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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작 속에 흉년 맞은 농촌

 

올해는 지역적인 가뭄을 제외하고는 태풍이나 병충해가 없어 벼를 비롯한 밭작물이 풍작이랍니다. 풍년이라니, 농민들의 훈훈한 미소와 풍족한 마음이 그려지는군요. 아니,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농민들이 잘 여문 벼논을 갈아엎고, 튼실하게 잘 익은 과일을 따지도 않고 있습니다. 농사를 돕는 데 쓰여야 할 트렉터는 도리어 수확된 농작물을 짓밟아 부셔버립니다.

 

지난 일 년 사이 기름값, 비료값, 사료값 등 가격이 안 뛴 게 없습니다. 하지만 농산물 가격은 폭락했고 많은 농민들은 생산비조차 건지기 어렵다고 하네요. "이거 팔아봤자 인건비에도 미치지 못해요"라는 한 농민의 말, 수확한 과일이 폐기처분되고 배추와 무가 밭에서 그냥 썩어가는 이유랍니다. 한여름의 뙤약볕과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 땀 흘려 일한 대가가 생존을 옥죄는 근심걱정이라니요. 농작물이 풍작임에도 농민들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갑니다.

 

이러한 와중에 터진 쌀 직불금 부정수령 파동은 농민들의 허탈감을 얼마나 더 깊게 만들었을까요. 농촌의 어렵고 절박한 현실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지만, 요즘 들어 한층 더 무거워만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농민들의 바짝 타는 근심걱정이 덜어질 수 있을까요. 누가 과연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줄까요.

 

농민의 마음을 노래하는 농부시인 서정홍

 

여기 농민들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농부는 공기와도 같은 것, 공기 속에 보이지 않는 산소와도 같은 것, 물과도 같은 흙과도 같은 것입니다. 돈벌이가 안 될 줄 뻔히 알면서도, 봄이면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농부들이 진짜 살아 있는 성직자입니다. 하느님, 부처님 말씀을 입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따르는 성직자입니다."

 

시인 서정홍은 농민과 농사의 가치를 예찬합니다. 1958년에 태어난 시인은 10여 년 전부터 황매산 자락에 있는 작은 산골마을(나무실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의 고단한 농사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시를 쓰는 시인은 다름 아닌 ‘농부시인’이지요. 시집으로는 <58년 개띠>,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닳지 않는 손> 등이 있습니다.

 

시인은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일들을 시로 담아냅니다. 그의 시에는 고된 노동과 가난이 있는 농촌의 현실도 담겨 있고, 농촌 사람들의 여유롭고 따스한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한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우리말을 살려 쓰려고 애썼습니다.”라는 시인의 말처럼 그의 시는 읽기 쉽고 자연스럽더군요. 진심이 담긴 낮은 시선으로 직접 땀 흘려 일하는 농부시인의 시에서는 진솔한 땀 냄새가 나네요. 여기 흙 묻은 손으로 쓴 시가 있습니다.

 

비가 많이 와도 걱정 / 비가 오지 않아도 걱정 / 산 짐승들, 산새들, 온갖 해충들 / 피해 입을까 걱정 또 걱정

 

8월부터 12월까지 / 애써 가꾼 배추 1500포기 / 그 가운데 500포기는 벌레들과 나누어 먹고 / 1000포기 짐차에 싣고 공판장에 갔다.

 

배추 한 포기 200원이라 20만 원 받았다. / 배추 뽑아서 싣는 인건비 8만 원 / 짐차 운송비 10만 원 수수료 1만 원 / 밥값 5000원 막걸리 5000원 / 경비 계산해 보니 딱 20만 원이다. / 땡전 한 푼도 집에 가져갈 게 없다. / 오는 길에 젊은 이장한테 돈 빌려서 / 막걸리 한잔 더 마시고 왔다. (시 ‘순만이 형’ 전문)

 

죽을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여 / 병원에 간 할머니한테 / 담당 의사가 말했습니다.

 

"몸 안에 큰 병이 열두 가지나 됩니다. / 앞으로 일하시면 안 되고 / 당장 입원하셔서 치료를 해야 하겠습니다."

 

"아니고, 선상님! / 제 병이 열두 가지밖에 안 됩니꺼? 그라믄 일을 해도 끄떡없심니더. 큰 병이 서른 가지나 된다는 / 수동 할매도 일하는데……."

 

할머니는 /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 이른 아침부터 콩밭을 맸습니다. (시 '수동할매도 일하는데' 전문)

 

안타까운 농촌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시. 그러나 시의 한 자락에는 허허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로움도 담겨있습니다. 시인은 낮은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시 속에 담아 농민들의 평범한 삶을 정성으로 길어 올리고 있군요.

