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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 리브로

전진하지 않는 것, 현재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 퇴보하는 것,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의지하는 것은, 우리를 강하게 매료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고수(固守)할 수 있으며, 그것에서 우리는 안전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미지의 것·불확실한 것 속으로 발을 들여놓기를 두려워하며,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피한다. 실제로 그 '한 발짝'은, 그것을 내딛은 '후'에는 위험으로 보이지 않을는지도 모르지만, 그 한 발짝을 내딛기 '전'에는 그 너머에 보이는 새로운 국면은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나아가서는 두려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옛것, 시도된 적이 있는 것만이 안전하다. 아니, 안전한 것처럼 보인다. 모든 새로운 한 발짝은 실패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사람들이 그토록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중에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외부의 침입에 취약
 
흔히 "나이 먹으면 보수화된다"고들 한다. 실제로 일상의 경험이나 선거 결과에서 그런 경향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나이를 먹으면 보수화되는 걸까? 그 이유에 대한 총체적 설명은 아니지만 유의미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일부를 발췌해 봤다.

 

사실 이 대목은 에리히 프롬의 또 다른 명저(名著)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기도 한데 마지막 문장의 "자유"란 말을 "진보"로 바꾸면 "보수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적절한 해석으로서 손색이 없다.

 

프롬의 말대로 "전진하지 않는 것, 현재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 퇴보하는 것,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의지하는 것은, 우리를 강하게 매료한다." 그것은 일종의 본능과도 같다.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에는 인간이 얼마나 안전(安全)을 지향하는지 잘 드러나 있다. 아주 간단한 예로 우리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을 보자. 옷은 일차적으로 우리 몸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 외에 우리 몸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기능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옷은 찢어지기 쉽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주위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만들고 물리적 거리(距離)를 확보하려 애쓴다(이런 점은 특히 동양인보다 서양인이 더 두드러진다). 심지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사방을 벽으로 막아놓은 집 안에서조차 100%의 안전을 확신하지 못한다.

 

이처럼 인간은 태생적으로 외부의 침입에 취약했고 그로 인해 안전에 대한 갈망과 외부에 대한 경계를 계명(誡命)처럼 간직한 채 살아야만 했다. 이는 곧 안전(安全) 혹은 안정(安定)을 우선시하는 보수적 정서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간직한 보편적 정서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안전에 대한 갈망과 외부에 대한 경계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말했듯이 미지의 것에 의한 접촉에서만큼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없다(예컨대 밤, 어둠). 이 점에서 엘리아스 카네티와 에리히 프롬의 시각은 정확히 일치한다. 에리히 프롬 역시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보수화의 동인(動因)임을 지적하고 있다.

 

'오바마' 선택한 미국,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라

 

물론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보수화 현상에서만 노정되는 문제라기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보수, 진보를 구분할 때 미지에 대한 두려움 같은 정서적 측면이 이미 그 안에 내포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때론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전통을 수호한다는 명분을 등에 업고 완강하게 표출되는 역사적 사례를 우리는 수없이 목격했다.

  

애초에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적 좌표는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다. 단지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결과물로 선악(善惡)을 재단할 뿐이다. 따라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더없이 신중해야 한다. 그렇다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중하고 차분하게 이해득실을 따져 방향이 결정되면 과감하게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자세 아닐까?

 

오늘(5일)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미국인들이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편을 선택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자의가 아닌 타의(경제위기)에 가까울지라도.

 

미국인들의 선택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낼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일단 그들의 용기 있는 선택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반세기 전 그들이 달에 처음 발을 내디디면서 했던 말처럼 오늘 미국의 선택이 인류에게 거대한 발걸음으로 기록되길 희망한다.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까치(1996)


#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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