야 한다. 실패한 원인을 깊이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꾸준해야 한다. 그것만이 다시 열정을 되살리고 차근차근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실력을 쌓아야 하고 내용을 더 단단하게 채워야 할 것이다. 그것 없이 이명박의 실패만 바라보며 과거의 행태를 반복한다면 미래의 기회조차 또 스스로 밟아 버리고 말 것이다.

상황에 따라 기회주의적으로 유동하지 않고 일관된 원칙으로 꾸준히 해나가는 것의 가치를 그는 2007년 5월 24일 쓴 권정생에 대한 조사에서 잘 말해 주고 있다.

권정생. 영정으로 쓸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떠났고, 교회 종치기를 사명으로 알았으며, 평생 살아온 5평짜리 흙담집에 살았고, '나를 기념하지 말라'며 나이 일흔이 남긴 흔적을 이 세상에서 말끔히 지워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 것도 남긴 것이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틀렸다. 그가 죽어서도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는 이유를 이대근은 이렇게 썼다.

"가난하고 늙고 병든 아동문학가를 이 사회에서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잘못이다.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한 자가 세상과 잘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기만이다. 그는 매우 위험하고 불온한 사상가였고, 반역자였으며 혁명이 사라진 시대의 혁명가였다. '위대한 부정의 정신'의 소유자였다. …… 지지배배 짖던 작은 새가 숲속으로 날아가듯 그는 그렇게 가 버렸다.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전사에게만 돌아가는 휴식이다."(2007년 5월 24일, '권정생, 그의 반역은 끝났는가')

얼마 전 국방부는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나님>이란 책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해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이 일을 보고 나는, 죽어서도 세상을 위협하는 불온한 사상가로 남을 것이라는 이대근 칼럼이 먼저 생각났다. 이런 일을 예상하고 칼럼을 쓴 것은 아니겠지만, 자기 일에 사명감을 갖고 평생 꾸준히 해나가는 삶의 가치를 새삼 생각하게 했다.

일상 속의 서민 정치학

정치란 기본적으로 열정의 덩어리다. 아무리 차가워지려 해도 당파적 판단이 앞서고, 찬반의 의사를 표출하고자 하는 불같은 기운을 억제하기 어렵다. 그래서 정치 칼럼에는 ‘그렇게 하면 시민이 분노한다’라는 식의 문법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그 얼마나 무망한가.

지금과 같은 정치 현실에 지치고, 곧 현 체제의 파국과 함께 뭔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 같이 말하는 운동권 선지자들의 종말론이 우리를 더 피곤하게 만들 때, 그때 이대근 칼럼이 눈에 들어오면 긴장 풀고 천천히 읽어 보라. 정치칼럼도 이대근처럼 쓰면 위안이 될 수 있다.

2008년 8월 21일자 이대근 칼럼 <전국 노래자랑>은 아주 훌륭한 사례다. 이것만으로도 이대근 칼럼을 좋아할만한 이유는 충분하다고 본다.

"혹시 일요일 낮에 시간 있습니까. 영화 보러 가자는 것은 아니고요. 어디 놀러가자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있으면, TV를 한번 켜 보십시오. 당신이 대한민국 국민이 맞다면 지난 한 주 분명히 갑갑하고 짜증나는 일을 겪거나 보았을 겁니다. 그런 당신을 위해 제안합니다. 일요일 낮 TV를 켜십시오.

천문학적인 돈을 횡령하고 회계 조작해 경제질서를 어지럽히고 납치·폭행으로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 재벌총수들을 다 용서해 준 대통령이 법질서 확립에 나서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아십니까. 그렇게 통 크고 관대한 정권이 촛불집회 참가자를 싹쓸이 체포한다고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던 남성을, 커피숍에서 커피 마시던 여성을 잡아갔다는 기사를 보셨습니까. 속이 불편해지려 한다고요. 그렇다면, 일요일 낮에 TV를 켜십시오.

