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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의 위기, 사회 전반의 위기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중국발 멜라민 파동은 몇달이 지나도록 그칠 줄 모른다. 우리나라도 멜라민 파동을 호되게 맞으며 많은 사람들이 먹을거리에 대한 큰 불안함을 갖게 되었고, 국내 식품유통관리 시스템의 전반적인 부실함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몇년, 아니 불과  달 전만 되돌아봐도 이번 멜라민 파동은 그저 하나의 동떨어진 우발적 사고가 아님이 분명해진다. 쥐머리 새우깡, 톱밥 고추가루, 납이 든 꽃게 등 먹을거리에 대한 아찔한 파동의 예는 안타깝게도 수없이 많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사고들을 단순하게 '후진국' 중국의 잘못, 어느 한 기업의 한 실수 정도로 가볍게 넘길 수 있을까? 좀 더 큰 시야를 갖고 이 사고들을 바라봐야하지 않을까?

멜라민 파동은 또 하나의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 오늘날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식품산업 시스템이 야기하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수없이 많다. 무분별한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으로 인한 환경파괴, 가공식품의 폭증과 함께 눈에 띄게 늘어난 암·심혈관질환·당뇨병·비만 등의 질병, 농경지 확보를 위한 열대우림의 파괴, 어쩔 수 없이 상품작물만을 재배하며 정작 굶어 죽어가는 후진국 사람들 등등.

예민한 더듬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오늘날의 먹을거리와 관련된 문제들이 그저 먹을거리의 위기가 아닌 삶 전반의, 사회 전반의 위기로 다가옴은 일면 너무도 당연한 게 아닐까?

생명의 농업을 위해 모인 정농회

 우리 땅에 처음으로 유기농업의 씨앗을 뿌린 정농회. 30여 년 동안 정농회는 바른 농사, 바른 삶, 바른 먹을거리를 고민해왔다.
 우리 땅에 처음으로 유기농업의 씨앗을 뿌린 정농회. 30여 년 동안 정농회는 바른 농사, 바른 삶, 바른 먹을거리를 고민해왔다.
ⓒ 정농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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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누구보다도 예민한 더듬이를 가지고 30여 년 이상을 건강하고 정직한 먹을거리 나아가 그러한 삶, 그러한 사회를 위해 고민하고 땀흘려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진리를 생명의 농업으로 실천하기 위해 모인 '정농회(正農會)' 사람들이다.

1976년에 첫걸음을 내딛은, 농민들의 모임인 정농회는 일본 기독교 농민단체 애농회(愛農會)를 이끌던 고다니 준이치(小各純一) 선생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창설되었다고 한다. 정농회 회원들은 지금은 고인이 된 고다니 선생을 계속해서 정성스럽게 추모하며 그를 아끼고 있는데, 정농회 고문 원경선씨의 회고를 들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고다니 준이치(小谷純一) 선생이 1975년 한차례 유기농 강연을 한 뒤 전국에서 선생을 다시 만나 볼 수 없느냐는 성화가 들끓었다. 그래서 6개월 만에 고다니 선생의 두 번째 방한을 추진하게 됐다.

두 번째 초청에도 고다니 선생은 흔쾌히 받아줬고 이듬해인 1976년 1월 방한, 마찬가지로 부천 풀무농장에서 또다시 강연회를 가졌다. 두 번째 방문 강연에는 전국에서 숱한 일꾼 40~50명이 몰려들어 강연장을 빼곡히 메웠고 고다니 선생의 강연은 성황리에 진행됐다.

강연이 끝나고도 참석자들은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리곤 누구랄 것 없이 "우리도 일본의 애농회와 같은 유기농 단체를 만들자!"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즉석에서 유기농 단체 '정농회(正農會)'가 설립됐다."

그렇게, 연수회를 마친 농부들은 고다니 선생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강권으로 정농회를 창립한다"고 선언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정관으로 삼아 이 땅에 생명농업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고 한다. 비로소 우리나라에 조직적 유기농법 실천의 첫 출발점이 생겨난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정관으로 삼기로 한 정농회는 일본 애농회의 강령을 원용하여 그들만의 강령 다섯 가지를 세상에 선포하게 된다.

