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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전날 고3 아들에게 문자를 넣었다.

'긴 인생에서 보자면 수능같은 건 작은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공부해왔으니 그걸로 됐다. 마음을 비우고 그냥 덤덤하게 보거라. 불편한 기숙사에서 어렵게 공부해 온 것만 해도 우리 아들 충분히 훌륭하다.'

그건 진심이었다. 수능을 코 앞에 둔 아들녀석에게 애비의 몇 줄 문자가 적절한 격려가 되었을 것인지, 아니면 속도 모르고 염장을 지르는 한 마디가 되었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수능시험을 앞둔 녀석에게 보내는 애비의 진심어린 응원 메시지였다.

녀석은 이따금 기숙사에서 외박을 나왔다. 집에 오면 늘 말이 없었다. 어두운 녀석의 얼굴에서 늘 '수험몰빵'의 기숙사 분위기가 풍겼다.

꽃 같은 나이 열아홉인데. 불쌍했다. 녀석에게 공부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할 수도 없었다. 잘못된 교육시스템의 제물이 되어있는 녀석에게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이야기는 부모로서 차마 못할 짓이었다.

대신 성실한 삶의 자세를 강조했다. 최선을 다해라. 뜨겁게 살아라. 그걸로 네 책임은 끝이다. 나머지는 모두 위에 계신 분의 뜻이고. 고교시절 내내 내가 녀석에게 해준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1등 지상주의.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을 강조하는 세상. 애비의 세상물정 모르는 조언은 녀석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삶의 정곡을 예리하게 찌르는 촌철살인의 조언들

김어준 건투를 빈다
 김어준 건투를 빈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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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험은 끝났다. 시험을 마친 녀석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 줄 것인가. 최근 발간된 김어준 책 <건투를 빈다>가 생각났다. 처음 한겨레 연재될 때부터 깊은 공감을 느끼며 늘 다음글을 기다리던 코너였다. 인터넷판 한겨레 대문에 링크가 걸리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검색창에 '김어준'을 치고 찾아 읽던 글들. 삶의 정곡을 예리하게 찌르는 촌철살인의 조언들. 읽고 있노라면 스멀스멀 머리카락이 서던 감명깊은 구절들이었다.

부정기적으로 찔끔찔끔 글을 올리는 필자의 게으름을 원망하면서, 또 그걸 방관하는 편집자를 댓글로 씹으면서 새로운 글을 기다려 읽었다. 기다리는 것이 허기를 부르면 그동안 올라온 내용을 문서로 캡쳐해 놓고 몇번이고 읽었다.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생문제의 핵심을 들춰내는 혜안이 돋보이는 글들. 10년 전에 이런 글을 만났다면 내 인생이 좀 더 풍부해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수없이 품으면서 읽었다. 좋은 내용을 혼자만 아는 것이 아까워 아는 사람들에게 프린트를 나눠주기도 했다. 물론 녀석에게도 한 부를 줬다. 시험에 바쁜 녀석이 제대로 읽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게 책으로 나왔다. 그동안 연재된 내용을 모으고 거기에 새로운 원고를 보강해 책으로 펴낸 것이다. 고교시절 내내 과외의 '과'자도 모르고 지냈으니 늦었지만 인생과외라도 시켜줘야겠다는 생각에서 수능선물로 그 책을 떠올렸다.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순탄치만은 않을 녀석의 앞 길에 틀림없이 훌륭한 과외선생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교과서와 시험만 아는 녀석이 마음의 위안을 얻을 것이라.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그 기본 태도에 관한 입장이어야 한다. 우린 그런 거 안 배운다. 대신 성공은 곧 돈이라는 거. 돈 없으면 무시당한다는 거. 그 경쟁에서의 낙오는 인생 실패를 의미한다는 거. 그렇게 경제논리로 일관된 협박과 회유로 훈육된다. 그리하여 우리모두 초식동물처럼 산다. 초식동물의 군집은 가장 뒤처지는 놈이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 나머지의 안전이 잠정 담보되는 시스템이다. 거기에 공적 신뢰따위는 없다. 결국 끝줄에 서지 않으려 끊임없이 서로를 경계하며 두리번거리는 왜소하고 불안한 낱개들만 남을 뿐.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시도할 겨를도 없고 엄두도 안날 밖에. - P14. '벌써 나이가 서른인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건지는 스스로 깨치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가장 먼저 필요한게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인간인지부터 아는 거다. 언제 기쁘고 언제 슬픈지. 무엇에 감동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 뭘 견딜 수 있고 뭘 견딜 수 없는지. 세상의 규범에 어디까지 장단맞춰 줄 의사가 있고 어디서부턴 코방귀도 안 뀔건지. 그렇게 자신의 등고선과 임계점을 파악해야 한다. – 중략 – 그 다음부턴 쉽다. 꿈이니 야망이니 거창한 단어에 주눅들거나 현혹되거나 지배당하지 말고. 그저 자신이 죽기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 가보고 싶은 곳들, 만나보고 싶은자들 리스트를 만들라. 그리고 그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라. 사람이 왜 사느냐. 그 리스트를 지워가며 삶의 코너 코너에서 닥쳐오는 놀라움과 즐거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만끽하려 산다." <건투를 빈다>  P15.

