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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모르고 잠든 친구들이 간혹 있지만, 대부분 자못 진지한 표정들입니다.
세상 모르고 잠든 친구들이 간혹 있지만, 대부분 자못 진지한 표정들입니다. ⓒ 서부원

일제고사의 바람이 전국의 초·중·고등학교를 들썩이게 했습니다. 시험을 치른다는 이유만으로 주눅 들기 마련, 두툼한 시험지와 낯선 답안지를 받아든 아이들은 긴장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긴장되기는 감독 선생님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매 과목 당 80분이나 되는 긴 시험은 중학교 3학년 아이들에게 익숙지 않습니다. 간혹 일찌감치 '다 찍고' 엎드려 자는 경우와 몸을 배배 꼬며 못 견뎌하는 아이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시험에 '올인'합니다.

 

사실 많은 교사들이 걱정을 했더랬습니다. 내신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이 시험을 '대충' 치르면 어쩌나 우려했는데, 웬걸! 학교 내 시험 못지않은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의 전국 서열이 공개된다는 건 내신 성적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공포'라는 어느 아이의 말을 실감합니다.

 

첫 시험은 국어 과목입니다. 학교 내 시험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듣기 시험부터 무척 낯설어하는 눈치입니다. 게다가 교과서에서 보지 못한 지문들이 속속 등장하니 그렇잖아도 잔뜩 긴장하고 있는 아이들 입장에서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서술형 답안을 요구하는 수행평가가 유난히 많아 몇몇 아이들은 '그 긴' 시간이 부족하다며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문항을 꼼꼼히 살펴본 한 국어 교사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본뜬 것 같다면서, 비록 아이들이 매우 어렵게 느꼈겠지만 전반적인 출제 의도와 방향은 나쁘지 않다고 평가해 주었습니다.

 

국어보다는 한결 나아졌다지만, 이어진 과학과 사회도 까다롭게 느껴지긴 마찬가지였습니다. 1~2년 전에 배웠던 어슴푸레한 내용을 기억해내기가 힘든 모양이었습니다. 입에 맴돌지만 쉬이 나오지 않는다는 듯 안절부절 못하며 찡그린 얼굴, 얼굴들.

 

일제고사는 암기력 테스트? 난이도는 들쭉날쭉

 

문제의 수준? 이런 류의 단순 암기 문제는 학교 내 시험에서도 잘 볼 수 없습니다. 첫째 날 3교시 사회 시험의 수행평가 문제입니다.
문제의 수준?이런 류의 단순 암기 문제는 학교 내 시험에서도 잘 볼 수 없습니다. 첫째 날 3교시 사회 시험의 수행평가 문제입니다. ⓒ 서부원

그러나 둘째 날 수학 과목 시험에 이르자 교실 분위기가 어제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첫째 날 첫 시험부터 너무 어려웠다며 한숨을 몰아쉬던 아이들이 무슨 쪽지 시험 치르듯 자신만만한 표정입니다. 명색이 수학 시험인데 30분 남짓 지나자 하나 둘씩 책상에 엎드리더니, 시험 시작 50분여를 넘어서자 깨어있는 아이가 채 절반이 되질 않습니다.

 

몇몇 아이를 흔들어 깨워 물었더니 '초등학생들도 풀 수 있을 만큼 쉬웠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느끼기에 과목에 따라 난이도가 크게 달랐다고 보는 겁니다. 모든 과목에 시험 시간은 똑같은데, 어떤 과목은 끝종이 울려도 연필을 못 놓고, 또 어떤 과목은 시간이 절반도 안 지났는데도 절반이 넘게 엎드려 잔다면, 시험의 '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 시험 문제가 어땠길래 교실 분위기가 '극과 극'을 달릴까? 제 과목(사회) 시험지를 구해다 풀어보기로 했습니다. 답안지와 함께 수합된 시험지 묶음 속에서 한 장을 꺼내들었습니다. 3학년 과정만 출제되는 줄 알았더니만, 범위가 중학교 전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험지를 꼼꼼히 들여다보니 단순 기억력을 확인하는, 이른바 '암기 문제' 일색입니다. 별도의 시험 대비를 하지 않은 대부분의 아이들 입장에서 1~2년 전에 '주입된' 교과서 내용을 기억해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사고력을 요하는 '질 높은' 문제는 잘 눈에 띄지 않고, 오래 전에 배운 것에 대한 암기력만 확인하려다 보니 변별력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챙긴 셈입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과목별 난이도 조정도 실패하고, 문제의 '품질'도 마뜩치 않다고나 할까요? 무릇 국가 수준의 공신력 있는 시험은 향후 다른 시험들의 수준과 유형, 경향성을 결정하는 척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다음 단계의 시험을 대비하는 '모의고사'로 인식하게 됩니다.