[정농회 강령']
一. 우리는 농업이 인류생활의 근본임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생육 번성케 하시는 일에 순응하기 위하여 바른 농사에 정진한다.
一. 우리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확신하고 정농으로써 이웃 사랑하는 실천을 철저히 한다.
一. 우리는 농사의 참사명을 자각하고 정농정신으로 모든 노고를 기쁘게 받는다.
一. 우리는 농촌의 근본적인 개선이 청년들에 대한 정농교육에 있음을 확신하고 이를 위해 자신이 모범이 된다.
一. 우리는 동지적 단결을 확고히 하여 사랑과 협동의 이상농촌 건설에 매진함으로써 인류사회의 초석이 된다.

정농회의 강령을 간략히 정리하면 '바른 농사에 정진한다. 정농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한다. 정농정신으로 모든 노고를 달게 받는다. 청소년 정농교육을 위해 모범이 된다. 사랑과 협동의 이상농촌 건설에 매진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강령에는 유기농이라 표현이 한 군데도 없지만 '정농'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이미 유기농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탄생배경 및 강령을 통해 정농회가 '하나님의 뜻'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정농회가 말하는 하나님과 기독교적 정신의 갈래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10월23일 서울 송파구에 자리잡은 정농회 사무실에서 만난 진경환 사무국장의 이야기에 의하면 정농회에서 따르고 있는 하나님이란 제도적 기독교의 닫힌 하나님이 아닌 열린 기독교의 하나님적 정신이라고 한다.

실제로 정농회 정신의 뿌리는 유영모·함석헌 선생의 씨알사상에 닿아있는데 함석헌 선생이 내세우던 무교회주의, 기독교의 신이 아니라 하나이자 한 나인 전체를 높여 부른 이름으로서의 하나님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농회가 추구하는 것은 성경의 사랑, 순응, 봉사 등의 가치적 측면인 것이고 따라서 정농회 회원가입 및 활동시 종교의 유무 여부, 종교의 갈래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한다.

'빨갱이'로 몰릴 수도 있는 차가운 시선 

창립 당시 한국은 수출 중심의 개발독재가 한창이던 때이고, 녹색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생산력 중심의 생각이 판을 치던 때였다. 이런 때에 유기농을 한다는 것은 국가 정책을 반대하는 '빨갱이'로 몰릴 수도 있는 무모하고 힘든 시기였다.

이에 더해 그 당시 정치적 권리찾기 운동에 한창이던 타 농민단체와 달리 유기농업 생명운동에 매진하던 정농회는 단체의 성격에 대한 논란에도 휩싸여야 했다. 지금이야 유기농업에 대한 인식이 사회에 널리 퍼졌다고 하지만 그 당시 정농회의 주장은 차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다음은 정농회 고문 원경선씨의 회상이다.

"당시 농촌사회에는 카톨릭농민회나 기독농민회 등 농민의 권리찾기 운동단체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우리(정농회)도 유기농만 할 것이 아니라 사회참여적인 활동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 것이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권리찾기나 데모는 그 쪽에 맡겨두고 우리는 생명운동만 열심히 하면 된다. 데모를 하려면 그쪽 단체에 가입하라'고 큰 소리로 나무라며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는 농민회 쪽에서 '정말 잘 한 일'이라며 도리어 감사의 말을 건네고 있다."

물론 정치적 권리찾기 운동의 가치를 폄훼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정농회는 제도적 문제해결을 위한 투쟁만으로는 농촌과 농업의 가치를 찾을 수 없다는 인식 하에 생명 존중을 바탕에 둔 유기농업의 실천을 농촌과 농업이 안고 있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주장하며 몸소 실현해온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의 주장일까. 진경환 사무국장은 2003년 처음 제정된 ‘친환경농업육성법’에 대해서도 정농회는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법률이 제정된 것 자체로는 매우 긍정적인 일이지만, 법률은 유기농업을 시장경제에서 고부가가치 상품을 만드는 산업으로 보는 시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다품종생산에 큰 제약이 따르며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농민의 자립성이 떨어질 우려가 크다고 한다.

안타깝지만, 환경·생명 보존의 철학을 기저에 둔 유럽의 친환경법률과는 유기농업에 접근하는 기본 시각 자체가 다른 것이다. 따라서 물론 제도의 개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근원적으로 개개인의 바른 정신, 가치관을 세우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 정농회의 입장이라고 한다.

