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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콘에서 아바나 만을 사이에 두고 저 멀리 보였던 동화같은 성 모로 요새(Castillo de los Tres Santos Reyes Magnos del Morro). 나는 말레콘에 갈 적마다 역사의 거친 숨결을 삼키며 잿빛 하늘 아래 도도한 자태로 카리브 해를 마주한 그 성을 꼭 한 번 가고야 말겠다는 신념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주머니를 뒤져 나오는 건 먼지뿐이요, 택시라도 한 번 탈라치면 공업수학을 앞에 둔 인문대생처럼 깊은 한숨이 나오고, 카오스 상태가 되는 걸 난들 어찌하리요?

 

"배 타고 가면 되잖아요!"

 

귀가 번쩍 트였다. 아바나 사정에 빠삭한 애리가 묘안을 내놓은 것이다. 그렇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잘 짜여진 각본대로 아바나 문화를 보여주고 설명해주는 친절하고 박식한 가이드나 최신정보로 무장한 '외로운 행성' 가이드북에만 의지한 채 자신의 판단을 최선의 결과라고 믿을지 모른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아바나의 서민들이 이용하는 정기선에서 그 어떤 여행자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싸고, 얼마나 빠르고, 얼마나 편리한데!

 

우리는 아르마도레스 데 산탄데르(Armadores de Santander) 호텔 앞에 위치한 작은 부둣가로 가서 아바나 만을 오가는 정기선에 승선했다. 아바나 만은 내륙으로 꽤 깊이 들어오기 때문에 바로 앞 땅에 딛기 위해서 택시를 타고 생각보다 먼 거리를 돌아야 한다. 아주 싼 가격으로 정기선을 타는 대신 목적지까지 조금 걸어야 하지만 이 산책에서 얻는 여유로움이 쏜살처럼 지나가는 택시 밖의 풍경보다 더 아름답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내가 만든 성이지만 참으로 아름답지 않소? 자, 보시오. 그 지긋지긋한 해적놈들도 이제 다신 함부로 노략질을 못할 것이오. 여기서 대포를 줄기차게 쏘아 댈텐데 감히 지들이 배겨내겠소? 보시오! 바다에는 숨을 곳이 없고, 성 전체에 포신이 아바나와 카리브 해로 쫙 펼쳐 있으니 어디 피할 구멍이 없잖소. 완벽한 성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구려. 잘 들으시오. 난 이 성에 대한 자부심으로 말하는 것이오. 만약 이 성을 점령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곧 아바나를 가지는 것과 같소!"

 

카리브해 진주라는 별명답게 쿠바는 훔쳐갈 것들로 즐비했다. 하다못해 아예 이 섬을 훔칠 계획도 여러 번 있었을 정도니까. 무엇보다 쿠바 앞바다에서 사사건건 심기를 건드리는 해적들의 작태에 대한 견제를 위해 이 요새가 처음 세워졌다. 1603년의 일이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고 요새를 짓고 나서는 아예 대포들을 전열하며 보다 적극적인 전투태세에 대비했다.

 

1762년 해적이 아닌 영국의 원정대가 치열한 전투 끝에 처음 이 성을 차지했지만 말라리아와 황열병을 이겨내지 못하고는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플로리다와의 빅딜을 통해 이 섬을 벗어났다. 스페인 역시 정복 초기 쿠바 원주민들을 강압적으로 통제시키며 식민지화에 성공하는 듯 했지만 멀리 떨어진 본국과의 의견충돌은 결국 독립의 물꼬를 튼 시발점이 되었다. 이 모로 요새를 선점했던 열강들이 초라하게 후퇴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후에 여러 차례 침공과 지배의 역사가 이뤄졌지만 종국에는 그 혈흔의 역사로 얼룩진 아름다운 성이 되어 이탈리아 건축가 보티스타 안토넬리(Bautista Antonelli)는 쿠바에 큰 이득을 남겨 주게 되었다.

 

이 성이 다른 성과 달리 더 로맨틱한 운치가 있는 건 하나의 포인트 때문이다. 1845년 바로 이곳에 쿠바의 첫 등대가 세워졌다. 오래 전 전투에서 스페인의 용감한 지휘관인 돈 루이스 데 베라스코(Don Luis de Velasco)는 이곳에서 격전 중 사망했다. 얼마나 뛰어난 군인이었는지 영국군에서도 그의 용기만은 인정할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모로 요새의 등대는 잔잔한 빛을 내며 밤마다 어둠과 어두운 역사를 동시에 덮고 있다. 어쩌면 시간이 오래 흐른 지금 돈 루이스의 감은 눈에서만 그 역사가 되새겨질지 모른다.

 

우리는 누가 '덤앤 더머' 아니랄까 봐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는 곳에 길을 만들어가며 힘겹게 성에 올랐다. 성 위에서 맞는 바람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말레콘에서 성을 바라볼 때와는 또다른 느낌이다. 말레콘에서 바라볼 때는 그저 아름다운 성에 불과했던 것이 여기서 말레콘을 바라보니 꼭 지켜줘야 하는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그런 풍경이다. 가만, 감동받기에는 뭔가 허전하다. 그래, 이쯤에서 콜라 한 잔 들이키자. 그러면 이 느낌 더욱 청명하리라.

 

아바나의 전경이 눈에 가득할 때 이미 몰려든 먹구름이 터졌다. 소나기를 피해 들어선 성 내 가게에서 이 성을 밟은 아주 작은 환희에 보답하기 위해 콜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전쟁은 치열하다. 인생은 전쟁이다. 고로 누구나 인생은 치열하다. 그 찰나에 휴식이 필요할 때, 그리고 쉼을 누릴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콜라 한 캔 다 비워낼 때까지 그 어떤 간섭없이 그 어떤 고민없이 사색하며 바라 본 아바나의 풍경이 오래도록 그리워질지 모른다. 이젠 슬슬 짐을 싸야 할 시간이다. 이 땅과 입맞춤을 할 시간도 40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쿠바#세계일주#자전거여행#라이딩인아메리카#아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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