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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7년째 해마다 수없이 이런 '불법' 편지를 학부모에게 보내왔습니다.
▲ '불법 가정 통신문' 학부모에게 드리는 편지 나는 27년째 해마다 수없이 이런 '불법' 편지를 학부모에게 보내왔습니다.
ⓒ 이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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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늘 교장선생님의 결재를 받지 않고 학부모님께 편지를 보냅니다. 한 해에 수없이 많이 보냅니다. 벌써 삼십 년이 다 되어 가니 요즘 서울시 교육청 기준으로 보자면 저는 일찌감치 파면당했어야 마땅합니다. 

오늘 보내는 편지는 1학년이 생전 처음으로 국어와 수학과 지필평가로 하는 학업성취도 평가를 본 뒤에 부모님께 드리는 글입니다.

[1-1 편지 081215] 부모님께

변덕이 심한 겨울날씨에 가족 모두 건강하신지요?

이번에는 지난 12월 9일과 10일에 우리 반 아이들이 봤던 학업성취도 평가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시험이라 아이들이 시험을 어떻게 잘 볼지, 시험점수는 잘 나올지 부모님께서 걱정 많으셨지요? 저도 시험날이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걱정이 참 많았습니다.

벌써 시험문제 푸는 공부를 할 때부터 점수를 표시하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은 시험내용보다는 답이 맞았나 틀렸나에 관심을 보이고, 그에 따라 누가 잘 맞히고 틀리는지를 꼽으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답을 맞추고 틀리는 모습을 보고 '누구는 공부를 잘한다' 또는 '누구는 못하는 바보다'로 자꾸 나누려고 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고요.

평가를 앞두고 저는 아이들에게 '이런 시험에서 답을 잘 맞히는 사람만 똑똑한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이런 시험을 잘 봐야 똑똑하다고 한다. 사람들 생각이 틀렸다'고 말해주면서 우리 이번에 시험보는 것이 어떤 건지 열심히 봐 보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되도록 이번 첫 평가에서 아이들에게 평가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평가가 끝나고 나니 저와 부모님의 걱정과는 달리 아이들은 답을 맞힌 것과 틀린 것에 대해서 그리 크게 걱정을 하지 않고 잘 뛰어 놀아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모습이 진짜 아이들 모습이기도 합니다만.

초등 1학년에게 지필평가는 마땅하지 않네요

이번에 1학년 아이들하고 학업성취도 평가를 하면서 더욱 새롭게 깨달은 점은 이렇게 지필평가로 하는 평가가 한 학년을 마무리하는 교과의 평가로 그것도 1학년의 평가로 마땅하지 않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필평가가 교과의 모든 내용과 한 아이의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없는데도, 지필평가를 보고 나면 지필평가에서 나온 점수가 그 아이와 교과의 전부를 평가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로 평가를 했는지는 보려하지 않고 오직 나온 점수, 숫자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필평가를 하기 전에는 모든 아이들이 나름대로 다 똑똑한데 지필평가에서 점수를 잘 받은 아이를 똑똑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님께서도 이번에 지필고사로 본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로 한 교과의 전체 내용이나 아이의 전체 실력이라고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활달하기로 소문난 우리 반 아이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험을 보고 있습니다. 아주아주 심각합니다. 아직까지는 시험도 놀이로 생각하는 아이들이지만,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얼마나 이런 평가에 시달리게 될까요?
▲ 1학년 아이들이 시험보는 모습 활달하기로 소문난 우리 반 아이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험을 보고 있습니다. 아주아주 심각합니다. 아직까지는 시험도 놀이로 생각하는 아이들이지만,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얼마나 이런 평가에 시달리게 될까요?
ⓒ 이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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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지필평가에서는 글을 잘 읽지 못하거나 글을 잘 읽어도 문제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면 답을 잘못 쓰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지필평가에서 점수를 많이 받으려면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많이 풀어봐서 문제를 푸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1학년의 경우 훈련을 한다고 해서 모두 다 훈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1학년 아이들은 아직 문제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힘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답을 몰라서 틀린다기보다 문제의 뜻을 해석하지 못해서 틀리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직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힘이 적은 아이에게 무조건 문제 푸는 훈련만 하게 되면 시험에서 점수는 잘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공부하는 재미를 빼앗아가게 되니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시험문제 풀이 위주로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그만큼 창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들은 당연하듯이 문제풀이를 아이들에게 시키곤 하지만, 문제를 읽고 풀어가는 일이 1학년 아이들의 발달단계로 볼 때 힘이 부치고, 신체 활동력이 강한 1학년 아이들에게는 매우 지루하고 재미없는 활동입니다.

우리 반 아이들이 시험보는 모습을 지켜보니 한 10분 정도 지나니 한 아이가 하품을 하기 시작하고 점점 전체 아이들이 하품을 하면서 몸을 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지겨워요' '힘들어요' 합니다. '어려워요'라는 말은 잘 안하고 '읽어도 잘 모르겠어요', '하기 싫어요', '힘들어요' 같은 말을 자주 합니다. 잘 모르겠으면 문제를 자꾸 여러 번 소리내서 읽어보라고 했더니 다 읽어봤는데도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다 했다고 하는 아이한테도 내가 답한 것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처음 시험보는 것처럼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읽어봐라 해도 대충 보는 척하다가는 다 했다고 합니다. 한번 보는 것도 싫은데,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요. 또 본다해도 잘못 쓴 답을 아이들은 잘 찾아내지 못합니다. 결국 문제를 읽기 싫어하는 두 아이는 50분이 지나도 문제를 다 읽지 않아서 답을 쓰지 못했습니다.