 

과목별, 문항별 난이도가 들쭉날쭉하고, 단순 암기 문제가 태반이라면 학교 교육에 미칠 부작용이 적지 않습니다. 시험이 교육 과정 전체를 쥐고 흔드는 현실에서 시험에 어떤 유형의 문제가 출제되느냐는 수업의 방향을 결정짓는 열쇠 중 하나기 때문입니다.

 

일제고사, 제대로 준비한 시험 맞나요?

 

지문이 없어도 되는 문제? 지문 내용만 장황할 뿐, 문제를 푸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이 문제를 그냥 '갑신정변 때 개화파들이 주장한 정강끼리 묶어라'고 했다면 종이라도 아꼈을 것을...
지문이 없어도 되는 문제?지문 내용만 장황할 뿐, 문제를 푸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이 문제를 그냥 '갑신정변 때 개화파들이 주장한 정강끼리 묶어라'고 했다면 종이라도 아꼈을 것을... ⓒ 서부원

적잖은 반발을 애써 무시한 채 애꿎은 수업시간까지 빼먹어가며 이틀 동안 치러진 일제고사의 수준은,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 교사는 몇몇 문항을 두고 "요즘 학교 시험에서조차 보기 어려운 수준"이라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습니다.

 

어떻든 시험은 끝났고 학교별, 개인별 성적이 매겨져 학력 등급이 공개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교육 당국의 말마따나 경쟁을 통해 학력을 신장시키고, 지역별, 학교별 학력 격차를 확인해 효율적 지원을 하기 위해서라지만, '학력=암기력'이 아닐진대 창의력과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는 시험 문제를 출제할 수는 없었는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제고사의 교육적 취지 등을 접어두고라도, 준비가 태부족한 채로 강행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예년과 같이 학교마다의 '표집반'은 답안지를 교육청으로 보내 채점하지만, 나머지 학급의 경우는 교육청의 지침에 따라 학교 자체적으로 처리한 후 보고하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이른바 주관식이라고 부르는 '수행평가' 채점 부분입니다. 기실 이는 학교 내 한두 명의 관련 교과 교사들에게 할당된, 그야말로 느닷없는 '잡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평은 사소한 것일 뿐입니다. 학교별, 학생별 등급이 인터넷 등을 통해 공지되어야 하는 현실에서 어느 학교가 '제대로' 채점을 할 것인가 하는 심각한 문제가 뒤따릅니다. 심지어, 그랬을 리는 없지만, 표집반의 경우 시험 감독마저 '느슨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나도는 상황이니까요.

 

일주일 내내 시험만 치르는 아이들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 앞에서 무한경쟁 운운하며 '겁박'하는 효과는 거두었을지언정, 시험 전후로 드러난 적지 않은 허점들로 인해 이번 일제고사, 나아가 우리 교육에 대한 신뢰가 또 한 번 흠집이 날 처지입니다. 중학교 3학년 아이들 입에서조차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는 말이 들려오는 지경입니다.

 

듣자니까, 내일(16일)부터 중간고사를 치르는 학교도 있다고 합니다. 지난 월요일에 일제고사 대비 모의고사를 치렀던 학교라면, 이번 주 내내 시험만 치르게 되는 셈입니다. 정말이지 아이들에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전국학업성취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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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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