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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등 100여개 시민·노동·인권 단체 등으로 구성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가 11월 17일 오전 10시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5차행동'을 선포했다.(자료사진)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등 100여개 시민·노동·인권 단체 등으로 구성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가 11월 17일 오전 10시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5차행동'을 선포했다.(자료사진)
ⓒ 이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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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5일)은 우리 사무실의 홍일점 지현(가명)씨가 회사를 나가는 날입니다. 아무리 경기가 나빠 주위 회사들이 비틀거려도, 그래도 명색이 대기업인데 하며 먼 나라 이야기인 듯 지켜보고 있가다 제대로 뒤통수 맞았습니다.

회사에서 처음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왔을 때만 해도 시답지 않게 생각했었습니다. 어차피 회사에서 유동성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나온 이야기라면 저처럼 말단 현장에서 일하는 싼 인력보다는, 회사 고위층에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거창한 구호만 내세우며 많은 임금을 받아가는 비싼 간부들이 잘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건 명백한 저의 오판이었습니다. 회사가 작심하고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니 윗사람이고 아랫사람이고 모두 잘리기 시작했습니다. 명확한 기준도 없습니다. 윗사람은 학연이나 지연, 혹은 그 윗사람들에게 얼마나 잘 보였냐가 기준이 되었으며, 아랫사람 중에서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약한 고리에 서 있는 비정규직이 우선 타깃이 되었습니다.

구조조정의 시작은 '용역 사원'부터...

언론에서는 빅 5에 드는 회사들이 구조조정을 안 한다고 했다고 대서특필하지만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일 뿐입니다. IMF 이후 한국 자본은 끊임없이 노동의 유연성을 주장하며 많은 조직원들을 비정규직으로 채워왔고, 사업의 많은 부분을 외부 용역에게 주었기 때문에 구조조정의 대상이 그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현대자동차에서 일하지만 현대자동차의 직원이 될 수 없는 용역회사의 직원이 현재 구조조정의 첫 번째 대상인 것입니다.

아마도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면 우리 기업들은 또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자신의 조직원들을 향해 구조조정을 시도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고통을 나누기는커녕 경쟁에 뒤떨어지는 이들이 숨쉬기도 힘든 승자독식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비관적인 전망이요, 불신일까요? 벌써부터 초등학교 학생들이 국제중학교에 가기 위한 과외공부로 인해 학교에서 꾸벅꾸벅 조는 이 한심한 사회에서 서구 국가들이 택한 일자리 나누기를 기대하리라는 것은 그야말로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경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때쯤 되면 우리의 메이저 언론들은 경제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 희생당한 너희들이 참고 조금만 버티라고 변죽을 울려댈 것입니다. 항상 그랬듯이 고통은 나의 몫이 아니라 무식한 '너희들'의 몫이니까요. 아니면 또 이 모든 위기가 빨갱이들 탓이니까 그들을 탓하라고 부추길지도 모르겠군요.

비정규직을 고집하는 한국 기업들

처음 지현씨의 계약만료 소식을 듣고 저는 저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그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완벽히 수행해냈고, 그만큼 인정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월 마감 때면 새벽까지 남아 과도한 업무량을 정규직 연봉의 60%만 받고도 열심히 일하던 그녀.

회사는 그런 지현씨를 올 여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2년제 전문대 졸 동기들과 달리 4년제 대학교를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사규 상 계약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전문대졸 출신보다 4년제 대학 출신이 더 많은 돈을 받는다던가?

따라서 회사는 그녀만을 동기 중에 그대로 비정규직으로 남겼고 대신 다음 기회에 꼭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준다고 약속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회사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어차피 노동법이 비정규직을 2년으로 제한해 놓은 바, 그녀와 같은 인재를 끌어안기 위해서라도 회사는 다음 기회에 그녀를 정규직으로 전환시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현씨도 그 약속을 철썩 같이 믿었음은 당연하구요.

그러나 회사는 그녀, 아니 우리의 믿음을 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경기가 나빠지고 구조조정이 시작되자 회사는 가장 먼저 비정규직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평소에 얼마나 회사에 도움이 되고 많은 일을 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비정규직일 뿐이었습니다.

그녀가 없으면 우리 부서의 업무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강변해도 회사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대신 다른 인력을 투입시켜준다는 것이 회사의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지현씨가 가지고 있던 암묵지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비면 다른 사람으로 채우면 된다는 조직의 논리만이 있을 뿐, 어쨌든 회사는 비정규직을 잘라야 한다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탄원서를 내봐도, 동료들이 같이 회사를 그만 두겠다고 해도 꿈쩍도 않는 우리의 잔인한 현실.