주요 정치인이 여야의 대립으로 국회를 열지 못하는 그때가 바로 놀기 좋은 때라고 평일 골프에 해외 골프 여행을 갔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갑자기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고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올해 1/4분기 소득 상위 20%의 소득은 더 늘었지만, 나머지 80%의 소득은 더 낮았다는 통계 결과는 아십니까. 모든 것이 다 오르는데 남편 월급과 아이 성적만 안 오른다면서요. 공연히 짜증이 납니까. 은근히 부아가 난다고요? 일요일 낮에 TV를 켜십시오.

대통령은 자기가 하는 일이 올바르기 때문에 확고하게 밀고 나갈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면서요. 그러면, 국민도 각오하고 있어야겠네요. 대통령의 임기는 2013년 2월24일 자정까지입니다. 그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촛불집회는 백번 해도 소용없다고 하더군요. 고달파도 어쩝니까. 이명박의 국민으로 살아갈 각오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국민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영국의 대처 총리나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초기에 나보다 더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과는 더 좋았던 것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슴이 답답하고 화병 난 시민들은 어떻게 위로를 받아야 할까요.

이런 방법은 어떻습니까. 일요일 낮 12시 10분에 TV를 켜고 KBS 1에 채널을 맞춰보세요. 딩동댕 하는 아주 맑은 소리가 나면 곧 탁음에 키 작고 얼굴은 거무스름한 팔순 노인이 등장해 자기를 '일요일의 남자'라고 소개할 겁니다. 전국 노래자랑이 시작되는 거죠. 이 노래자랑에는 도대체 낯선 게 없습니다. 모두 이웃에서 쉽게 마주치는 그런 얼굴들이니까요. 노래 역시 익숙하지요. 노래·춤 솜씨는 당신보다 별로 낫지 않을 겁니다. 아마 월 소득도 그렇겠지요. 경쟁심은 생기지 않습니다.

이번 일요일뿐 아닙니다. 지난 주 일요일에도 그랬습니다. 지지난 주에도 그랬지요. 그렇게 28년 되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반만년 역사에 오래된 게 별로 없어요. 한국. 우리를 끊임없이 낯설게 합니다. 부수고 다시 짓고 또 부숩니다. 정겨운 골목길은 다 어디 갔습니까. 단골 선술집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잠시 한 눈 파는 사이에도 얼마나 빨리 변하고 뒤집어지는지요. 그런데 28년째 그대로인 게 있네요. 그래서인데, 노래자랑은 절대로 당신을 긴장시키지 않아요. 놀라게 하지도 않고 흥분시키지도 않습니다.

경청할 필요도 없어요. 비스듬히 누워서 보는 게 제격이고, 졸면서 보면 더 좋지요. 랩·뽕짝·댄스곡·발라드 다 나오지만 무슨 상관입니까. 흘러나오는 노래가 귓가를 스쳐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이완된 분위기에 살짝 올라타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러면 느낌이 올 겁니다. 세상이 참 한가롭구나! 아무리 노랫소리 요란해도 뙤약볕 내리쬐는 한 여름, 인적은 없는데 매미는 요란하게 울고 누렁이는 마당에 엎드려 자는 권태로운 장면과 다르지 않아요. 아무 일도 없구나! 지난 주 무엇에 시달렸든 마음속의 파도가 잔잔해지면서 갈등도 번민도 잦아들 겁니다.

이걸 한마디로 뭐라 할까요. 내 안이 편안해지면서 세상도 무고한 것. 그렇습니다. 평화. 당신은 지금 평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래자랑이 전하는 진정한 메시지입니다. 그건 다 거짓이라고요? 월요일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야 한다고요? 당신은 지금 완전한 평화를 원하고 있군요. 그날이 올 것 같습니까. 다시 어지러운 세상 한 가운데 뛰어들더라도 당신에겐 휴식이 필요합니다. 사막에 옹달샘이라도 있어야지요. 이 작은 평화라도 있어야지요. 그래야 살지요."


#이대근#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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