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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을 태우거나 짐을 운반할 때 쓰이는 쿠바의 주요 교통수단. 도시든 시골이든 흔하게 볼 수 있다.
▲ 마차 승객을 태우거나 짐을 운반할 때 쓰이는 쿠바의 주요 교통수단. 도시든 시골이든 흔하게 볼 수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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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로운 오후 햇살이 얼굴에 입맞춤을 하자 감긴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잠깐 사이에 30분이 흘렀다. '아차!' 잠시 쉬려고 도로 옆 오두막 그늘로 들어와 눈을 붙였는데 시간이 금세 그렇게 흐른 것이다. 얼른 길로 나와 J의 행적을 추적했지만 길 위엔 빈혈기에 보이는 아지랑이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허둥지둥 자전거를 끌고 나왔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 종잡을 수 없었다. 여기서 더 기다려야 하는지 아니면 혹시나 지나쳤을지 모르니 얼른 따라잡아야 하는지 말이다.

J와의 거리가 벌어진다 싶어 잠시 쉰다는 게 이렇게 되고 말았다. 자리에 앉으니 눕고 싶고, 누우니 자고 싶은 게 마음인지라 그만 피곤에 세상 모르게 자버린 것이다. 당황해서 두리번 거리는데 마침 앞쪽에서 한 청년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길래 그를 잡고 혹시 자전거 타는 동양인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가끔 보면 주스만 파는 사람들이 있다. 의외로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
▲ 생과일 주스 한 잔 가끔 보면 주스만 파는 사람들이 있다. 의외로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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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자전거 타던 치노? 아까 이미 이 길로 지나갔는데."

그는 손가락으로 내 앞을 가리키며 녀석의 종적을 확인해주었다. 아뿔싸! 내가 잠들어 있던 오두막이 바로 길 맞은편에 있었는데 그걸 못보고 지나쳤나? 하긴 워낙 주변을 보지 않고 묵묵히 자전거만 타는 녀석이니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얘기를 듣자마자 맹렬히 페달을 굴려 언덕을 넘고 다리를 건너며 속도를 냈다. 행여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당황해 할 녀석이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따라갔는데도 J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30분이면 아무리 빨라도 15km 이내에 있을 것이고, 그 전에 생긴 격차와 지금 내가 달리는 속력을 감안하면 시원하게 뻗은 도로 어디에라도 그의 모습이 보여야 했다. 게다가 날씨가 아직 덥고, 높은 언덕까지 있어서 제 아무리 요즘 컨디션이 물오른 J라 해도 축지법처럼 훌쩍 넘어갈 만큼 녹록한 상황이 아니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너무너무 맛있다. 가격은 3페소(약 150원).
▲ 봉지 요구르트 새콤달콤한 맛이 너무너무 맛있다. 가격은 3페소(약 150원).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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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겠다 싶었다. 우선 타는 목마름을 해갈하려 다음 마을 정류장에서 산 봉지 요구르트를 들이킨 후에 어떻게 J를 만날까 방법을 모색해 보기로 했다. '~ 요거 의외로 너무 맛있는데?' 정말이지 요구르트가 너무 맛있었다. 잠시 J의 존재 따위를 잊을 정도였다. 한 번 마셔보니 너무 맛있길래 한 봉지 더 샀다.

500ml 정도 되는 양이 막힘없이 목으로 흘러들어갔다. 달콤쌉쌀한게 내 입에 아주 딱이었다. 가격도 말도 안 될 만큼 쌌기에 혼자만 챙겨 먹어도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도저히 꿀처럼 달콤한 맛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어휴, 더운데 기다리는 것도 힘드니 한 봉지 더!' 그렇게 세 번째 봉지를 입으로 털어 넣고서야 간신히 이만하면 됐다 싶을 만큼 만족감을 얻었다.

오랜만에 빵이 아닌 밥으로 한 끼 해결.
▲ 허름한 식당 오랜만에 빵이 아닌 밥으로 한 끼 해결.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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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에 돼지고기를 얹은 식사. 가격은 20페소(약 1000원).
▲ 맛있어 보이나요? 밥에 돼지고기를 얹은 식사. 가격은 20페소(약 1000원).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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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는 그 때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다린 지 한 시간이 지나도록 말이다. 그럼 이미 맹렬한 기세로 지나쳤단 말인가? 어제, 평소와는 다른 괴물같은 그를 보았기에 그 가능성도 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론 그 거리를 이미 지나갔다는 게 납득이 되질 않았다. 무더위에 지쳐버린 난 잠시 정류장에 머무는 버스 기사에게서 J의 흔적을 찾기로 했다.

"저 실례합니다만 혹시 오다가 노란색 옷을 입은, 자전거를 타는 동양청년 한 명 못 봤나요?"
"치노?"
"예예, 몸은 이렇게 뚱뚱하고 얼굴은 하얗고 거북이처럼 오는 녀석…."

나는 스페인어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과장된 판토마임으로 채워 넣으면서 이해를 구하고 있었다.

"본 적 없는데?"

아! 역시 지나간 건가? 어깨에 힘이 쫘악 빠지는 찰나 갑자기 뒤쪽 승객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의 인솔 아래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 도로를 건너는 아이들 선생님의 인솔 아래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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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건지 모르겠지만 오면서 한 명 본 거 같아요. 힘들게 자전거 끌고 오던데. 뒤에 짐도 잔뜩 있고."

옳거니! 아직 내 뒤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제야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J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여전히 J는 보이지 않고, 다른 자전거들만 지나가는 것이었다. 뭔가 정도를 벗어났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치노는 어디에...뒤에 있는 거야? 앞에 있는 거야?