허위를 까뒤집고 삶의 정곡을 찌르는 명쾌한 '한방'

이 책은 기본적으로 상담집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책임못질 남의 인생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거 무례이자 반칙이라고 믿는 작자가 상담집을 냈다는 것이 놀랍고 쑥스럽다'고 너스레를 떨지만 누구에게든 추천할 만한 훌륭한 상담집이다.

한겨레에 연재되는 내내 그의 글은 리플 홍수에 시달렸다. 연재 초에 올린 '남친이 자꾸 보챈다고요? 너~무정상!'이라는 글에는 리플이 124개나 붙었다. 이렇게 관심을 받는 건 읽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내는 좋은 내용을 담고있기 때문이다.

한겨레에 그동안 연재해오던 상담 사이사이에 삶에 대한 통찰이 깊은 글들을 덧붙였다. 나, 가족, 친구, 직장, 연인으로 장을 분류해 95꼭지의 글을 실었다. 마지막 장인 '연인' 부문에 35건이나 되는 상담이 집중된 건 이 혼돈의 시대에 사랑을 앓는 커플들이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리 말하면 사랑에 대한 모독으로 들리나. 아니다. 애인이 남인 걸 인정 않고 어른의 사랑, 못한다. 남, 자기 뜻대로 못 하는 거다. 사랑, 단점과 차이를 없애는 거, 아니다. 그에 개의치 않는 거지. 게다가 사랑이란 게 영원도 완벽도, 않다. 불완전한 인간끼리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그게 된다는 상상까진 좋다. 그러나 그 판타지를 상대더러 실제 구현해 내라는 강요, 그거 폭력이다.'  <건투를 빈다>  '남친을 확 뜯어 고치고 싶어요' P255

저자는 주춤거리지 않는다. 내담자를 도덕과 관념의 허구로부터 성큼성큼 무장해제시키며  통쾌하고 신랄하게 까발려 놓는다. 적절하게 지적한 내용들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난해하고 현학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글이 까칠하고 불친절하다는 평도 있다. 몇 번씩 읽어봐야 감이오는 구절도 더러 있고. 그러나 읽고나면 속 시원하고 가슴이 다 후련하다. 다양한 인생문제에 대한 김어준의 답변에는 허위를 까뒤집고 삶의 정곡을 찌르는 명쾌한 '한방'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책이다.

저자가 전편을 통해 줄기차게 주장하는 건 행복할 수 있는 힘은 자기 안에 내재돼 있다는 거다. 멀리 가지 말고 자신 안에서 답을 찾아라. 열쇠는 네가 쥐고 있다. 행복하자면 먼저 자신에 대한 공부부터 필요하다는 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런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게 뭔지, 그 대가를 어디까지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사회규범에 어디까지 장단 맞춰주고 어디서부터 콧방귀도 뀌지 않을 건지 먼저 파악하라는 거다.

수능에 맞춰 발간된 것이 아들을 위한 배려라도 되는양, 고맙고 반갑다. 젊은날을 치열하게 살아온 저자가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삶의 이면들을 명쾌하게 풀어 내는 인생 잠언집. 녀석이 머리맡에 두고 가까이 해야 할 훌륭한 삶의 멘토로서 부족함이 없다.

아들아, 삶은 수없이 계속되는 시작의 연속이란다. 다시 떠나거라.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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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투를 빈다 (10주년 기념 리커버 에디션)

김어준 지음, 푸른숲(2018)


태그:#김어준,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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