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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스크림(Nice Cream)!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단 돈 1페소(약 50원). 자꾸 손이 간다.
▲ 나이스크림(Nice Cream)!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단 돈 1페소(약 50원). 자꾸 손이 간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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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여권과 항공권 티켓 좀 줘 봐."
"아니, 아까 그거 다 조사했었잖아요?"
"알아. 다시 줘. 조사해야 하니(주라면 줄 것이지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의욕 없어 보이는 눈빛, 귀찮은 벌레 취급하는 듯한 거만함. 이민국 직원은 제 본위대로 설렁설렁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홈그라운드도 아니고 여행자 권리를 비벼볼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도 아닌 이상 대꾸는 상상도 못할 판.

저녁 8시. 물론 일과 시간이 끝났다는 건 인정. 그래서 부탁하는 입장에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경찰이 특별히 부탁하는데 조금만 신경 써 줘도 되는 일 아닌가. 난 지금 동행자를 잃어버렸다니깐!

여권과 항공권을 받아 든 남자의 태도에 주먹이 운다. 사무실도 아니고 건물 밖 난간에 기대 한 쪽 다리를 꼰 채 심문하는 모양이 자기가 무슨 특수수사대 CSI인 줄 착각한다. 난 꼿꼿이 선 채로 물음에 답한다.

"이름?", "나이?", "안경 벗어 봐.", "쿠바에 들어온 날짜?", "목적은?", "언제 떠날 건가?", "돈은 얼마나 가지고 있지?", "쿠바에 아는 사람 있나?", "짐 다 풀어 보도록."

"(아니, 내가 여기 불법 체류라도 할까 싶어 그러나 이 사람아?) 거기 여권과 항공권에 다 나와 있잖아요. 그리고 사람 찾을 생각은 안 하고 왜 계속 나만 검사하는 거요?"

참다가 한 마디 했더니 그건 내 알 바 아니란 듯 여권과 항공권을 집어 들고 건물 내부로 유유히 들어간 직원은 조사를 이유로 한참동안 나오지 않았다. 기분이 상한 건 그의 일처리 내용보다 신분우월에 의한 고압적인 자세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조롱하는 듯한 말투 때문이다. 이민국 직원이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건지.

어르신네들의 놀이  골목에서 도미노 게임을 하고 있다.
▲ 어르신네들의 놀이 골목에서 도미노 게임을 하고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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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분 만에 나온 직원은 기다리란 말만 하고 여권과 항공권을 건네 준 뒤 다시 들어가 버렸다. 도와주던 경찰도 떠나고 나 혼자 이민국 건물 밖에서 밤바람을 맞대며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또 조사 때문에 내 여권과 항공권을 달라고 하니 도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지 답답했던 것이다.

다시 시간을 죽이고 나서 나온 직원은 그토록 소식을 기다리던 내게 감정 없는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성과가 없어. 가 봐."

정말로 조사는 제대로 해 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경과도 가르쳐 주지 않고, 경찰이 부탁했는데도 한 시간 넘게 기다린 나에게 무성의하게 대하는 태도란.

9시가 넘었다. J를 찾는 것도 그렇지만 일단 숙소가 필요했다. 이민국은 도시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영 마뜩찮은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잠자리는 알아봐야 해서 직원에게 숙소에 대해 문의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놀부 심보가 따로 없었다.

"주변을 돌아 봐. 아님 센트로로 가든지."
'누가 그걸 몰라? 조금만 더 세심해지면 어디 덧나나?'

직원은 이쯤에서 끝내자는 듯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고, 망연자실한 난 터벅터벅 이민국을 나왔다. 그 때 이민국 맞은 편 건물에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혹시나 싶어 숙소를 물어볼 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들은 맞은편에서 나를 보며 진작부터 상황을 알아채고 있었다. 살짝 토라져 서러웠던 난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모두 얘기했더니 별안간 그 중 한 남자가 급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술에 약간 취한 그는 내 얘기를 듣고는 얼굴이 더욱 붉게 상기되었다.

나의 영웅 페드로  가난한 노동자이지만 그의 기백은 정말이지 멋졌다고 밖에는.
▲ 나의 영웅 페드로 가난한 노동자이지만 그의 기백은 정말이지 멋졌다고 밖에는.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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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보자고!"

남자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이민국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대문을 쾅쾅 두드리고는 직원을 불러냈다. 직원이 나오자마자 그는 속사포처럼 말을 쏴 대며 그를 나무랐다. 어찌나 흥분했던지 상황이 격해질까 했지만 직원이 당하는 모습이 내심 고소했기에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당신 뭐요?"
"내가 누군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이 친구는 지금 우리나라를 여행하러 왔는데 왜 일처리를 그 모양으로 하냔 말이야! 손님이 왔으면 친절하게 대해 줘야지 이민국이면 다야? 아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는데 당신 너무 하는 거 아냐? 한 시간 넘게 기다렸다고 했잖아!"

