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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만 출신 화가 이운구가 화폭에 담은 천수만 들판의 가을 풍경이다.
▲ 천수만 가을 풍경 그림 천수만 출신 화가 이운구가 화폭에 담은 천수만 들판의 가을 풍경이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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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이 열린 날(開天節)만큼은 세상없어도 천수만을 가리라 마음먹었다. 마누라와 함께 천수만을 가서,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바다 상실의 슬픔' 속에서나마 광활한 들판 길을 걸으며 심호흡을 하고자 했다. 예전같이 아스라한 곳까지 두 시간 여를 내처 걷지는 못하더라도, 맑은 가을하늘의 싱그러운 햇살과 드넓은 들판의 연둣빛 물결을 만끽하며 30분만이라도 걷기 운동을 하기로 했다.

성당 총회장 노릇을 하느라 오전을 성당에서 보내고,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인 지역 예총회장 노릇을 하느라 예총 멤버들과 점심을 함께 하며 가을 예술제와 예술지 발간, 내년도 사업과 운영 계획에 따른 예산 확보 문제 등을 놓고 골치 아픈 논의들을 하다가 오후 3시가 넘어 집에 돌아왔다.

적이 슬픈 마음이었다. 건강치 못한 몸으로 직접 부딪치고 감당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는 상황이었다. 우선은 가진 것이 좀 있고 몸이 건강해야 이리 뛰고 저리 달리며 역량 발휘를 할 텐데, 어느새 환갑을 먹은 바람 같은 세월 속에서 언제 글다운 글을 쓰며, 자유와 게으름과 느림 속에서 살고 싶은 소망을 언제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 생각할수록 막막해지는 심정이었다.        

하늘이 열린 날(개천절) 오후,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서 오랜 만에 천수만 들판 길 걷기 운동을 했다.
▲ 다시 찾은 천수만 들길 하늘이 열린 날(개천절) 오후,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서 오랜 만에 천수만 들판 길 걷기 운동을 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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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눕고 싶었다. 기운 없는 몸에 피로가 눅지근하게 얹어지니 세상 만사가 다 귀찮아지고, 잠이나 자고 싶었다. 하지만 눕지 않았다. 거실 소파에 앉아 누울까 말까 망설이자니 천수만의 광활한 들판, 장대한 연둣빛 물결이 어떤 외침처럼 손짓을 하고 있었다.

"여보, 안되겠어. 좀 늦은 시간이지만 지금이라도 천수만을 가야겠어. 당신이 함께 가줘야 하고…."

공휴일을 맞아 아침에는 집안 화장실들 청소를 하고, 성당에 가서도 오전 미사 후에 혼자 두 개 화장실 청소를 하고 돌아온 아내는 방안에 앉아 성경 쓰기를 하고 있었다. 바오로 탄생 2000년, '바오로 해'를 맞아 육필로 바오로 서간을 집중적으로 쓰고 있는 아내는 어색하게 안경 쓴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게도 천수만을 보고 싶으세요?"
"오늘 가지 않으면, 올해는 연둣빛 물결을 볼 수 없을 거야. 어쩌면 이미 연둣빛은 다 사라지고, 그 광활한 들판에 황백색 물결만 넘실거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당신 좋아하는 연둣빛이 부분적으로는 남아 있을 거예요." 
"연둣빛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공휴일에 '오체투지 순례단'에게 가지 못한 대신 오체투지 순례단을 위해, 오체투지 순례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천수만 들길을 걸으며 묵주기도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야."

아내는 성경 쓰던 노트를 접어놓고 일어섰다. 자신도 천수만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겠지만, 건강치 못한 남편을 혼자 보내지 않고 동행을 해주는 것이 마음 편할 터였다. 천수만이 먼 곳도 아니고, '장롱면허' 소지자인 자신이 운전을 할 것도 아니지만….

일부러 반가움을 즐기기 위해 꼬불꼬불한 들길과 산길을 10분쯤 달려 천수만 들판 초입에 들어서는 순간 아! 탄성을 발하며 심호흡을 했다.