우리 기업들이 인재를 위한다구요? 이런 풍경이 벌어지는 곳이 대한민국 내 어디 우리 회사뿐이겠습니까? 자본이 왜 정규직을 비정규직화 시키려 하고 비정규직의 상한을 왜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려 할까요? 과연 그들이 비정규직을 사람으로 보기는 할까요? 단지 조직의 부속품이라고 여기는 건 아닐까요?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이 포스트 포디즘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다양하고 창조적인 사유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기술의 숙련도가 전제되어야 하고 경제적 안정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를 위한 논의가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회사든 국가든 간에 아무런 준비 없이 사원에게 국민에게 무조건 나가서 경쟁하라고 밀어내고만 있습니다.

"우선 싸우고 본다, 안되면 되게 하고, 그러다 보면 좋은 날이 있을 것이다"는 그들의 논리. 현실의 척박함 때문에 그 도그마에서 차마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을 저당 잡혀 있는 우리들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

그녀의 구조조정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

비정규직 노동자와 학생들이 10월 15일 오후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앞에서 기륭전자 노조 농성장 강제철거 규탄 결의대회를 열고 비정규직 차별 대우 철폐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자료사진)
 비정규직 노동자와 학생들이 10월 15일 오후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앞에서 기륭전자 노조 농성장 강제철거 규탄 결의대회를 열고 비정규직 차별 대우 철폐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자료사진)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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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씨의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정작 지현씨 당사자의 반응이었습니다. 처음 그 소식을 듣고 매우 분노했던 저와 달리, 그녀는 매우 침착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태연한 겉모습과 달리 그 속이야 오죽했겠냐 만은 어쨌든 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자기가 회사를 그만두면 누구에게 인수인계를 해야 하는 것이며 회사가 어렵긴 어려운가보다 등.

순간 제가 느낀 감정은 '당황'이었습니다. '지현씨가 자신의 계약해지 소식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회사가 어렵다고 한들, 그렇다고 자신의 밥벌이가 걸려있는 고용의 문제에 대해 너무 회사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맴돌았습니다.

어쩌면 자본이 끊임없이 비정규직을 운운하고 노동의 유연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와 같은 지현씨의 태도를 만들기 위함일지도 모릅니다.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그냥 소소한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버리고, 가족이란 틀 안에서 자신의 생활보장을 받는 한편 자신과 비슷한 이들과의 연대는 꿈도 꿀 수 없는 연약한 노동력이야말로 자본이 꿈꾸는 최고의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고용하고, 언제든 해고할 수 있는 양질의 순치된 노동력.

순간 뜨끔 하는 마음에 저의 모습을 되돌아봅니다. 정규직이라는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 서 있는 저는 과연 그들이 원하는, 순치된 노동력이 아니라고 볼 수 있을까요? 만약 제가 지현씨와 똑같은 일을 당한다면 저는 회사의 전 방위 압박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아마도 많은 정규직들은 지현씨의 경우를 보며 자신의 차례도 머지않았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 판단은 각 개인에게 패배주의를 안겨줄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다고 하니 회사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며, 조직에 있어서 각 개인이 얼마나 하찮은 부분인가를 다시금 각인할 것이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더 납작 엎드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것입니다.

결국 이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각 개인들 간의 경쟁에 길들여진 탓에 서로 연대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겪는 일입니다. 순망치한. 우리는 이와 같은 위기에서 내가 희생자가 아니라서 다행일 줄만 알지 그 다음 순서가 바로 내가 될 수 있음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감싸지 못하는 것은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조적인 책임을 각 개인들에게 전가하는 사회와 그 속에서 원래 그렇다며, 상호간의 연대 대신 로또나 당첨되길 바라며 '부자 되세요'를 끊임없이 읊조리는 각 개인들.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는 걸까요?

어쨌든 지현씨가 나갑니다. 뜨거웠던 여름, 매주말 촛불집회에 나가던 나를 외계인 쳐다보듯 바라보던 그녀가 이제 무슨 생각을 할까요? 만약 이후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촛불집회라도 있을 때 과연 그녀는 거리로 나갈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녀가 거리로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 세상은 변하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좀 더 앞당겨지길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대학시절 내가 가슴에 품고 살았던, 그람시가 했던 말을 꼭 해주고 싶습니다.

"이성적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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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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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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