정농(正農)의 실현을 위한 활동들

어느덧 30여 년 이상을 정농(正農)의 실천을 위해 묵묵히 땀흘려온 정농회. 그렇다면 정농회의 구체적인 활동들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

정농회는 지금까지 매년 정기적으로 정기연수회, 생명농업교실, 각 지회교육을 열어 회원 상호간의 유대를 다지고 정농정신을 고양시킬 교육을 해오고 있다. 개개인의 바른 정신과 가치관을 강조하는 정농회인만큼 교육활동에 큰 중요도를 두고 있다고 한다.

또한 해남, 홍성, 화천, 장성 등 전국에 10개의 지회가 조직되어 있으며 1000여 명 이상의 회원들이 각 지역에서 유기농업 실천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연1회 회보와 생명역동농법 농사력을 발행하고 있으며 연 6회의 소식지도 발행하고 있다.

1990년에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회와 협력하여 경실련정농생활협동조합을 결성하여 정농회원이 생산한 농산물의 안전한 유통을 위해 경실련이 책임지고 소비자규합 및 유통업무를 맡기로 하고 생협을 출범시켰다. 경실련정농생협은 현재 송파본점을 비롯하여 6개의 점포를 개장하였으며 각 지회에서 농산물을 받아옴으로써 도농교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경실련정농생협은 수도권역 일부지역을 위한 생협이고 10개의 지회에는 각 지회별로 지회와 지역이 결합한 독자적인 생협이 운영중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부안 지회는 한울생협과, 장성 지회는 한마음공동체와 지역에서 연대를 이루고 있다. 즉 각 지회를 중심으로 지역공동체적 모습을 만들어 지역별로 생명을 살리고 바른 먹을거리와 유기농업 정신을 나눔으로써 정농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의 농민단체 애농회와 교류회를 갖기로 하고 매년 양국을 오가며 한·일 평화 교류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정농회와 애농회가 만들어가는 한·일 평화 교류는 고다니 선생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는데, 평화운동을 바라는 고다니 선생의 엎드리며 고백한 진심어린 사죄가 한·일 농민들의 가슴을 울렸었다고 한다. 그 울림을 바탕으로 정농회의 한·일 평화 교류는 계속되고 있다. 다음은 1975년, 고다니 선생의 말이다.

"나는 일본인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에 대하여 내 깊은 성의로써 제언을 드립니다. 귀 정부가 내 마을 듣고 현재의 관행농법에서 유기농법으로 바꾸신다면, 지난 날 일본이 귀국에 대하여 범한 커다란 죄악을 몇 반분의 일이라도 용서를 받는 결과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직접 가해자는 아니었지만 우리나라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가해한 범죄에 대해서 그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한국의 농민 여러분이 내 말을 듣고 농사법을 유기농법으로 바꿔주신다면 내가 걸머진 범죄의 대가에 대해 그 몇만분의 일이라도 용서받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정농회가 추진한 도농교류 활동 '봄들농장 모내기체험'의 현장
 정농회가 추진한 도농교류 활동 '봄들농장 모내기체험'의 현장
ⓒ 정농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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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다

오염된 땅에서 나는 농산물이 우리 몸에 면역력을 길러주거나 영양이 되어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기는커녕 각종 가공을 거치며 오히려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병까지 불러와 우리의 건강을 해쳐가는 오늘날. 병들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가는 자연. 해가 더해갈수록 그러한 위험성이 점차 피부로 와닿는 시대이다.

그러한 만큼 이들이 소리없이 흘리고 있는 묵직하고 뜨거운 땀방울 소리에 귀 기울임이 더욱더 소중한 일이지 않을까? 이 땅에 처음으로 유기농업의 씨앗을 뿌린 정농회, 정농회 사람들. 한국 농업이 생명농업으로 하루 속히 바뀌어 모든 국민이 모든 농산물을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생명력이 넘치는 농산물만이 생산되는 그 날이 오기를 바란다는 그들. 잘못된 시대의 흐름을 바로 잡고 정농인으로서 바른 농사, 바른 삶, 바른 먹을거리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는 그들.

그들이 소걸음으로 꿋꿋이 걸어나가는 그 길에 발벗고 함께 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이 올리는 진솔한 기도에 우리의 작은 기도를 하나 얹어드리는 건 어떨까. 우리의 건강, 우리의 삶이 달린 문제이다.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희망제작소 행복발전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전국귀농운동본부'에 이어 두 번째로 '정농회' 소개기사를 올립니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농민, 농업단체에 대한 소개기사를 작성할 계획입니다.



#정농회#애농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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