 

행복한 농부시인의 이야기

 

지난달 28일 밤, 농협중앙회 용산별관에서 <시인의 마음, 행복한 농부>라는 주제로 시인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그날 담아온 시인의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전합니다.

 

 황매산 자락의 나무실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농부시인 서정홍.
황매산 자락의 나무실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농부시인 서정홍. ⓒ 출판사 나라말

시인은 “여러분은 행복합니까? 아침에 눈을 뜰 때면 살아있다는 설렘을 느끼시나요?”라고 물으며 행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불행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살아가면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크고 작은 선택들은 결국 다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서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모두가 더불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는, 전쟁같은 도시 문화를 비판합니다.

 

“내가 도시에 살다가 산골마을에 들어와 농사짓고 사는 까닭은 행복하게 살다가 행복하게 죽고 싶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앞서거나 뛰어나지 않으면 사람대접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도시, 몇 년을 또는 수 십 년을 한 직장에서 일하다가 나이가 들거나 몸이 아프면 낡은 기계처럼 버려질 수밖에 없는 도시, 돈과 권력과 힘이 사람을 모으고 흩어지게 하는 도시, 아무리 생각해도 서로 나누고 섬기면서 다함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는 구조를 가진 도시, 잘 알면서도 여태 도시에서 살아남은 내 삶은 온갖 거짓과 위선투성이였습니다. 하루하루 지친 영혼을 달랠 시간조차 갖지 못하고 쫓기듯이 바쁘게 살아온 것입니다.”

 

“농사지으며 산다고 해서 이 모든 문제들이 풀리진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생각하고 다짐했습니다. 남의 논밭을 빌려서라도 농사짓고 살아야만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이 길이 아무리 불편하고 힘겨울지라도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다면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귀농했습니다.”

 

도시 속에서 매일매일 지치고 닳아가는, 결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시인의 이야기는 마음을 술렁이게 만듭니다.

 

나아가 시인은 농부가 없으면 우리는 결코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소중한 일은 자연과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농부는 자연과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가장 소중한 직업이지요. 모든 직업이 다 사라져도 사람은 살 수 있지만 농부가 없으면 어느 한 사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자동차나 컴퓨터를 씹어 먹고 살 수도 없고, 냉장고나 텔레비전을 씹어 먹고 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될 만한 농사라고 지어봤자 거의 빚더미에 내려앉기가 바쁜 것이 우리 농촌 현실입니다. 풍년이 들면 농산물 값이 똥값이고, 농산물 수입을 해대는 자본가와 고급관리들 때문에 농부들은 이래저래 생고생만 하다가 늙고 병들어 죽어 가는 것입니다. 겨우 살아남은 우리나라 늙은 농부들은 지금 늙고 병들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저 무너져 가는 우리 농촌을 지켜보면서 마지막 삶을 외롭게 보내고 있습니다. 그 외로움의 깊이를 누가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농촌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우리를 살려왔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신음하고 있습니다. 도시 속에서 그분들은 이미 오래 전에 잊혀 졌고, 농업은 천박한 계산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습니다. 농촌의 문제는 곧 도시의 문제이며 이 나라와 전 인류의 문제입니다. 농촌을 살리는 길은 농민만을 위한 자선이 절대 아닙니다. 건강한 농촌이 있을 때 비로소 건강한 도시의 유지도 가능한 게 아닐까요?

 

다음으로 시인에게 질문을 건넸습니다.

 

‘농산물 가격 폭락과 쌀 직불금 파동 등 농민들의 어려움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요즘인데요, 농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요즘 농민들의 형편이 어렵다 어렵다고 말하는데, 생각해보면 오랜 옛 시절부터 지금까지 농민들의 형편이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육체노동을 경시하는 오늘날 그리고 직불금 파동 등이 있은 요즘이 더 힘들겠지요. 하지만 긴 역사 속에서 농민들은 늘 꿋꿋하게 인내하고 이겨왔습니다. 살림은 가난했지만 마음은 넉넉했으며,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여유로웠습니다. 빚에 시달려 괴로워하면서도 땅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으며, 온갖 자연 재해를 입으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농민들은 희망을 안고 또 일어날 것입니다.”

 

시인의 말에서 농민을 향한 굳은 믿음과 애정 깃든 바람이 느껴집니다. 이렇듯 시인이 품은 농민에 대한 믿음, 애정, 희망의 기운을 느끼며 시인의 시를 떠올려봅니다.

 

이랑을 만들고 / 흙을 만지며 / 씨를 뿌릴 때 /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시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전문)

 

날마다 논밭에서 일하는 / 아버지, 어머니 손.

