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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역사학도가 아니다. 우리 역사에 깊은 공부가 없다. 다만 우리 역사와 나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뿐이다. 나의 구한말 호남 의병 전적지 답사기는 새로운 역사를 발굴하기보다는 이미 역사학자들이 애써 연구해 남긴 저서나 기록들을 참고로 하여 그 역사의 현장을 찾아 확인하고, 후손들을 만나 마음 속에 담긴 얘기를 듣고, 이를 내 나름대로 거른 뒤 다음 세대를 위해 가능한 쉽게 쓰려고 한다." - 책 속에서

 

책의 서문에서 박도 선생님이 쓴 글을 읽으며 얼굴이 뜨거워졌다. 역사를 전공하고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지만, 역사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증언을 듣고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책으로 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늘 교과서 주변에서만 맴돌았기 때문에.

 

그 흔한 승용차도 없이 묵직한 여행용 가방을 끌고, 카메라들 둘러맨 채, 강원도 산골에서 호남지방까지, 시외버스로 열차로 택시로 번갈아 타며 동가식서가숙하며 만든 귀한 책이다. 열정과 정성으로 발품 팔아가며 보고 듣고 느끼고 써내려간 선생님의 노고를 책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박도 선생님과의 인연

 

표지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표지<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 눈빛

박도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건 오마이뉴스를 통해서였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올리시는 기사를 통해서 만났다. 서울에서 생활하시다가 강원도 안흥으로 내려와 정착하시며 주로 안흥 주변 이야기를 글로 많이 쓰셨다.

 

그러던 중 강원지역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간담회에서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상지대학교에서 간담회를 하고 대학 앞 삼겹살집에서 회식을 하면서 선생님과 대화도 나누었다. 서울에서 30여 년 아이들 가르치던 때의 얘기, 학교를 그만두고 내려오게 된 얘기, 안흥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계신 얘기, 그리고 글에 대한 얘기….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글은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어렴풋이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늦은 밤 다시 안흥으로 가셔야 하기 때문에 술은 많이 안 드셨다. 회식 자리에서 나와 선생님은 안흥으로 나는 원주 집으로 헤어졌다. 4년 전의 일이다.

 

발로 찾아 써내려간 호남 의병의 자취

 

역사학도가 아니라고 겸손해하시지만 역사 분야에 선생님이 남긴 자취가 뚜렷하다. 하얼빈에서 상하이까지 드넓은 만주와 중국 일대에 흩뿌려진 항일 독립 투쟁의 자취를 찾아다니며 <항일유적 답사기>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서 찾은 해방부터 한국전쟁 종전까지의 귀중한 사진을 모아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2,3>,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을 출간했다.

 

이번에 출간한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도 8개월에 걸쳐 강원도 횡성에서 호남지방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오가면서 기나긴 답사를 통해 호남의병의 자취를 찾아 써내려간 항일유적 답사기다.

 

강원도 산골에서 호남지방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안흥에서 횡성까지 버스를 타고 나와서, 다시 원주행 버스로 갈아타고, 원주에서 대전행 버스를 타고 대전까지 간 뒤, 서대전에서 광주까지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짐도 많다. 카메라, 지도, 녹음기, 참고 서류, 스캐너 등등은 필수품이었다.

 

호남지방의 의병 전적지를 찾고, 후손들, 향토사학자들, 대학 교수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사진 찍고 자료를 구하고 글을 쓰면서 선생님은 철저하게 의병의 고귀한 정신을 닮고자 했다. 호남 답사를 떠나는 날 새벽 목욕재계하고, 백성들에게 절대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했던 의병의 뜻을 받들어 후손들 취재 시간은 가급적 식사 시간을 피해 부담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할아버님, 저도 폭도가 되었습니다

 

구한말 의를 위해 들고 일어난 의병들을 일제는 폭도라 불렀다. 나주에서 나고 자란 김태원, 김율 형제는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에 격분해서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문수사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무동촌 전투에서 '의병잡는 귀신'으로 불리던 적장 요시다를 처단하고 승리를 거두면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물망처럼 포위해 들어오는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을 벗어나지 못하고 1908년 어등산 전투에서 김태원 의병장은 일제의 집중사격을 받아 순국했다. 다음날 일제는 생포된 동생 김율을 끌고 와서 형의 시신을 확인시킨 뒤 그 자리에서 총살시켰다. 그리고 폭도들을 처단했다고 선전했다. 

 

김태원 의병장의 후손 김갑제씨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시민군으로 참가했다. 당시 계엄군은 이들을 폭도라 불렀다. 김태원 의병장이 순국한 지 72년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 기막힌 사연을 박도 선생님이 인터뷰를 통해 밝혀주었다.

 

박도 : 광주민주화운동 때 시민군이 된 소감은?

김갑제 : 당연히 나섰어야지요. 그때 저는 시민군이 되고서 "할아버님, 저도 폭도가 되었습니다"라고 할아버지 영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지금도 나라에 불의가 판치고, 무고한 백성들이 살상을 당하면 비록 폭도라는 말을 들을지라도 다시 나설 겁니다. - 책 속에서

 

궁핍한 의병 후손들의 삶

 

선생님이 만난 의병 후손들의 삶은 대부분 가난과 궁핍을 벗어나지 못했다. 폭도의 가족이 되어 갖은 핍박 속에서 가난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제대로 배우지 못해 역사 속의 주변인으로 맴돌았다.

 

의병의 후손들이 가난과 궁핍, 못 배운 설움 속에서 주변인으로 맴돌 때, 친일파의 후손들은 사회 곳곳에서 주류가 되어 권력과 금력을 장악했다. 해방 63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현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의병장 고향을 찾아다니는 박도 선생님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기꾼이 판치는 세상에 의병장 고향은 찾아서 뭐할 것이냐고 지청구를 하는 택시 기사,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세상에 정년이 보장된 교사직을 버리고 전라도 산골을 찾아다니는 걸 한심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그래도 우직하게 답사를 계속했다. 우직한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지켰던 것처럼, 우직하게 호남벌 곳곳에 남아 있는 의병의 자취를 찾아 걷고 또 걸었다. 담살이 의병장이 살았던 토담집은 흔적도 없는데, 단군 이래 최대 도적도, 법을 짓밟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시정잡배도 떵떵거리며 사는 엿 같은 세상을 한탄하며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던 김남주의 '죽창가'를 떠올리며 걸었다.

 

가치 있는 역사는 머리에 담아두기 위한 지식이 아니라, 발로 찾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걸 생생하게 보여주는 정말 값진 책이다. 책을 읽으면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선생님의 뜨거운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덧붙이는 글 | 박도 / 눈빛 / 2008.8 /1만2000원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 호남벌에 휘날리는 창의의 깃발

박도 지음, 눈빛(2008)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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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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