"아유, 되게 반갑네. 정확히 얼마 만인지는 모르지만, 지난해 12월 7일 기름사고 이후로는 처음이야. 자주 와서 걷기 운동을 두 시간 이상씩이나 했던 곳을 한참만에 오니 정말 반갑네. 그런데 연둣빛은 아무데도 없는 것 같지?"
"있을 거예요. 아, 저기 저쪽에 연둣빛이 좀 있네요."

우리는 장대한 황백색 물결 사이로 드문드문,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연둣빛을 즐기며 들판 길을 저속으로 달렸다. 길 위에 앉아 있던 비둘기와 왜가리들이 길을 비켜주고, 기러기 떼와 오리 떼가 무시로 머리 위를 나는데, 기러기들은 뭔 말이 그리 많은지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일찍 벼베기를 한 천수만 들의 일부 논에는 수천 마리의 기러기들이 몰려 잔치를 한다.
▲ 천수만 들의 기러기떼 일찍 벼베기를 한 천수만 들의 일부 논에는 수천 마리의 기러기들이 몰려 잔치를 한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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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넓어지는 적돌강을 끼고 10분쯤 달리다가 호수 하나를 돌아서 우리는 '검은여(뜬바위)' 주변에 도착했다. 적당한 곳에 차를 놓고, 우리 부부는 각기 묵주를 손에 들고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나는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병상생활을 마치고 퇴원한 후로 지난 9월 18일이던가, 오랜만에 '장명수' 길을 걸어보고는 이제 겨우 두 번째 걷기 운동을 하는 셈이었다. 그렇더라도 눈물까지 핑 돌다니, 내가 본래 감상적인 위인이긴 하지만 병고를 치른 이후 더럭 심약(心弱)해진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2>

검은여 바로 앞 찻길 너머의 적돌강 지류에는 낚시꾼들이 많았다. 찻길 한쪽으로 낚시꾼들의 차량과 텐트들이 즐비했다. 낚시꾼들은 대략 3∼40미터 간격으로 자리를 잡고 낚싯대를 여러 개씩 설치해 놓고 있었다. 이런 좁은 똘강에 낚시꾼들이 많이 몰린다는 사실도 신기했고, 낚싯대들이 그물을 친 것 같은 형국 속에서 과연 살아남는 붕어들이 있을지, 붕어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나는 낚시꾼들을 호의적인 눈으로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내게 결코 정다운 대상이 아니었다. 저들이 가져온 쓰레기들이 이곳을 또 얼마나 더럽힐까? 저들 중에서 자기가 가져온 쓰레기를 되가져 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런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런 의문들만이 내 뇌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여유를 즐기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고, 근심 걱정이며 시름을 달래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경제 난국 속에서도 여가를 즐기며 취미 생활에 열중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늘 있게 마련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도처에 남겨놓는 어지러운 흔적이었다. 납봉과 떡밥 따위로 물 속을 오염시키며 왜가리와 오리 등 철새와 텃새들의 먹이 터전을 점령해 버리는 것도 모자라 곳곳에다 인분을 배설해놓기 일쑤다. 텐트를 치고 자면서 밤낚시도 즐기는 그들은 검은여 안에 마련된 간이 회장실을 외면하고(간이 화장실 사용이 불편하기 때문인지…), 풀밭 속 드러난 맨땅 같은 데다 배설을 해댄다.

정자가 있는 곳이 천수만 '검은여(뜬바위)'이다. 그 앞의 찻길 너머 똘강에는 연일 낚시꾼들이 몰려든다.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다.
▲ 천수만 '검은여' 앞 똘강 정자가 있는 곳이 천수만 '검은여(뜬바위)'이다. 그 앞의 찻길 너머 똘강에는 연일 낚시꾼들이 몰려든다.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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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천수만 들판에 와서 검은여 주변을 걸으며 또 한번 쉽게 눈살을 찌푸리고 코를 싸쥐기도 한 나는 낚시꾼들이 만들어 내는 '적요(寂寥'와 '기다림'은 결코 평화로운 풍경이 아님을 다시 절감하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다분히 파괴적인 풍경이었다. 적요 안에 파괴성이 잠복해 있는 그 확실한 이율배반은 정말로 곤혹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모처럼 만에 천수만의 검은여를 찾았다가 다시금 곤혹스러움을 겪으며 나는 2년 전의 흔쾌한 추억을 떠올렸다. 사실은 2년 전의 그 추억을 찾아 오늘 굳이 검은여로 발걸음을 한 것이었다. 검은여에서 천수만 출신 화백과 그의 그림세계를 떠올려보는 것은, 내가 오래 전부터 마음에 담아왔던 소망 같은 것이기도 했다.