'설마 아까 승객이 잘못 본 건 아닐까?'

기다리고 기다려 봐도 이따금 지나치는 자전거는 뒤에 짐을 잔뜩 실은 농부들이나 다른 현지인이었다.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에 다시 트럭에 대고 혹시 자전거 타는 동양청년 못 봤느냐고 물어보니 길을 오면서 그런 친군 전혀 못 봤단다. 길이 단 하나뿐이니 못 봤다면 없는 것이다.

처량한 울음 끝에 지친 돼지.
▲ 돼지 잡으러 나간다 처량한 울음 끝에 지친 돼지.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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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또 지난번처럼 사라진 걸로 난리치는 건 아닌지. 뒤따라오는 오토바이 운전자도 그런 친구는 못 봤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또다른 트럭기사는 한 동양청년을 봤다고 한다. 자신은 길을 힘겹게 헤치고 가는 친구를 분명 보았노라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헷갈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제대로 본거야 만 거야? 내 뒤에 있는 거야, 내 앞으로 이미 지나친 거야?

이젠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뜨거운 한숨을 토해내며 체념한 채 휴식을 취하고 비도 피할 겸 정류장으로 들어갔다. 이제 모든 것은 하늘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 미련에 신호로 멈춘 차에 물어보니 확실히 자전거 여행자는, 그것도 동양인은 눈에 보이지도 않더란다.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 큰 성인인데 J 혼자 어련히 잘 하리라 생각하고는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노력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비가 그칠 때쯤 저 멀리서 웬 지프차가 오더니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런데 조수석을 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형! 저예요!"

J가 날 보고 환하게 웃는 것이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이지? 그렇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을 보니 내내 기다렸다고 화도 못내고, 또 나 때문에 엇갈려 그도 고생했나 싶어 미안하기도 했다.

"형, 사실은 오다가 펑크가 나 버렸어요. 이미 형은 저 멀리 가 버렸는데 펑크 수리할 공구도 형에게 다 있잖아요. 어찌할 바를 몰라 망연자실했는데 갑자기 비까지 오는 거예요."

J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이 늦은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신 때문에 걱정했을 내게 미안한 표정이었다. J의 자전거 바퀴를 빼내 펑크난 부분을 수리하며 계속 녀석의 얘기를 들었다.

쿠바에서는 꽤 오래 전에 사라진 우리나라 옛 버스들이 자주 눈에 띈다. 먼 이국에서 한글을 보니 반갑기만 하다.
▲ 한국버스 쿠바에서는 꽤 오래 전에 사라진 우리나라 옛 버스들이 자주 눈에 띈다. 먼 이국에서 한글을 보니 반갑기만 하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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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저런…그래서요?"

"너무 힘들었어요. 날은 덥지, 갑자기 비는 오지, 목은 마른데 이미 물은 다 마셔버렸지…. 정말 힘들어서 나무 아래로 가서 울어 버렸어요. 도대체 방법이 없잖아요. 펑크 난 자전거를 밀고 언덕을 넘어 갈 수도 없고, 형은 이 사실을 모르니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고…."
"그런데 어떻게 지프차를 타고 왔어요?"
"그러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낙심했는데 그 때 배가 고프더라구요. 그래서 일단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민가로 갔어요. 배고프다고 얘기하니까 친절하게 망고를 주는 거예요. 그거 먹고 나서 길로 나왔는데 갑자기 지프차 운전사가 와서 상황을 파악하고 절 여기까지 실어다 준 거예요."
"다행이네요.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요?"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형이 이미 언덕을 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형 찾을 때까지 차타고 오려고 했어요."

돈키호테의 대형 철골 조각상이 쿠바 대형도시 올긴에 장식돼 있다. 아마도 식민지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짐작된다.
▲ "아니 왜?" 돈키호테의 대형 철골 조각상이 쿠바 대형도시 올긴에 장식돼 있다. 아마도 식민지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짐작된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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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름때 묻은 손을 한 번 털고는 너털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J를 두고 '봤네, 못 봤네' 하는 엇갈린 진술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도로 가 나무에 있다 민가에 들어갔다 다시 도로에 나왔다가 차를 타고 온 J의 행적 때문이었던 것이다. 혹시나 정류장 안에 있던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예 차 타고 쭉 가버렸을 녀석을 생각하니 다행히 우리에게 더 큰 시련을 주지 않으려는 하늘의 뜻인가 싶었다.

이렇게 J와는 다시 몇 시간 만에 극적으로 재회했다. 조금 더 거리를 좁혀 앞섰어야 했는데 어제부터 J가 자전거 여행에 완전히 적응했다고 판단해 순간 방심했던 것이 실수였다. 수리를 마친 다음 땀으로 범벅된 저지를 고쳐 입고, 다시 길 위로 나왔다. 선선해진 해거름에 고글 사이로 들어온 먼지를 핑계로 윙크를 하고 가벼운 발놀림으로 회전수를 올렸다. J는 그 어느 때보다 내 뒤에 바짝 붙어 달렸다.

매번 실수하고 눈물짓지만 누구보다 순수한 스물 한 살 청년이 내 쿠바 자전거 여행 파트너다.
▲ J 매번 실수하고 눈물짓지만 누구보다 순수한 스물 한 살 청년이 내 쿠바 자전거 여행 파트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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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최근 도전과 열정, 감동의 북미 대륙횡단 스토리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를 발간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쿠바,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체게바라, #라이딩인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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