그렇지 위풍당당! 남자의 주장은 방파제를 삼켜버리는 파도처럼 거침이 없었다. 직원은 기세가 한풀 꺾인 모습이었다.

'이 사람 뭐지? 대단한데?'

난 목에 핏대를 세우고, 거칠게 밀어붙이는 이 남자의 야성에 흠뻑 매료되고 말았다. 내 편이니깐. 그 거만하던 이민국 직원에게 이렇게 강력한 언사를 대동할만한 직위는 뭘까? 이 동네가 정부 고위 관료나 이런저런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데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이민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맨 파워! 그의 아우라는 흡사 혈기 넘치는 젊은 시절의 판관 포청천을 보는 듯했다.

담배 한 모금  생의 끝자락에 유일한 낙일까.
▲ 담배 한 모금 생의 끝자락에 유일한 낙일까.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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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기세를 올리는 남자의 뒤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나는 지원공격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슬며시 그의 어깨를 잡고는 귓속말 가깝게 나직이 말했다.

"이름이 뭐예요?"
"나? 페드로."
"그래요, 페드로. 있잖아요, 나 지금 숙소도 못 구했잖아요. 그런데 마냥 기다리느라 아직까지 저녁도 못 먹고 이렇게 굶고 있다고."
"뭐? 저녁도 굶었어? 아니, 이 사람아! 이 친구 지금 저녁도 못 먹었다잖아!"

인간의 말초적인 욕구인 식욕의 환경부재를 털어놓았더니 과연 '효과 만빵'이었다. 식사 못한 것이 꼭 직원의 탓은 아니었지만 아까 당한 수모에 비하면 조족지혈. 페드로는 더욱 기세등등해져 이민국 직원을 코너로 몰아붙였다. 직원은 심히 착살스러운 페드로의 주장에 당황해 하면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페드로는 든든한 아군의 우두머리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직원은 끝내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꼴불견 같으니. 한참을 훈계와 비판으로 사자후를 토해낸 페드로가 기어이 이민국이라는 거대한 바위에 계란을 던져 버렸다.

"그나저나 이 친구 숙소는 어떻게 할 거요?"
"알아서 찾아야지 뭐 별 수 있나요?"
"오, 그래? 그럼 이 친구 오늘 밤 우리 집서 재우리다."
"후훗, 그거 불법인 거 아시죠? 신고하면 당신 곤란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법이든 아니든, 신고하든 말든. 알아서 해. 배 째! 어이, 자네. 우리 집으로 가지. 배고픈가?"
"여기 퀭한 눈 좀 보시죠.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그래? 그럼 오늘 밤은 우리 집에 가서 먹고, 씻고, 자고 하자고! 망할 이민국. 자, 가지!"

뜻밖의 제의였다. 강경한 그의 태도가 나로서는 든든하긴 했지만 내 어려움을 일거에 자신이 해결하려는 저 꼿꼿한 기상을 보라. 그렇게 나는 자전거를 끌고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위기의 순간 일면여구로 나를 감싸준 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쿠바 판 치킨 버스  뒷자리가 사람들로 꽉 찼다.
▲ 쿠바 판 치킨 버스 뒷자리가 사람들로 꽉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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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페드로, 당신 뭐하는 사람이에요?"
"나? 난 그냥 막노동꾼인 걸?"
"네? 아니 그럼 왜 이민국 쪽에 오셨나요?"
"친구랑 술 한 잔 걸치러 왔지. 왜?"
"아뇨, 그게 아니라 당신 너무 당당해서 난 또 무슨 고위직인 줄 알고."
"푸하하. 잘못한 게 있으면 직업이 무슨 상관이야! 할 말은 해야지. 배고프지? 아내에게 부탁해서 특별히 너를 위한 스페셜 요리를 부탁할게. 네 친구는 내일 아침 찾아보자고. 걱정 마, 무사할거야."

무엇이 그리 기분 좋은지 페드로는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어 젖혔다. 제 아무리 사회주의 국가라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곳. 그리고 누구나 좀 더 사람답게 대우받고 살기 원한다는 사실. 페드로는 수세에 몰린 내 상황을 반전시키며 이민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었다. 가난한 노동자가 이민국을 상대로 호통 치는 모습. 그 날 밤 페드로의 거침없는 행동은 사회주의의 편협한 시각에 물든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남게 되었다.

그란다 호텔  세스뻬데스 광장에 위치해 있는 화려한 건물로 낮에는 뜨겁고 눈부신 느낌이, 밤에는 차갑고 맑은 느낌이 난다.
▲ 그란다 호텔 세스뻬데스 광장에 위치해 있는 화려한 건물로 낮에는 뜨겁고 눈부신 느낌이, 밤에는 차갑고 맑은 느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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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쿠바, #자전거 여행, #자전거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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