2년 전 추석 전 날이었다. 천수만 들판 끄트머리 원래 제방 앞에 차를 놓은 나는 검은여까지 걷기 운동을 했다. 원 제방에서는 검은여가 보이지도 않는다. 보이지도 않던 지점을 1시간 정도 걸으면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은 묘한 성취감을 갖게 한다. 나는 검은여의 '浮石亭'이라는 정자에 올라 땀을 닦으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천수만의 장대한 들판 풍경을 둘러보며 반복적인 감상을 즐기다가 검은여 정자 주위로 시선을 가져오니, 한 남자가 검은여의 '표석(表石)' 앞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호미로 땅을 긁어 조개 껍데기 따위를 채취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그 사내 쪽으로 발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거, 뭐에 쓰려는 거죠?"
내가 묻자 그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미술을 하는 사람인데요, 그림 재료로 쓰려고요."
"그래요? 조개 껍데기나 굴 껍질 같은 것도 그림에 활용을 하시는군요?"
"일종의 '실험'이기도 할겁니다. 그림의 주제를 좀더 확연히 부각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바다의 패각 껍질 사용을 생각했거든요."
"그렇다면 저 제방 너머 바닷물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거기에 가면 패각 껍질을 쉽게 구할 수 있을 텐데…. 여기에서처럼 호미로 땅을 긁어서 어렵게 구할 필요 없이…."
"그렇긴 하지만, 여기 이 검은여의 오래된 패각 껍질이 필요해요. 바닷물이 사라진 천수만의 이 검은여에 남아 있는, 거의 화석화된 패각 껍질이 꼭 필요하다는 거죠."           
"아, 그렇군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프랑스 시인 장 콕토의 시를 떠올렸다.

2007년 12월 9일 오후, 서산시문화회관 전시회장에서 천수만 출신 이운구 화백의 '고향전'을 보며, 이 화백과 기념촬영을 했다. 이때만 해도 나는 건강하고 젊어보이는 모습이었다.
▲ 이운구 화백의 그림 앞에서 2007년 12월 9일 오후, 서산시문화회관 전시회장에서 천수만 출신 이운구 화백의 '고향전'을 보며, 이 화백과 기념촬영을 했다. 이때만 해도 나는 건강하고 젊어보이는 모습이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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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귀는 하나의 조개 껍데기
그리운 바다의 물결 소리여!

단 두 줄로 되어 있는 장 콕토의 시가 누군지 모를 이 화가에게 어떤 영감을 불어넣어 오늘 자신의 그림 작업에 필요한 천수만의 검은여, 바닷물을 그리워하는 뜬바위(浮石)에 남아 있는 패각 껍질을 채취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수만 검은여의 거의 화석화된 패각 껍질들도 사용된 그림을 나도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저는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서산 사람이에요. 부석면 출신이죠. 내년 가을에 서산시문화회관 '초대전' 형식으로 서산시문화회관 전시실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거든요. 제게 연락처를 알려 주시면 초대장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나는 트레이닝복 주머니에 명함을 넣고 오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면서 그에게 내가 태안 사람임을 밝히고 성명 석 자를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는 깜짝 놀라며 반색을 했다. 그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흙빛문학>과 <태안문학> 등 고장의 문예지들에서 내 소설도 많이 읽었노라고 했다.

나는 더럭 고마워지는 마음이었다. 고마움을 지나 그에게 빚을 진 기분이기도 했다. 그는 내년 가을의 고향 전시회 초대장을 내게 보내주기로 약속했고, 나는 전시회장을 꼭 찾기로 약속했다. 일년 후의 해후를 거듭 약속하면서, 나는 저녁 햇살의 재촉을 받으며 그와 헤어졌다.   