아직 1학년 아이들은 문제를 스스로 읽어서 답 맞히는 것을 아주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읽어주면 답을 잘 맞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반에서는 국어 시험을 같은 평가지로 한번 더 시험을 봤습니다. 한번은 몰라도 선생님한테 아무 것도 물어보지 말고, 스스로 읽고 답을 써 보게 했고, 두 번째는 이틀 뒤에 같은 평가지로 제가 문제를 읽어주고 답을 맞혀보게 했습니다.

두 가지 경우를 비교해 보았더니 혼자서 문제를 해결할 때는 잘 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의 점수 차가 컸는데, 문제를 읽어주고 문제를 해결할 때는 잘 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의 점수 차가 그리 크게 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두 가지 평가지를 모두 보내드려 보겠으니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깨달은 점이 있는데, 우리 반 아이들이 시험을 보면서 큰소리로 자신이 알아낸 답을 얘기하고, 옆 친구가 틀린 것을 보면 틀렸다고 바르게 고쳐주려는 것을 봤습니다. 시험볼 때는 절대로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어른들은 알고 있습니다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평가할 때도 역시 친구가 어려울 때는 도와주고 모르는 것은 서로 가르쳐 줍니다.

시험 볼 때는 절대로 옆 사람 것 보지마라 강조하고, 문제만 소리내서 읽지 답은 절대 입밖에 내지 말라고 해도 아이들은 그만 자기도 모르게 답을 입밖에 내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1학년 아이들이라는 생각을 해 보면서 답은 절대 얘기하지 말라고 자꾸 잔소리하는 제가 머쓱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런 지필평가가 1학년 아이들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이 본 학업성취도 평가지를 채점한 모습입니다. 보라색 색연필로 맞는 것만 동그라미하고, 점수를 따로 매기지 않았습니다.
▲ 1학년 학업성취도 평가지 우리 반 아이들이 본 학업성취도 평가지를 채점한 모습입니다. 보라색 색연필로 맞는 것만 동그라미하고, 점수를 따로 매기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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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결과를 다른 아이와 견주지 말아 주셨으면...

이번 평가에서 채점은 일부러 보라색 색연필로 했습니다. 보통 채점을 빨간색 색연필로 하는데, 잘못하면 빨간색에 대한 공포감을 불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채점할 때 보라색이나 초록색, 파란색 같은 것으로 하곤 합니다. 채점을 할 때도 맞은 것만 동그라미로 표시하고, 틀린 것은 다른 표시는 하지 않고 색연필로 정답을 따로 써 주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채점한 평가지를 나누어 주고 잘못 쓴 답을 한번 다시생각해 보자고 했는데, 틀린 것이 창피했는지 고치지 말라고 해도 틀린 답을 지우고 맞는 답을 새로 써 넣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이번 평가에서는 결과를 100점 만점의 점수로 내지 않았습니다. 지필평가가 아이들에게 처음이고, 단지 지필평가 한번으로 한 교과 전체 성적을 가늠하는 것도 아니어서 100점 만점의 점수가 그다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모님께서도 굳이 점수로 환산해서 몇 점이다로 따져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답을 잘못 썼다고 아이들을 나무라지 마시고, 우리 아이가 이런 지필평가에서는 이렇게 답을 하는구나 정도로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또 하나 꼭 부탁드릴 것은, 이번에 본 지필평가 결과로 다른 아이와 견주어 누가 잘 했니 못했니로 아이들을 나누어 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절대로 아이들을 점수로 그렇게 나눌 수 없습니다. 이런 지필고사가 가장 위험한 것이 점수가 숫자로 표시돼서 아이들을 점수로 서열을 매기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더욱더 제가 평가 결과를 점수로 표시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보내드리는 평가지는 아이들과 함께 미리 시험 보는 공부를 한 평가지(A4크기 - 작은 것)와 이번에 본 학업성취도 평가지(B4크기 -큰 것) 두 가지입니다. 살펴보시고, 학업성취도 평가지(B4크기 -큰 것)는 학교에 보관해야 해서 보시는 대로 이번 주 중으로 학교로 다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학업성취도 평가와 관련해서 말씀드렸는데요, '우리 아이가 우리 반에서 몇 등 했어요?'말고 궁금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질문해 주시면 자세하게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가족 모두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08. 12. 15.           1학년 담임   이 부 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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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올해 교육청에서 하는 우리 학교 평가에서는 이런 '불법 가정통신문'이 '학부모와 상담한 우수사례'에 들어가 높은 점수를 받아서 학교평가 우수학교로 상을 받았습니다. 서울시 교육청은 교사들이 학교 현장에서 늘 해 왔던 학부모에게 보내는 편지를 '불법 가정통신문'이라고 파면과 해임을 하는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같은 것을 가지고 어디에서는 벌을, 어디에서는 상을 줍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태그:#학업성취도평가, #일제고사, #지필평가, #불법가정통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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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만에 독립한 프리랜서 초등교사. 일놀이공부연구소 대표, 경기마을교육공동체 일놀이공부꿈의학교장, 서울특별시교육청 시민감사관(학사), 교육연구자, 농부, 작가, 강사. 단독저서, '서울형혁신학교 이야기' 외 열세 권, 공저 '혁신학교, 한국 교육의 미래를 열다.'외 이십여 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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