 

무슨 물건이든 / 쓰면 쓸수록 / 닳고 작아지는 법인데 / 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

 

나무로 만든 / 숟가락과 젓가락도 닳고 / 쇠로 만든 / 괭이와 호미도 닳는데 / 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

 

나무보다 쇠보다 강한 / 아버지, 어머니 손. (시 ‘닳지 않는 손’ 전문)

 

농민을 향한 긍정의 힘. “생명을 가꾸는 농부들은 시를 쓰지 않아도 훌륭한 시인입니다. 비록 이 시집이 보잘것없다 해도 그분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시인의 바람처럼 이러한 시인의 시가 농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길 희망하며, 이내 마지막 질문을 건넸습니다.

 

‘쌀 직불금 파동으로 많은 도시 사람들도 분노를 했고, 농민들에 대한 걱정과 관심을 좀 더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도시 사람들에게 시 하나를 들려주신다면 어떤 시를 고르시겠습니까?”

 

“‘마지막 뉴스’라는 시가 있습니다. 상상을 통해 쓴 시인데,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도시를 그리고 있지요. 지금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많은 도시 사람들이 이 시를 꼭 읽어주길 바랍니다.”

 

(시 ‘마지막 뉴스’는 하단에 박스기사로 실었습니다.)

 

사람과 자연을 살리는 길이란 그렇게 거창하고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을 스승인 농부들을 만나면서 절실하게 깨달았다는 시인. 우리는 그러한 시인의 깨달음을 그의 이야기와 시를 통해 느껴볼 수 있습니다. 농부시인 서정홍을 바라보며, 우리가 얼마나 함부로 먹고 마시며 버리고 살고 있는지, 농민과 농촌의 가치를 얼마나 무시하며 잊은 채 살아 왔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농부시인 서정홍의 시를 통해 농민들과 도시인들, 각기 품은 지친 마음과 병든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받았으면 좋겠네요.

 

시인 서정홍의 시 '마지막 뉴스'

시청자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지금 막 들어온 긴급 뉴스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차마 고향을 버리지 못하고 농사짓고 살아가던 몇 안 남은 늙은 농민들이, 농사일 힘에 버거워 자기 먹을 농사만 짓기로 결의하고 파업을 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큰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만 있으면 수입 농산물을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한국 농민뿐만 아니라 중국, 미국, 인도, 칠레, 세계 모든 농민들이 파업에 동참하는 바람에 마구 들어오던 수입 농산물마저 완전히 끊겨 버렸습니다.

 

지금 전 세계, 모든 도시는 거의 먹고살기 위한 전쟁터로 변했습니다. 사람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대도시 큰상점뿐만 아니라 마을 구멍가게까지 침입하여 약탈해 갔습니다. 수십 억 수백 억짜리 예배당 따위도 사람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이 텅텅 비었습니다. 이제 평당에 몇 천만 원 한다는 고급 아파트를 몇 만 원에 내놓아도 팔리지 않습니다. 잘 돌아가던 조선소도 자동차 공장도 문을 닫았습니다. 유명하다는 식당도 병원도 약국도 모든 관공서도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그나마 불행 가운데 다행인 일은,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함께 살 길을 찾아 흙냄새 나는 농촌 들녘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시에서 음식 쓰레기통을 뒤져 살아가던 쥐와 고양이와 새들도, 사람들이 던져 주는 먹이로 살아가던 짐승들도, 그들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밤마다 손님을 받기 위해 잠도 자지 않고 설쳐 대던 편의점과 식당과 술집과 노래주점과 나이트클럽과 온갖 가게들과 화려하고 웅장한 모든 시멘트 건물들이 하나 둘 폐허로 변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이제 성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버리고 떠난 고향이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집 나간 아들 기다리듯 오래전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도시에서 갖은 쓰레기를 다 만들어 내면서 입으로만 지구를 살려야 한다는 둥 양심을 지켜야 한다는 둥 떠들어 대던 신부도 수녀도 목사도 집사도 교사도 교수도 박사도 철학자도 예술가도 시인도 정치인도, 이제야 제정신을 차리고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도시에서 들려 드리는 마지막 뉴스를 마치겠습니다. 그동안 저희 방송을 끝까지 시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 방송국도 오늘 보따리를 쌌습니다. 그럼 고향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닳지 않는 손 - 서정홍 동시집

서정홍 지음, 윤봉선 그림, 우리교육(2008)


58년 개띠 - 고침판

서정홍 지음, 보리(2003)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서정홍 지음, 나라말(2012)


#서정홍#내가 착해질 때#닳지 않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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