<3>

이운구(李雲求) 화백은 1년 후에 그 약속을 지켰다. 가을에서 벗어난 12월 초·중반에 갖게 된 전시회 초대장을 내게 보내왔다. 서산시문화회관 초대전 형식이었고, <땅의 기억展>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전시 기간이 2007년 12월 7일(금)부터 12일(수)까지었다. 2007년 12월 7일은 태안 앞 바다 유조선 기름유출 사고가 발생한 날이다. '기름과의 전쟁' 개시로 온 지역사회가 정신이 없던 때였다.

나는 망설임과 고민 끝에 이운구 화백과의 약속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9일(주일) 오후 아내와 함께 서산시문화회관 전시회장을 찾았다. 아내가 준비한 막걸리 안주로 딱 알맞은 야채전과 오징어전에다가 향토 막걸리 다섯 병을 사 가지고 갔다. 그림은 어느 정도 취안(醉眼)으로 보아야 제대로 감상이 된다는 내 오랜 '지론'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림은 적당한 취안으로 보아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위해, 또 천수만 출신 이운구 화백의 '고향전'을 축하하는 의미로 사 가지고 간 향토 막걸리로 축배부터 들었다.
▲ 취안으로 그림을 보기 위해 나는 오래 전부터 '그림은 적당한 취안으로 보아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위해, 또 천수만 출신 이운구 화백의 '고향전'을 축하하는 의미로 사 가지고 간 향토 막걸리로 축배부터 들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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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구 화백은 나를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고마워했다. 나는 우선 그의 고향 전시회를 축하하는 뜻으로 그와 막걸리 잔부터 기울인 다음 적당한 취안으로 그림들을 보았다. 그의 그림 실력은 참으로 출중했다. 세밀함과 정교함, 웅장함을 함께 지니고 있었고, 주제 의식이 선명했다. 그의 그림들이 안겨주는 메시지의 확연한 속에서 나는 아름다움과 슬픔의 구체적인 실상들을 접하며, 더불어 질감 좋은 취기를 맘껏 즐길 수 있었다.

천수만 들판은 단순한 땅이 아니다. 바다를 잃은 곳이고, 바다를 그리워하는 땅이다. 그림쟁이 이운구로 하여금 그림이라는 예술행위로 상실과 슬픔의 미학을 구현하도록 만드는 곳이다. 천수만의 들판 가운데서 천수만의 옛 바다를 그리워하는 그는 자신이 그려낸 '그리움의 그림'들을 일러 '땅의 기억'이라고 했다.

1961년 생으로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현재 서울 오류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그의 진가를 드러내고 있다. 나는 그가 고향 땅에서 갖는 개인전을 통해 그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큰 감동을 맛보았다. 감미로운 슬픔이랄까, 모처럼 만에 얻는 행복감 속에서 조금은 눈물도 지을 수 있었다. 맛 좋은 향토 막걸리 몇 잔이 안겨준 적당한 취기 덕분이기도 하지만….

천수만 검은여에서 이운구 화백을 우연히 처음 만난 일이며, 그의 '고향전'에서 얻은 감동들을 가지고 글을 하나 쓰고 싶은 마음을 그때 지니게 되었지만, 엄청난 기름유출 사고로 온 지역사회가 초상집 분위기인 상황에서 태평하게(?) 미술전시회장이나 찾은 이야기를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천수만 출신 화가 이운구의 천수만 그림들을 처음 접한 때로부터 거의 일년이 지나고 있는 이제야 글 시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천수만 출신 이운구 화백은 서산시문화회관 초대전 형식의 '고향전'에 자신의 고향 마을 풍경을 그린 작품도 내놓았다.
▲ 이운구 화백의 천수만 고향 마을 천수만 출신 이운구 화백은 서산시문화회관 초대전 형식의 '고향전'에 자신의 고향 마을 풍경을 그린 작품도 내놓았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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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천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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